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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매서추세츠주 캠브리지시에 소재한 캠브리지불교회(Cambridge Buddhist Association). 초종파 사원인 이곳에서 여성들을 위한 장기 수련회를 개최했던 묘린 묘온 스튜어트(Maurine Myoon Stuart: 1922~1990) 법사는 제자들에게 바하의 음악을 화두로 내어주는 독특한 선 스승이었다. 그녀에게는 선(禪)과 음악의 경계가 따로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수행과 일상 생활의 경계가 따로 없었다. 생활 자체가 선이 되는 ‘평상심(平常心)’의 경지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스튜어트 법사는 그의 저서 <미묘한 소리(Subtle Sound: The Zen Teachings of Maurine Stuart)>에서 베토벤의 ‘장엄 미사곡’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베토벤은 가톨릭의 미사곡이라는 형식을 일단 채택한 뒤 그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그는 곡의 모든 미세한 부분까지 다 파악하고 씨름해야만 했죠. 참선하는 수행자처럼 옛 교회 음악에 자신을 몰입시켰던 베토벤은 이후 그 형식을 초월하고 모두 내려놓았던(放下着) 것입니다. 베토벤이라는 인물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되살아난 ‘장엄 미사곡’은 모든 이에게 종교적 체험을 줄 수 있었던 거죠.”
스튜어트 법사가 즐겨 음악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은 것은 열정적이고 독창적인 가르침으로 유명한 피아노 은사 나디아 블랑제르(Nadia Boulanger) 여사의 영향이 컸다. 이미 2차대전 이전에 세계 굴지의 교향악을 처음으로 지휘했던 그녀는, 모든 작곡가의 기법과 음악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연주기법과 음악을 가르쳤던 것이다.
스튜어트 법사의 독창적이면서 다양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선 수행에서도 나타났다. 그녀는 임제종 수행자임에도 불구하고 조동종 선사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선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종파 불교의 장점을 받아들여 수행과 의식에 사용하기도 했다.
1922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스튜어트는 미국인과 결혼해 세 명의 자녀를 둔 평범한 주부였다. 1949년 프랑스에서 선불교를 처음 접했던 그녀가 본격적인 참선을 시작한 것은 65년 뉴욕의 선학회(Zen Studies Society)에서였다. 이곳에 머물던 임제종의 에이노 노사를 비롯해 나카가와 소엔, 야스타니 노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선학회에서 수행한 지 5년만에 스튜어트 법사는 캠브리지시로 이사했다. 여기서 그녀는 캠브리지불교회를 이끌던 <동양철학 이야기(The Story of Oriental Philosophy)>의 저자, 엘지 미첼(Elsie Mitchell)을 만나게 된다. 스튜어트 법사는 1977년 임제종의 에이도 노사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수련생을 지도하다가, 1979년부터 미첼에 이어 캠브리지불교회를 이끌게 된다.
스튜어트 법사는 캠브리지불교회를 지도하기 시작한 지 3년만인 1982년, 소엔 나카가와 선사로부터 스승이라는 의미의 ‘노사(老師, roshi)’ 호칭을 받는 전계식을 갖게 되었다.
심오한 동시에 장난을 좋아하던 소엔 노사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스승임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토록 오랜 인연의 끈을 알아볼 때의 마음을 그녀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것은 소엔 노사가 스승이거나 존경받는 승원장이라는 것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태양을 경건하게 바라보던 스님의 모습, 차 한잔을 마실 때도 차와 찻잔과 차를 따르는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는 스님의 평정심. 나는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그 분만이 나의 진정한 스승임을 확신했습니다.”(‘미묘한 소리’ 중에서)
스튜어트 법사는 재가자의 생활선을 중요시했다. 그래서 자주 수련생들의 가정이나 직장을 방문하곤 했다. 그렇게 할 때 가정과 선원, 일상생활과 좌선의 경계가 녹아들도록 지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 자녀의 엄마라는 가정주부로서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기도 했다. 선방에서 수행할 때는 가족에게 충실하지 못한 것 같고, 집에서는 수행하지 못하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스튜어트 법사는 결국 선(禪)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
“나의 삶에는 다른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행이든 가정이든 양보다 질이 더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아가는 것은 쉽지만, 돌아와 모든 것에 직면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수행입니다.”(‘미묘한 소리’ 중에서)
생활선을 지향하는 스튜어트 법사는 전통적인 승가처럼 거주 공동체를 만들지 않았다. 거주 불교공동체가 갖는 배타성으로 인해 삶의 풍요로움에 자신을 열지 못하고 권위적 정형화에 매몰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 관한한 자기중심적인 유아론(唯我論)적 시각을 갖기 쉽다는 생각도 있었다. 때문에 캠브리지불교회 수련생들은 이 곳에서 배운 것을 사회로 돌아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실천해야만 했다. 동시에 매달 개최되는 집중수련회에서는 일상생활을 접고 임제종의 엄격한 가풍에 맞춰 정진해야 한다.
선은 남성 또는 여성, 타이틀이나 계보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 스튜어트 법사. 그는 서구에서는 드문 여 스승이 되었지만 선불교의 가부장적 체제를 비난하는 강성 페미니즘 보다는 ‘선불교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고 주장했다. 소엔 선사가 가르쳤던 선수행은 ‘열린 마음으로,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 내어놓는 수행’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튜어트 법사의 열린 마음은 그녀에게 ‘수행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스승’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소엔 노사로부터 체득한 ‘지금 내가 직면한 상황은 내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란 가르침을 현실 속에서 경험한 것이다. 그녀의 은사인 소엔 선사는 늘 이렇게 말했다.
“사실 완성이라는 것은 없단다. 나도 수행중이고 너도 그렇단다. 어떤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가르침이 무엇인지 찾아내거라.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가르침이 될 수 있는 것이란다.”(‘미묘한 소리’ 중에서)
1990년 암으로 입적한 스튜어트 법사는 ‘어머니 노사(Ma Roshi)’라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다가오든,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피하려고 하지도 말고 달아나지도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