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리 전’이 끝난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가끔 그를 만나면, 그는 대성리를 추억하며 그리움에 젖는다. 젊은 피의 용솟음이 젊은 혼영들의 속살거림이 그를 먼 추억의 강물 속으로 떠내려 보내는 것일까?
세찬 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그 겨울 강가에서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의 내면의 정신세계, 그의 절대의 시적(詩的)탐구를 위함이었을까? 고통을 수반하는 젊은 날의 하나의 행로였을까?
모른다, 아직도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의 털털거리는 재봉틀 같은 웃음 속에서도, 비밀스런 저녁나절의 침묵 속에서도 나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다.
적음스님을 처음 만난 건 논산의 은진미륵 관촉사에서였다. 그 때가 언제였던가? 대충 꼽아보건대 이십 수년의 세월이 흐른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인다. 나쁘게 해석하면 아무 발전 없이 평범했고, 좋게 해석하자면 시종여일하게 평상심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고나 할까.
관촉사 시절 적음 스님은 아무런 소임도 맡지 않고, 그야말로 한주(閑住)로 지냈다. 방사가 마땅치 않아 큰 방에서 지내며, 그러나 그는 닥치는대로 그야말로 무소불이로 절일을 도왔다. 법당에 행사 있을 때면 목탁을 잡았고, 도량 쓸고 청소하는데도 따지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이 살며 그는 아랫마을 어느 집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논산 강경읍의 비린내 나는 폭우를 하루종일 서성거리다 오곤 했다. 아침 도량석은 스님의 몫이었고, 사십구재나 혼례식 등도 또한 그의 몫이었다. 단언하건대 얼굴 찌푸리고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있는 듯 없는 듯한 그의 행적이 새삼 그리워지는 오늘, 나는 이런 지면을 통해 그를 추억함이 참으로 따사롭게 느낀다. 한국 최초로 기획되고 실시된 야외 설치 미술과 퍼포먼스, 그 어렵다면 어려운 시기를 거쳐 온 적음 스님, 그를 오늘 이 밝아 오는 흰 새벽에 떠올리고 떠올린다. 스님은 아직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그는 멀리 떠나지 않고 우리네 곁에서 잠자코 머물고 있다.
‘삶은 견디기 어려운 것, 그리고 삶은 머나 먼 철길을 따라 떠나가는 것. 뜨거운 여름 날 천 년 묵은 미루나무 아래서 똥누기 내기 하는 어린 날의 기억.’ 적음 스님은 그의 산문집 <저문 날의 목판화> 서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이고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아무런 해답도, 또한 부질없는 그러한 물음도 우리네를 그저 공허하게 만들 뿐이다.
적음 스님, 오늘 이 겨울에도 일소암의 산자락을 쏘다니며 가을에 떨어진 도토리 줍고 있으신지? 조그마한 뜨락 옆 텃밭에 심어놓은, 캐지 못한 고구마를 한 뿌리 한 뿌리 캐고 있으신지?
스님이 내게 이런 얘길 들려 준 적이 있다. 열일곱 살 때쯤 처음으로 만행을 떠났을 때 얘기였다. 조그만 목탁을 걸망에 넣어 을러 메고 그가 머물고 있던 경상북도 성주 땅 선석사(禪石寺)를 출발해 보이는 마을마다 들러 목탁을 두들겼다. 잠은 비어 있는 집의 마루청 등에서 해결했다.
한 여름이었다. 두루마기를 머리끝까지 둘러쓰고 웅크린 채 잠을 청했지만 그저 선잠일 뿐 달려드는 모기떼 때문에 일어났다 누웠다 할 따름이었다.
초롱초롱한 여름밤의 별들이 논가의 빈 집 마루청에 누워 있는 그를 향해 쏟아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멀리서 이따금 컹컹컹 개 짓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밤 새벽 빈 집 마루청엔 으스스 한기가 스며들었다. 모기떼에 뜯기다 못해 그만 일어나 이리저리 잡초 우거진 마당을 왔다갔다 하다 그는 무작정 걷기로 했다. 이따금 들리는, 컹컹컹 개 짓는 소리를 뒤로 하고 마을을 빠져나와 신작로를 따라 걷고 걸었다.
뿌우옇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목탁을 두들겨 한 웅큼씩 받아놓은, 몇 됫박 안되는 걸망 속 쌀이, 축 늘어진 걸망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시물(施物)은 무서운 것, 시물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 그리고 시물에는 아무런 상(相)이 없어야 한다는 것,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야말로 참다운 보시라 할 수 있는 것, 그래야만 주는 자와 받는 자, 시물이 함께 청정해 진다는 것. 그는 그렇게 배웠다. 하루 이틀, 터벅터벅 걸어 김천 부근에 이르렀다. 김천은 직지사란 큰 절이 있는 고장. 거기에 들러 구경도 하고 하루 쯤 쉬어갈 요량이었다. 뜨거운 한 여름 햇살이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개울을 만나면 세수도 하고 발도 씻고, 느티나무 큰 그늘을 만나면 땀을 식히며 쉬기도 하고 가끔씩 마을에 들러 목탁을 두들기기도 하고, 운 좋으면 농부들 틈에 섞여 새참을 얻어먹기도 하고, 그렇게 김천 부근에 이르렀다.
* 봉화 청량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