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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성직자 좌담, "종교는 본래 화합"


좌담에 참가한 이동연 목사ㆍ홍창진 신부ㆍ윤원철 교수(사진 오른쪽부터). 사진=박재완 기자


지구촌에서 거의 유례가 없는 다종교 국가인 우리나라는 그 특수성 때문에 ‘종교 갈등’이라는 도화선을 늘 안고 있다.

특히 2004년은 이명박 서울시장의 ‘서울시 봉헌’ 발언과 정장식 포항시장의 홀리클럽 논란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종교간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본지가 지난해 10월, 창간 10주년을 맞아 전문여론조사기관인 ‘리서치 앤 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만20세 이상의 국민 1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인의 종교인식 의식조사’ 결과에서도 ‘한국사회에서도 종교간 갈등이 발생할 것’이라는 응답이 절반 가까이(46.6)를 차지했다.

이러한 때 종교 갈등의 원인이 무엇이고, 종교가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짚어 봄으로써 ‘상생’의 시대를 열어보자는 의미로 각 종교 성직자들을 초청, ‘종교화합 좌담회’를 개최했다. 좌담은 12월 23일 본사 사랑방에서 진행됐다.

<사회>: 윤원철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참가자>: 지원 스님(조계종 사회부장), 이동연 목사(인천 한누리교회 담임목사), 홍창진 신부(천주교 주교회의 총무)


윤원철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윤원철(이하 윤): 오늘 불교와 개신교, 가톨릭의 성직을 맡고 계신 분들이 어렵게 한자리에 모였다. 다종교 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가 가지는 중요성이 아주 크다. 하지만 이에 비례해서 종교 사이의 갈등이나 위기감도 커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때문에 간혹 심심찮게 종교간 불화의 씨앗이 되는 사건들도 일어나고 있다.
이번 좌담회에서는 근래에 일어났던 이명박 서울시장의 ‘서울시 봉헌’ 발언과 정장식 포항시장의 ‘성시화’ 발언 등으로 불거진 종교갈등의 원인과 그 해결책을 살펴보고자 한다. 각 종교가 한국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노력하고 내부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의 종교적 이상을 추구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를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먼저 한국사회에서 종교가 어느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으며, 그 존재의의는 무엇인지를 짚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동연(이하 이): 1990년대 후반부터 ‘종교가 과연 필요한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신라나 고려시대 때 불교가 국교(國敎)로서 나라의 지원으로 발전했고 개신교는 이승만 정권 시에, 가톨릭은 장면 정권과 함께 성장하는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종교가 혼자 오롯이 나아가야 할 때다. 각 종교들이 권력의 외피에 힘입지 않고 창시자들이 추구했던 최초의 이상(理想)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창시자들을 브랜드로 내세워 자신의 이익 추구하는 집단으로 전락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종교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 불교가 없었다면, 한국인이라는 지금의 정체성이 있었을 것인가. 개신교 없이 근대화가 가능했을 것이며, 가톨릭의 노력 없이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종교후기사회에 들어서면서부터 종교가 감응을 주지 못하고, 지치면 잠시 찾아와 쉬고 상담을 받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너무 가벼워진 것이다. 종교의 본래 목적이 개인과 사회의 구원의 문제, 인간 존재를 확인해주는 중대한 책무 맡고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벤트 위주로 흘러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때 반짝 인기를 얻을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쇠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된다.

지원 스님(조계종 사회부장).
지원 스님(이하 지원): 전적으로 동감한다. 종교가 지상에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통한 회향정신, 나눔정신 등과 관련짓는다. 불교적으로 얘기하자면 육바라밀 중에서도 보시바라밀, 즉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강자는 약자에게, 가진 자는 못가진자에게 나눔으로써 그 가르침을 실천한다. 그 나눔은 물질적인 것도 가능하지만 정신적인 부분 역시 중요한 것이다. 고통 받고 신음하는 현장에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불교의 자비정신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아쉬운 것이 있다. 과거의 역사는 차치하더라도 현 젊은 세대일수록 불교에 대한 관심도가 부족하다.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불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종교가 영적인 깨달음으로 이웃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부족했다고 본다. 이는 각성의 문제일 수도 있다.
특히 요즘에는 순수신앙으로서의 종교의 가능성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기능도 그에 못지않게 강조된다. 일체치하에서는 종교인들이 중심에 되어 민족의 문제에 적극 나섰다.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주독립이 있었다. 이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면 인권, 환경, 통일, 복지 등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종교가 중심이 되어 건강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각 종교가 자체적으로 해야 할 일도 많겠지만, 종교의 역할을 대사회적으로 회향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시대에 종교가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종교가 앞장서서 다뤄야 할 부분이 있다. 한 예로 종교계 복지기관 등이 개신교가 갖고 있는 사랑의 정신, 불교 자비 정신 등으로 투명하게 잘 운영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에 있어 자신의 종교만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종교가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그들이 연합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잘 이뤄진다면 종교의 대사회적 역할이 증대될 것이다.

홍창진 신부(천주교 주교회의 총무).
홍창진(이하 홍): 갈등구조에서 벗어나 화합구조로 논의하자는 얘기인 듯하다. 종교가 존재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개인과 세계의 구원이다. 우리나라는 굴곡 많은 역사 속에서 다양한 종교가 들어왔고 그 속에서도 계속 파생이 되어 ‘종교백화점’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종교가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은 패권을 차지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서만 알뿐 서로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같은 종교간 대화를 위한 단체도 만들어져있다. 하지만 신도들의 의식조사를 해 보면 대부분 이웃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학교 학부모회 같은 데서 종교문제로 싸우는 일도 있다고 한다. 종교화합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들도 사실 서로 깊이 관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예 관심을 갖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 최근 들어 교회나 성당, 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종교란 신도가 있어야 유지되므로, 설교를 할 때 다른 종교를 좋게 이야기하기는 사실 어렵다. 쉽게 예를 들자면 국민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 사람들을 신도로 육성하려는 곳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 비극이다. 인구는 한정되어 있는데 모든 종교에는 ‘복음을 전하라’는 행동원리가 있다. 그래서 서로 교인을 끌어오는 싸움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동연 목사(인천 한누리교회 담임 목사)
: 개신교에서 보자면 교인을 끌어오려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불교신자가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자연히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지원: 불교는 교리체제 등에서 관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백화점과 같은 현실에서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그나마 잘 지내고 있다. 중동 이슬람교만 봐도 파벌 때문에 민족끼리 피를 흘리고 있다. 불교가 한국의 종교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만은 아니지만, 선의의 경쟁 속에서 교세를 펴 나가려고 한다.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그들에게 어떻게 용해시킬까를 고민하기도 한다. 이것이 국민들에게 다가섰을 때 불교가 새롭게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선에서 이러한 문제를 경험하고 고민했던 분들이라 운을 떼니까 말이 봇물처럼 흘러나온다. 단숨에 종교 갈등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과 실태 등을 짚었다.
간단히 정리하면 오늘날에도 종교적 이상이 갖는 의미는 퇴색하지 않았고, 종교가 개개인과 전체 사회를 이끌어나가야 할 막중한 책무가 있다. 하지만 ‘권위’ 자체가 무너지는 시대에 종교도 그 필요성이나 역할에 대한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게다가 종교도 자본주의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보니 이익집단이나 심지어 ‘장사’라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진단이었다.
아마 세계에서 한국처럼 다종교인 곳도 없을 것이다. 그 속에서 개인이 종교 활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는 아직 정리되지 않고 있다. 지원 스님이 언급한 공직자들의 자기신앙 표출, 운동선수들의 종교적 세레모니를 비롯해 종립학교에서의 종교 활동문제, 기업의 종교 강요, 기업 내 종교의례 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관습적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하는 고민도 해보게 된다.
종교적 자유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자신의 종교활동을 하는 것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적 개방적 종교행위로 나타나는 것은 어디까지는 허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기준이 형성이 되어야 하는데, 각자 종교 내부에서도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종교후기사회를 정확하게 묘사한 말인 것 같다. 종교후기사회에서는 개인의 신앙을 공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내려는 행태가 보인다. 축구선수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세레모니를 했을 때 타종교에서 문제를 삼을 수도 있고, 공식적인 행사에서 자신의 종교 의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 절하고 기도하는 것이 종교의 진정한 모습일까? 공적인 자리에서 내 신앙 신심 표출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종교가 공적인 자리에 설 수 없다면 결국은 ‘상담자’나 ‘치유자’로서만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 이제는 공적인 위치나 권리를 놓아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다. 우리 종교인들이 대화해서 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나라 인구의 70퍼센트가 종교인이다. 하지만 지금은 종교일반과 종교인이 존중받고 있는가? 권위가 없어진 것이다. 이러한 때 종교인들간의 대화가 급선무다. 성직자들이 서로 대화하고 공동선(共同善)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일반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 그동안의 종교화합이라는 것이 지도층이나 학자들의 고준담론에 불과했다. 어쩌면 일부러 더 깊이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종교의 침체는 같이 사느냐 같이 죽느냐의 문제다. 대안 마련해야 한다.

: 단순히 사회적인 위치나 공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존경받는 시대는 지났다. 종교인들이 대화를 통해 공동 모색을 시도하는 자리가 필요하다. 종교간의 대화가 급선무일 것 같다. 천주교의 경우 현재 이웃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등의 문제도 논의해 왔다. 종교 신념을 사회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시늉만 하는 모임이 아니라 공동으로 대안을 모색하는 방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돼야 한다.
그동안 그러한 자리가 적잖게 있어왔지만, 지도층들의 친목모임이나 학자들의 고준담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각각의 종교인들은 사회적인 역할에 대해 강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개개의 발언 수준에 머무르며 무시당하고 있다.

: 프랑스는 공적인 자리에서 종교를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하고 있다. 또한 학교에서 종교적 상징물을 하고 다니는 것도 법으로 금하고 있을 만큼 종교의 공적인 표현을 제한하고 있다. 그런 반면 아직 국교를 가지고 있는 나라도 많다. 우리도 서둘러 종교의 공적 표현을 어디까지 제한하고 개방할 것인가를 합의하고 설정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 두 가지 차원에서 종교간 대화가 가능하다. 그동안은 교리에 대한 내용에만 치중해 있었다. 기독교나 불교가 추구하는 바가 같다거나, 극락이나 천국이 의미하는 바가 비슷하다는 수준이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일반 종교인들의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 정도 수준을 종교대화라고 한다면 탁상공론이 될 수밖에 없다.
고등종교에서는 생명을 신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 신의 영역에서 구원, 해탈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생명이 인간의 손을 떠나가고 있다. 생명복제이니 생명창조니 하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이제 종교가 인간을 섬기는 모습으로 거듭나야. 성직자들일수록 현장 속에서 인간을 더 많이 섬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종교화합을 위한 행사나 기자회견 등의 연출로는 일반인들에게 종교가 더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다.

지원: 서울시 봉헌 등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명박 시장의 행동은 개인의 잘못으로 돌릴 수도 있지만, 이들을 이끌어줘야 할 성직자들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고 본다. 오늘날 국회가 민생을 뒷전으로 한 채 자리싸움을 하고 있는 것도 종교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 정치인들을 역시 종교인의 한 사람이므로 종교에서의 자비와 관용의 정신으로 이끌어준다면 이들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좋은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 무엇보다 종교 간의 대화가 아주 절실하다고 본다. 그동안 한국종교인평화회의 등을 통해 몇몇 종교 지도자들이 탁상공론을 벌인 것이 끝이다. 연출된 액션들밖에 없으며 대한민국예술제 정도만 함께 하고 있는 정도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상의 것을 논의해야 한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일치문제’로 그 간극을 줄이려고 하고 있다. 한 집안 식구들인데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일년에 한번씩 중앙에서 일치 기도회를 한다. 최근에는 전국적으로 한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서 천주교에서 함께 할 개신교 관련단체를 구하고 있다.
천주교와 불교 역시 마찬가지다. 석탄절과 성탄절에 현수막 등을 통해 서로 축하를 나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무르면 안 된다. 중앙의 대화채널이 전국에 확대돼야 한다. 이 같은 대화가 거듭 이뤄지면 이 사회에서 종교가 인정받을 수 있고 종교 가치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도 단위에서 종교간 지역 채널을 만들어서 동네 성직자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 마련하는 것은 어떨까. 함께 모여 중앙에서 나눈 얘기들 함께 나누고 ‘공동선’을 만들고 있다는 모습 보여줘야 할 것 같다. 이를 통해 문제가 발생한 부분에 대해 ‘대안의 기본틀’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 지역까지 그런 공식적인 대화 채널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대화 이전에 당장 우리사회에서 종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부분에서 행동하는 것도 필요하다. 함께 활동하는 과정에서 대화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는 이러한 활동 실행계획이 없는 것 같다. 언론에서 선행에 대한 보도가 자주 이루어지는 데 대부분이 종교인들이다. 이러한 일이 한 두 개 특정 종교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종교계 전체에서 이뤄져야 하나.

: 바로 그러한 조직을 갖추는 것이다. 조직이나 환경, 인권, 통일, 복지 등의 이슈가 없이는 대화도 없다.

: 복지단체를 운영하는 종교들은 단체에서 꼭 종교 의식을 행한다. 기도나 찬송, 예불 등이 종교인들이 함께 활동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다.

: 종교간 대화를 위해서는 각 종교의 특색은 제외해 둬야 한다. 봉사를 할 때는 사회봉사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봉사가 선교나 포교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불우이웃에게 쌀이나 도움을 주는 것은 좋지만 조건이 없어야 한다. 이런 부분에서부터 공적인 영역을 구별한다면 종교간의 화합이 더 빨라지지 않을까?

지원: 복지관 운영 등 교계 차원에서의 복지 활동은 사람들을 돕는 차원에서 끝내야지 종교인구를 늘리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최고 덕목은 무주상보시다. 내가 도와줬다는 것 그 자체를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얼마 전 평생을 콩나물, 두부 장사해서 모은 돈을 학교에 기증한 이가 있었다. 무종교인이었지만, 회향의 정신과 나눔의 정신 등을 교육계에 환원하는 것이 예수, 부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이더라. 종교인들은 이와 같은 행동들을 보고 많이 배워야 할 것 같다.

: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오늘날 ‘종교의 위기’라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제자리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종교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사회, 인류, 개개인에게 모두 불행한 것이다. 종교의 의의를 알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개인도 불행이다. 종교가 제 역할을 본령에 충실하고 시대의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거기에 알맞은 종교의 역할과 사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종교 갈등 에피소드는 근본적으로 종교가 맞고 있는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인들의 인식 부족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옮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종교간 대화가 풀뿌리 사회로까지 이어지기 위한 채널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종교간 대화라는 것은 단순히 교리 차원의 접근을 넘어서 우리 생활 현장에서 당장 종교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 단체들이나 지역에서 함께 함께 노력해야 한다.

지원: 사립학교 중에서 기독교 학교가 많다. 그로 인해 종교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미션스쿨이라도 기독교 개론만을 얘기하지 말고 타종교 교리 등도 가르쳤으면 한다. 종교 갈등은 우리 세대에서 정리해서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다.

: 세속사회는 탈중심, 탈권위 사회이고 중심과 변방의 순환이 매우 빠르다. 예전에는 속칭 종교 지도자, 사회 명망가들이 성명서를 발표하면 거기에 속한 단체들이 그 뜻에 따랐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떤가? 심지어 김수환 추기경의 권위도 추락했다는 말이 오간다. 모든 가치가 붕괴되고 분열된 시대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지만 한 가지 위안은 종교가 자본주의에 의해 실종된 ‘가치’를 제시할 수 있다는데 있다. 자본이 아닌 인간성 그 자체를 존중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제시한다면 오히려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종교들도 그 역할을 가치교육으로 전환한다면 한 가닥 희망이 보인다.

지원: 요즘 최고 관심사가 생명 복제 문제다. 종단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줄기세포에 관련해 기독교에서도 신학적인 정립이 되어있지 않고, 불교도 윤회 등의 관점에서 생명 복제 관점을 제대로 정립하지 않고 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도 공동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생명복제 문제 등 과학과 종교가 부딪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것들과 관련해 여러 종교가 모여 논의해야 할 얘기가 많다.

: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한 얘기다. 한국 종교가 대부분 자본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세상 구원과 개인구원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좋다. 그러나 개인구원 쪽으로 맞춰가다 보니 성장주의로 기울고 있다. 이웃종교를 함께 나누는 것이 그에 대한 대안이다. 얼마 전 부산에서 종교인들끼리 자발적으로 공동선 실천 모임을 만든 바 있다.
그리고 함께 모여 국소적인 주제의 대화를 넘어 환경이나 지역사회 문제 등의 공동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웃종교를 의식하고 함께 살아갈 줄 아는 센스를 키울 수 있다. 공동선을 모색하는 지역채널을 만들어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

지원: 2004년에는 서울시장, 포항시장 문제 등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국민이 선출하고, 국민의 세금을 받는 공직자라면 한시적으로 공직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공적인 자리에서의 종교 행위를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한 공직자 윤리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더 성숙한 해결책은 종교 내부에서 종교인들끼리 그런 문제 사전에 스스로 합의에 의해 방지하고 다른 방향으로 교육해 나가는 것이다.

: 법률이라는 외적강제에 기대기 이전에, 종교인들끼리 종교 내부에서 종교인들간의 자발적인 사전 합의에 의해 문제를 원만히 해결했으면 좋겠다.

지원: 종교 갈등이 빈번해지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의 몫이다.

: 국가적 권력에 힘입어 종교의 영역 침해당하기 전에 종교인들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지켜가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화의 자리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리가 많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2004-12-31 오후 12: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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