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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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문하는 이들 너무 서둘러요"
전 동국대 총장 황수영 박사 '신년 원로대담'

황수영 박사.
건강한 모습 뵈니 반갑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학술원 회원으로 활동하며 미술학회에 가끔 원고를 내기도 하고, 힘닿는 대로 석굴암에 관한 연구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는 국론분열에 경제 불황까지 겹쳐 국민들에게 고통스러운 한해였습니다. 을유년 올해는 나아지기를 바라는 국민들 여망이 큰데요.

-참으로 힘든 한 해였지만, 국민들이 슬기롭게 헤쳐 나왔다고 봅니다. 국민들이 성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머잖아 좋아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박사님께서는 한국 전체가 산업화의 소용돌이에서 서구화를 지향하던 시절 역으로 우리 것에 천착, 한평생을 불교미술 연구에 바치셨습니다. 정말 대단한 ‘용기’였다고 여겨집니다.

-불교가 좋고 문화재가 좋아서 한 것일 뿐입니다. 스승인 고유섭 선생님께서 못다 하신 일을 이어 한 것이기도 하고요.


박사님 말씀 가운데는 늘 고유섭 선생님이 계십니다.

-선생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인연이 길지는 못했지만 매우 강렬한 가르침을 주고 가셨으니까요. 학창시절 방학만 되면 개성박물관을 찾아가 선생님을 뵙고 문화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찌나 즐거웠던지 매일 찾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던 차에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선생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선생님의 자료를 인수해서 활자화하고 전집을 엮어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전집 작업 중에 자연히 선생의 뜻을 이어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연구해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됐습니다.


박사님께 불교미술학은 어떤
미수를 맞았건만 황 박사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의미입니까?


-불교미술사 연구는 곧 우리 문화정체성을 찾는 작업입니다.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 호흡해온 불교는 특정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 문화와 일체를 이뤄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교미술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불교미술학 분야를 개척하다시피 하면서 많은 연구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후학들을 위해 공부하는 자세를 가르쳐주시지요.

-요즘 학문하는 이들을 보면 너무 서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른 학문도 그렇지만 불교미술학은 급히 서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발굴이라도 할라치면 묵묵히 땅을 파며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문헌 자료를 찾아 오랜 시간 헤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진득하니 연구에 매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게 불교미술학 연구입니다.


박사님의 얼굴이 서산에 있는 백제 마애불과 너무 흡사하다는 말들을 합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궤적이라고도 하는데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서산마애불 얼굴 그대로이십니다.

-과찬입니다. 따로 불교적인 수행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불교 문화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다니다보니 명산대찰 안 가본 곳이 없고, 그게 또 큰 즐거움이다보니 늘 밝은 표정이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특히 석굴암 연구 및 복원 공사를 위해 석굴암에 머물렀던 3년간의 시간은 지금도 잊지 못할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박사님께 석굴암은 일생의 화두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재를 꼽으라면 단연 석굴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는 석굴암의 본존불이 아미타불인지 석가모니불인지 아직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미타굴’ ‘수광전’ 등의 현액이 발견됐을 뿐 아니라 석굴암 건립 당시 아미타신앙이 융성했다는 역사적 사실, 서방에 앉아 계시다는 점 등 학술적 근거는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본존불 수인이 항마촉지인이라는 사실만을 근거로 석가모니불이라 주장한 일제 학자들의 의견을 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석굴암 본존불 명호에 관한 연구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박사님은 문화재 반환을 위한 노력도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일문화재반환협상 때 전문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문화재 반환의 핵심은 우리 박물관에 있던 유물을 일본이 유출해간 문화재를 반환받는 것이었습니다. 박물관 유물장부를 근거로 협상을 벌였고 1천500여점을 돌려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이 약탈해간 문화재 규모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규모로서, 아쉬움만 남는 협상이었지요. 늦기 전에 유출 경로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하고 환수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본사 위영란편집부국장과 대담중인 황수영 박사.



오는 10월이면 세계6위 규모의 국립중앙박물관이 문을 열고,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도 9월에 개관합니다. 우리 박물관계의 산 증인으로서 감회가 클 것 같습니다.

-박물관이 질적·양적으로 많이 팽창했습니다. 문화재에 대한 국민 인식 수준이 높아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일로서 반가운 일입니다. 특히 우리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불교 성보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이 생긴다는 것은 기뻐할 일입니다. 산중 사찰의 성보들까지도 순환전시를 통해 손쉽게 접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문득 문득 우리가 후손에게 어떤 조상으로 비쳐질까 걱정스런 맘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부끄럽지 않은 조상으로 기억될까요. 조언 부탁드립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을 다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뒷 세대에게는 튼실한 자산이 됩니다. 화려하고 가시적인 것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면 당장은 멋져보여도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발전은 불가능합니다. 후손에게 밝은 미래를 선물하려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기초를 튼튼히 다져합니다.


올해로 미수를 맞으셨는데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십니다. 비결이 궁금합니다.

-글쎄요. 하루 8시간 정도 푹 자고,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낸다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일까요.


귀한 말씀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황수영 박사는
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1918년 개성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귀국해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학예관으로 근무했다. 1972년 동국대에서 한국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동국대에서 교수·박물관장·총장을 지냈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다.

대담=위영란편집부국장 |
2005-01-11 오전 9: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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