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 문화사>
12. 남북국시대 ④
번성했던 신라문화가 마지막으로 찬란한 꽃을 피우고 약간씩 정치적 불안상태를 나타낸다. 왕이 사찰이나 고승에게 다약(茶藥)을 보내고 불사를 많이 했다. 새로운 사찰을 건립하고 탑비를 세우는가 하면 입당 유학한 선비나 스님들이 귀국할 때 당의 다풍을 익히거나 그들의 차생활을 익혀와 퍼뜨리게 됐다. 890년 이후에는 견훤과 궁예가 등장해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중국도 왕공귀족에서 문인에 이르기까지 차를 마셨으니 황실에서 법문사(法門寺)에 내린 다구는 지금도 지하궁에서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배휴, 온정균, 육구몽, 피일휴 등의 문인들도 차를 즐겨 많은 시와 기록을 남김으로써 차를 한 층 높은 차원으로 승화 발전시켰다. 특히 선가의 조주종임 같은 고승이 나와 차와 선을 뗄 수 없는 관계로 맺어 놓았다.
① 백제 때 세운 성주사에 문성왕이 향과 차를 보냈다. 성주사 유적 중에 ‘다향수(茶香手)’라 새긴 비문(碑文)이 있다.
② 최치원은 진감국사와 무염국사의 비문에서 차 얘기를 했고, 중국에 있을 때 부모를 위해 질 좋은 다약을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친다장(謝親茶狀)’이란 글에서는 차의 정신세계를 말했다.
③ 온정균은 당나라 시인으로 재주가 뛰어나고 총명했으나 권세와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채다록(採茶錄)>을 남겼다.
④ 당나라 황실에서 사용하던 다구들을 법문사의 지하궁에 두었던 것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 모양이나 구조가 육우의 <다경>에서 말한 것과 거의 일치한다.
⑤ 당대의 시인으로 차를 좋아해서 ‘고인기다(故人寄茶)’라는 시가 있다.
⑥ 당대의 시인으로 차를 좋아했다. 그는 ‘고저산기’를 비롯해 많은 다시를 남겼다.
⑦ 조주종심(趙州從諶, 778~897)은 산동 조주 사람으로 속성은 학씨다. 차를 즐겨 ‘끽다거(喫茶去)’ 화두로 유명하다.
<한국>
남북국시대
850 성주사에 왕이 차와 향을 보냄 ①
857 최치원이 당(唐)에서 차를 보냄 <계원필경>
858 체증에게 왕이 차를 내림
860 보림사에 다약(茶藥)을 내림
865 도피안사 비로자나불 완성
869 김윤 등이 견당사로 감
870 김인 등이 견당사로 감
872 낭공(朗空)의 입당
873 황룡사 구층탑 수리
874 최치원이 당에 등과(登科) ②
@ 수철화상(817~893)이 차를 즐김
880 보조선사 창성탑비
888 무염국사 입정
<삼대목> 편찬
892 금산사 사리탑
후백제(견훤)
895 궁예가 칭왕(稱王)하다
898 차인(茶人) 도선(道詵) 입적
<중국>
당대
852 배휴(裴休)가 전문사가 되다
두목(杜牧)이 죽다(다시 ‘다산 茶山’)
856 선부경수록(양화)
@ 온정균의 활동 ③
873 희종(僖宗) 즉위
874 법문사에 다구(茶具) ④
@ 조업(曹鄴)의 활동 ⑤
@ 십육탕품(소이)
880 황소의 난
881 육구몽이 죽다
883 피일휴가 죽다 ⑥
@ 마은(馬殷) 제기 등이 활동
895 이극용의 등장
997 조주(趙州) 사망 ⑦
<일본>
898 우다왕(宇多王)이 현광사에서 차를 마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