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온을 체화하기 위해서는 팔정도와 삼학을 모두 닦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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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기,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시는 분이 있군요. 그렇지만 그저 고개만 끄덕여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이 다르고, 지식과 지혜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불교는 그래서 체화되지 않은, 몸으로 경험하지 않은 지식을 ‘알음알이’라 하여 불충분하고 불완전하게 여깁니다. 이런 ‘마른 지혜(乾慧)’는 자칫 수행자의 자만을 부풀리게 하는 심각한 해독을 끼칠 수도 있으니, 깊이 유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전부를 동원해야
각설하고, 이 법(法)을 온몸으로 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제가 저번에 건너뛴 팔정도(八正道), 즉 삼학(三學) 전부를 동원해야 합니다. 이 중 어느 하나도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각각을 잠깐만 살펴볼까요. 1) 올바른 이해(正見)와 올바른 의지(正思惟)는 더 말할 것도 없는데, 하나 덧붙이자면 올바른 이해에서만이 올바른 의지가 나옵니다. 행동을 선택하는 것은 의지이고, 그 의지는 다름 아닌 생각에서 나오니까 말입니다. 이 둘이 ‘지혜(慧)’에 속한다면, 3) 올바른 말(正語), 4) 올바른 행위(正業), 그리고 5) 올바른 직업(正命)은 ‘계율(戒)’에 속합니다.
그리고 6) 올바른 노력(正精進), 7) 올바른 관찰(正念), 8) 올바른 집중(正定)은 ‘선정(定)’에 속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 한 둘이 빠지거나 균형이 무너지면 다른 것들도 제대로 득력(得力)할 수 없습니다. 남의 험담을 즐기고 행동은 엉망이더라도, 문득 가부좌를 틀고 좌선에 몰입하면 깊은 선정에 들 수 있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까. 이는 그야말로 ‘사상누각’이요, 선가의 어법으로 하면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격’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삼학과 팔정도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를 도와주면서 상승해 나갑니다. 틀림없습니다.
위빠사나는 팔정도의 하나?
위의 항목에서 다른 것은 이해가 되는데 7)정념과 8)정정을 왜 ‘관찰’과 ‘집중’으로 번역했느냐는 질문이 있을 법하군요. 여기 몇 마디 설명을 보태 두고자 합니다. 7) 정념(正念)은 불교 고유의 의미와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right mindfulness라고 합니다. 아, 요즘 새 대안 수련으로 떠오르고 있는 ‘위빠사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위빠사나는 새롭게 불교에 수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 초기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전통적 수련법 중 하나이지요. 지금 보듯 팔정도의 하나라니까요.
그게 그토록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불교가 팔정도와 삼학의 전통이라기보다 화두법과 간화법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좀 아이러니칼하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위빠사나는 팔정도의 일곱 번째 항 정념을 현대적으로 수정 개발한 것입니다. 왜 그런지 볼까요.
7) 정념은 내 몸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행과정을 차갑게 주시하고 관찰하는 일입니다. 이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1분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반쯤 도통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니까요. 무엇을 주시하고 관찰하라는 것일까요. 대상은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1)육신(身), 2)감각과 지각(受), 3)충동과 정념(心), 4)사유와 의지(法)가 그것인데, 1)은 호흡을 포함한 육신의 활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2)는 감각적 자극에 대한 감정의 유쾌하고 불쾌한 반응을, 거기 내맡기지 말고 주시하는 것인데, 이게 정말 어렵습니다. 느닷없이 끼어드는 차에 대고 바로 욕이 튀어나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그것을 회광반조(廻光返照), “아하, 내가 지금 마음속에 화의 불길을 일으키고 있구나”하기는 어렵지요. 더구나 그것이 일어나고 축적되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을, ‘남의 일처럼’ 차갑게 관찰해 나가기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오죽하면 어떤 신부님이-혹은 스님이- 운전하면서 차마 욕을 할 수 없어 1-9까지의 번호로 대신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장안에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3)의 관찰은 탐욕이나 증오, 선망과 질투 등의 충동과 정념의 실제를 자기기만과 정당화 없이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4)는 그 밖에 마음을 떠도는 수많은 생각들이, 먼지처럼 뿌옇게, 생겼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집중하여 관찰하는 일입니다.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 1분을 놓지 않을 수 있으면 거의 견성 해탈에 다가갔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런 설명으로 제가 왜 7)정념을 ‘올바른 관찰’로 명명했는지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즈음 이 개념을 두고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들이 많은 듯합니다. 여러 대안이 있겠지만, ‘마음 챙김’은 너무 억지 한글식같은데 순전히 제 편견인가요.
주자학의 경(敬)공부와 불교의 정념(正念)
아 참, 이 정념은 나중 수출도 하게 됩니다. 주자학이 불교를 그토록 배척했다는 것, 조선조에는 승려들을 도성에 출입도 안 시켰다는 소리는 익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학은 불교로부터 그 철학적 사고는 물론이고 수련법까지 배워갔습니다. 사람이나 사상이나 가까울수록 큰 목소리로 <차이>를 강조하는 법이지요. 주자학이 불교 형이상학과 심리학에 빚진 것은 나중을 기약하고, 우선 그 수련법에 있어, 정념(正念)을 핵심적으로 채택했다는 것만 말씀드려 둡니다. 물론 용어는 바뀌었지요. ‘경(敬)’이 바로 그것인데, 동사를 살려 ‘거경(居敬)’이라고도 합니다. 주자학은 경 혹은 거경의 방법으로 몇 가지를 들고 있는데, 거기 아예 서암 화상의 성성(惺惺)도 들어 있습니다. 성성은 <무문관> 제 12칙의 골자입니다.
서암 화상은 늘 자기 이름을 불러 놓고 스스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무개야!” “네.”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해(惺惺著)!” “네.” “차후로는 누구에게도 속아서는 안돼!” “네, 네.”
주자학에서의 경(敬)은 마음의 자각과 각성 상태를 유지하고, 자기 안팎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있는 경지를 말합니다. 그것을 “몸 밖으로 나간 마음을 내 몸 안으로 다시 불러오기”라고도 표현합니다. 주자학 또한 불교처럼, 우리가 죄를 짓거나, 악에 빠져드는 것은, 사물에 마음이 빼앗겨, 마음의 본래적 각성상태를 잃고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에 빠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