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 종합 > 기획·연재
지현 스님의 스님이야기-적음 스님 편

봉화 청량사 주지 지현 스님.
김천 부근에 이르렀을 때 뉘엿뉘엿 해가 기울었다. 붉은 노을이 너른 들판을 물들이고 있었다.

노을 비낀 허공에 까마귀 몇 마리 서천(西天)을 향해 까악까악 울며 날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노을 비낀 허공을, 들판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소담스럽고 귀한 풍경이었다.

가까이 시가지가 있었고 여기 저기 띄엄띄엄 농가들도 보였다. 인심 좋은 어느 농가에 들러 저녁도 얻어먹고 하룻밤 잠자리도 얻어볼까 하다가 그만 포기했다.

심신이 지치기도 했지만 혹여 그의 청을 들어주지 못할 경우를 상정해서였다. 그리되면 그 자신이나 그 농가가 얼마나 난처할 것인가. 어두워 가는 저녁녘에 찾아 온 길손을 먹여주고 재워주지 못하는 농가 주인이나 그 농가를 뒤로 하고 떠나는 길손의 뒷모습은 또한 어떠할 것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 둘씩 불빛이 켜지고 있는 농가의 봉창들 뿐 그의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있긴 있었다. 저녁 바람결에 일렁이는 드넓은 보리밭이, 보리 이랑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내심 미소를 머금었다. ‘옳지, 됐다. 오늘 밤은 저기 저 보리밭에서 일박하면 되겠구나.’ 작정을 하고 성큼성큼 보리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참 흡족했다. 마음이 푹 가라앉았다. 아주 편안했다. 그 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스님, 이리로 나오십시오.”

뒤돌아보니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이 그를 손짓하여 부르고 있었다. 그는 일순 무슨 나쁜 짓을 하려다 들킨 아이처럼 주춤 부끄러움을 탔으나 이내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학생은 보리밭에서 나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자취를 하고 있는 그 학생의 방에서 따서운 밥을 얻어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 학생은 적음 스님과 동갑이었으며 차림새는 같지 않았으나 도반이었다. 그날 밤의 좋은 도반이었다.

이튿날 아침, 공양까지 따스하게 얻어먹은 적음 스님은 학생과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것을 운운(云云)하고 굳은 악수를 나누고 작별했다. 좋은 밤이었다. 보리밭으로 걸어 들어가 여름밤의 초롱초롱한 별들을 쳐다보며 지친 육신을 쉴 작정을 했었는데, 부처님의 가피인가 관세음보살의 애련심 탓인가. 착한 학생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하룻밤을 잘 보내고 나니 참으로 몸이 가뿐했다.

산중에 있다가 모처럼 보는 시가지는 낯설었다. 번잡스럽고 어리둥절하고 숨 막혔다. 그런 거리와 골목을 오고 가며 목탁을 두들겼다. 탁발을 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 자재보살..... 쌀을 한 웅큼 주는 이도 있고, 동전 한 닢을 주는 이도 있고, 지폐 한장 주는 이도 있고, “우린 교회 믿어요.”이러면서 내치는 이도 있었다.

어느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이르러서였다. 목탁을 두드리며 반야심경을 외자 조금 있다가 문이 열렸다. 앳된 여자 보살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대청마루엔 젊은 남자가 앉아 수박을 먹고 있었다. 갓 혼인한 신혼부부 같았다. 그들은 그에게도 수박을 권한 뒤 재미있다는 듯 이것저것을 물어 댔다.

잠시 땀을 식힌 뒤 그가 일어서자 신혼부부는 몇 장의 지폐를 그에게 전한 뒤 대문까지 나와 배웅했다. 더울텐데 안녕히 가시라고, 그러면서 그를 배웅했다.

스님들에게 있어 만행은 꼭 필요하다. 될 수 있으면 자주 만행을 행함으로써 세간의 이모저모를 살필 수 있어 좋고 하심(下心)할 기회가 생겨 좋다. 그것은 수행자에게 알게 모르게 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음 스님은 저녁녘에 쌀집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눈에 잘 띄지 않아 역 앞에 찾아들었다. 식당이라면 쌀이 필요할 것이고 그러면 쌀집을 찾을 필요가 없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서울식당’이란 그 식당.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식당 이름과 주인 모녀를 기억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땀에 젖은 후줄근한 몰골로 그가 식당에 들어서자 주인 여자는 선풍기를 돌려주고 물수건과 찬 보리차를 갖다 주었다. 시주 받은 쌀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따로 깨끗한 방을 내어 그를 묵게 했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 쯤 되었을 법한 주인 보살의 이쁜 딸도 금방 그를 따랐다.
그는 행복했고 노독(路毒)을 잊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는 황악산 직지사 일주문을 들어서며 그는 황홀했다. 대웅전 뒤 하늘을 찌를 듯 가늘게 솟아 있는 소나무들 위로, 안개 뿌우옇게 휘둘린 그 위로 흰 학들이 선경인 듯 날고 있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는 이른 아침의 황악산 직지사. 안개 뿌연 소나무들 사이로 흰 학들이 날고 있는 직지사.

스님 생애 만행의 한 가운데 점처럼 찍혀있는 그 때 그 여름의 기억들을 잊지 못하겠노라고 그는 되뇌었다. 그 때, 객실에서 만난 속리산 법주사 원주스님.

그이와 함께 보은읍 장터 좌판에서 참외와 막국수 등을 사먹던 일. 법주사 일주문 못 미쳐 있는 개울 옆의 수정암, 저녁 공양을 앞 둔 어린 비구니스님들이 개울에서 깔깔거리며 장난치던 모습들. 그것들이 아직도 그의 뇌리에 살아남아 있다. 그것들이 아직도 살아 그를 먼 기억의 오솔길로 내 몰고 있다.
지현 스님(봉화 청량사 주지) |
2004-12-17 오후 4:58: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11.2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