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강의에서, 초기 불교에 있어 ‘지혜’란 오온(五蘊)의 분석적 명상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또 그 지혜를 개발하고 성취해 나가는데 있어, 팔정도(八正道)와 삼학(三學)의 동시 협력이 필요하다는 말씀도 했습니다.
오온의 분석적 명상이 무아(無我)를 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면, 팔정도와 삼학은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해나가는 실천적 체험이라 하겠습니다. 지식과 실천은 서로 도울 때라야 더 깊고 분명해지는 법입니다. 불교 또한 이 둘이 합해져야만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즉 니르바나(涅槃)에 다가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오늘은 제 사설을 지루해 하시거나, 반신반의하실 분들을 위해, 또 위의 취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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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마 니카야>의 일절
붓다께서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의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어느 날 아침 그분은 가사를 걸치시고, 발우를 들고, 사바티 성으로 탁발을 하러 나가셨다. 존자 라훌라가 그의 곁을 가까이 모셨다. 가는 도중, 세존께서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지나간 것이든 지금 있는 것이든 앞으로 올 것이든, 또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간에, 거대한 것이나 미세한 것이나, 투박하거나 세련되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온전히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것은 즉,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atman)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을 듣고 라훌라는 물었다. “물질적인 것들(色)만 그렇게 보아야합니까.” “아니다. 라훌라야, 물질적인 것들만 아니라, 감각(受), 지각(想), 정신적 구성물(行), 그리고 의식(識)까지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라훌라가 말했다. “(만일 나의 것도 없고, 나도 아니고, 자아도 없다면 그럼), 누가 오늘 탁발을 하러 마을에 들어가려 하겠습니까. 비록 세존께서 그리 권하신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러면서 라훌라는 돌아서서, 가부좌를 하고, 등을 곧추 세우고, 정신을 통일시켰다. 그때 존자 사리푸트라(사리불)가 이 광경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호흡이 들고 나는 것에 더 깊이 집중하시게. 그 집중적 관찰의 공부는 매우 유용하고 생산적일 걸세.”
밤이 다가오자 라훌라는 일어나 세존에게로 가서 물었다. “숨이 들고 나는 것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는 법을 어떻게 개발해야 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라훌라야, 사람 몸의 딱딱하고 단단한 것들, 가령 머리칼이나, 이빨, 가죽, 살점,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대지(地)적 요소들이다. 인간 속에 있는 물(水)의 요소들은 담즙, 점액, 고름, 피와 땀 등등이고, 불(火)의 요소들은 몸의 데우고 소화하고 태우는 기능, 즉 음식의 소화와 대사를 맡고 있다. 인간 속에 있는 공기(風)의 요소는 몸속에서 위로 또는 아래로 이동하는 바람, 배와 위장 사이를 흐르는 바람, 신체의 이 부분에서 저 부분으로, 그리고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그 바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공간의 요소들이 있다. 그것은 귀, 코, 입의 구멍, 그리고 음식물이 들어가고 머무는, 또 지나고 빠져나가는 통로이다.”
“인간의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은 외부세계의 다섯 요소들과 더불어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이다. 라훌라야, 이들을 올바른 견해(正見)로 ‘객관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이 안팎의 모든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atman)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보아야 한다. 이 올바른 이해와 자세를 갖춘 사람은 다섯 가지 요소들로부터 눈길을 돌리고, 그의 마음은 더 이상 그것들에게서 기쁨을 찾지 않는다.”
“마음의 상태를 대지(地)처럼 개발해라, 라훌라야. 사람들이 그 위에 깨끗하고 더러운 것들, 똥이나 오줌, 침이나 고름과 피를 마구 뿌리지만, 대지는 저항하거나 혐오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네가 대지처럼 자란다면 어떤 유쾌하고 불쾌한 일도 너의 마음을 붙잡거나 들러붙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네 마음을 물(水)처럼 개발해라, 라훌라야. 사람들은 거기로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마구 던져 넣지만, 물은 거기 저항하거나 혐오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또한 불(火)은 모든 더럽고 깨끗한 것을 태우며, 공기(風)은 모든 것을 날려보내며, 또 공간 속에는 거기 아무것도 세워 둔 것이 없다.”
“친밀한 마음(慈)을 개발해라, 라훌라야, 그렇게 하면, 악의가 점차 줄어들 것이다. 동정심(悲)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번뇌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喜)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혐오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평정(捨)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모순들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몸이 부패하고 있는 것을 더욱 뚜렷이 의식하는 마음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정념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떠서 흘러가는 성질을 뚜렷이 의식하는 마음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자아의 오만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호흡을 고르게 가다듬는 ‘마음의 상태’를 개발해라. 사문은 숲으로 가서, 나무 둥치 아래, 혹은 빈 집에 들어가 가부좌를 하고, 몸을 곧게 펴고, 정신을 통일시킨다. 그는 호흡이 들고 나는 것을 완전히 자각한다. 그가 호흡을 길게 들이쉬고 내쉴 때, 그는 그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가 호흡을 짧게 들이쉬고 내쉴 때, 그는 그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그는 몸의 전 과정과 마음의 전 작용을 의식하도록 자신을 훈련한다. 아울러 모든 사물의 무상함을 깨닫도록, 그리고 무정념과 무집착 속에서 쉴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한다. 정돈된 호흡의 상태를 개발하는 것은 이 점에서 매우 유용하고 생산적이다. 그렇게 호흡을 다스려 나간 사람은 그의 마지막 숨을 내쉴 때도 무의식의 혼침 속에 가라앉지 않고 완전한 의식의 각성을 유지한다.”
주변적 참고와 부연
문체는 좀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차분히 읽어보면 근본 취지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책의 편집자는 이 대목 위에 거기 ‘정념(right mindfulness)’이란 소제목을 붙여놓았습니다.
초기 붓다의 설법, 그 실천적 핵심이 여기 요약되어 있습니다. 주변적 얘기를 한 둘 해볼까요. 설법의 무대는 <금강경>과 마찬가지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입니다.
사위국(Srasvatti, Savatthi)은 지금의 네팔에 가까운 북부 인도의 사헤트 마헤트라고 합니다. 붓다께서는 한때 90만 호를 자랑하며 번성했던 이 도시에서, 깨달음을 얻고 난 후의 전법 40년 가운데 25년을 지냈습니다. <금강경>이 초기 아함부의 경전들과 무대가 같고, 서두도 비슷한 것으로 보아서도 <금강경>이 대승 초기에 성립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