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무아(無我)의 오래된 설법은 특히나 우리네 현대인들을 당혹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전에도 그랬습니다. 불교가 전파되던 초기, 이를테면 그리스나 중국의 합리적 전통은 이같은 해체적 논법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불교가 이들 합리적 사고를 어떻게 설득해 나갔는지 한번 볼까요. 두 세계의 만남은 문명사적 의미를 띠고 있었습니다.
<밀린다팡하(Milindapanha)>라는 경전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역으로는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2세기의 박트리아 왕국,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방과 예전의 간다라 지방을 통치하던 그리스계의 지배자 메난드로스(Menandros)가 있었습니다. 라틴 이름은 메난데르(Menander)인데, 밀린다(Milinda)는 그 팔리어식 이름입니다. 이 지방에서 출토된 동전들을 보면, 법륜이 그의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로 보건대, 그와 불교와의 인연은 의심할 수 없어 보입니다.
<밀린다팡하>, 혹은 <나선비구경>
그가 불교 승려 나가세나(Nagasena)와 나눈 문답이 팔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은 그동안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해서, 남방불교에서는 삼장에 넣어주지도 않았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 그 경전의 중요성을 인정한 사람들에 의해 편집과 번역이 활발해졌습니다. 이책은 리스 데이비스(Rhys Davis·1890)와 호너(I. B. Horner·1963)에 의해 두 번 번역되었습니다. 전자는 <밀린다 왕의 질문들(The Question of King Milinda)>이라는 이름으로, 후자는 <밀린다의 질문들(Milinda's Questions)>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독일어로도 두 번 번역되었고, 불어 번역본이 하나, 일본어 번역본 몇 권, 그리고 우리말 번역본도 두 개는 확인했습니다.
이 경전은 불교의 중요 논점들에 대해 메난드로스 왕이 묻고 승려 나가세나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제를 개략 열거하자면, ‘자아의 본성에 대하여’, ‘올바른 토론방식’, ‘불안과 고통’, ‘열반의 특징에 대하여’, ‘신체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업(業)과 불평등’, ‘윤회와 공덕’, ‘윤회’, ‘극락과 지옥’, 그리고 ‘다섯 가지 덕성(五力)의 수행, 즉 계율, 믿음, 정진, 정념(正念), 선정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불교의 ‘지혜’에 대하여 묻고 대답했습니다.
만남과 대론(對論)의 분위기는 도시적이고 합리적입니다. 이 주변을 소묘한 다음, 오온의 분석과 무아의 지혜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려 합니다.
| |||
지상과 영원의 두 지배자가 만난 인연과 무대에 대하여
메난드로스는 기원전 155년에서 130년 무렵, 박트리아를 지배한 권력자입니다. 강력한 분석적 지혜와 높은 교양을 자랑하는 그는 당시의 지도적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하고 토론하기를 즐겼습니다. 뛰어난 현자들, 학식이 많고, 경건한 존경받는 사람도 메난드로스의 소크라테스적 공세를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왕의 날카롭고 근본적인 질문 앞에 다들 침묵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로서 그들이 딛고 선 토대가 얼마나 취약한지가 드러났습니다.
“박트리아에는 천상의 도시 사아갈라가 있었습니다. 산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아름다운 강과 호수들,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 공원과 잘 가꾼 정원들을 웅장한 성채가 둘러싸고 있고, 그 위에는 감시탑이 있는 번성하는 도시였습니다.” 경전은 이어, 그 도시 안에 집과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꽃과 향수, 공예 등 사치와 문화를 즐기는 시민들이 있으며, 귀족과 전사들, 그리고 종교적 정신적 수련자들이 한데 어울려 있는 질서와 번영의 도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서 연극의 한 장면처럼 왕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왕은 시종 데메트리오스로부터 나가세나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탁발 수도사가 이 도시로 오고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도 80,000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지금 가까운 근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정신적 종교적 문제를 놓고, 그의 뛰어난 대화와 변증을 시험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500명의 호위병을 이끌고 호화찬란한 수레에 올랐습니다. 곧 수많은 수행자들이 자욱하게 모여 있는 천막이 시야에 들어왔고, 왕은 잠시 아찔하여, 시종에게 저들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시종이 나가세나와 그 추종자들이라고 말하자, 왕은 충격에 휩싸여, 머리털이 곤두섰고, 생각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는 시종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누가 나가세나인지 말하지 말라, 가리키지 않아도 알겠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왕은 곧 나가세나를 알아보았습니다. ‘갈기 달린 사자처럼, 공포와 두려움이 없는, 당황하거나 흔들림 없는’ 그를 보고, 왕은 자신이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을 만나보았지만, 그리고 격렬한 논쟁을 겪었지만, 지금과 같은 공포를 느낀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오늘 패배할 것 같다.’ 그는 나직하게 신음했습니다.
둘은 인사를 나누고, 조금 거리를 두고 조용히 앉아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메난드로스가 예의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나가세나는 메난드로스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조용하고 거침없는 어조로, 심오하게 핵심을 짚어주었습니다. 메난드로스는 나가세나에게 다음날 자신의 왕궁에서 더 많은 얘기를 차분히 나누고 싶다고 했고, 나가세나는 그 초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다음날, 나가세나와 몇 십 명의 그의 동료들은 왕의 처소로 안내되었습니다. 나가세나는 영예롭게 지정된 상석에 가서 앉았습니다. 왕은 맛난 음식을 대접했고, 모두에게 새 옷을 선물했습니다. 왕은 나가세나 앞에 공손히 앉아 존자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섬세한 지성의 대화는 몇 날을 계속했고,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갔습니다. 지금 <밀린다와의 질문들>에 남아있는 것은 그 일부입니다.
그들의 긴 대화가 끝났을 때, 천지는 여섯 번을 진동했고, 번개가 번쩍였으며, 바다는 으르렁거렸고, 신들은 대지에 꽃비를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논리가 불교의 지혜를 만났다!” 먼지 없고 흠 없는 다르마 진리, 한때 나가세나를 뚫고 지나갔던 그 진리가, 지금 메난드로스에게로 흘러넘쳐 갔습니다. “무엇이든 일어난 성질의 것은, 모두, 멈추게 되어 있다.” 왕은 기쁘게 붓다와 지혜, 그리고 유전연기(流轉緣起)의 멈춤을 끌어안았습니다.
여기까지가 두 사람의 문명사적 대화가 이루어지는 배경입니다. 이때 승려 나가세나는 지상의 지배자인 메난드로스에게 ‘왕자(王者)의 방식’이 아닌 ‘현자(賢者)의 방식’으로 토론하고 대화하자고 요청했습니다. 현자의 방식이란 다름 아니라, 힘과 권력으로 윽박지르거나 복종시키지 않고, 자유로이 의견을 개진하고 타당성을 검증하는, 요즘 유행하는 어투로 하자면, ‘계급장을 떼고’ 대론(對論)하는 것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