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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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공부에 정진해야"
505호 길을 묻는 이에게
우리가 마음을 생각할 때에 “마음이 참 요상한 놈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주 요상한 놈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요상한 게 아니라 마음내는 게 요상하겠죠. 부처님께서 가르쳐 준 뜻대로 몸은 육근, 육경, 육식이라고 합니다만 그 세 가지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의식이 색에 들고 색은 의식에 포함돼서 항상 밝게, 어떠한 생각, 어떠한 거든지 다 보게 하고 듣게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의식이 빠진다면 송장이 되겠죠. 그래서 오관은 우리들과 우리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원소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보는 거, 듣는 거, 냄새 맡는 거, 맛을 아는 거, 몸뚱이의 부딪힘을 아는 거 이렇게 다섯 가지 입니다. 보통 생각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고 그저 붙었으니깐 있으려니 생각합니다만 그 다섯 가지의 문제는 객관적인 세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수 상 행 식이 뒷받침을 해주고 있습니다, 색의 뒷받침. 아까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둘이 하나가 된다는 얘기죠. 그래서 합성행(行)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눈은 눈대로 소임을 가지고 있고, 귀는 귀대로 소임을 가지고 있고, 코는 냄새 맡는 소임을 가지고 있고, 혀는 맛을 아는 소임을 맡아 가지고 있고 몸에 부딪히는 그놈은 바로 경계를 소임으로 맡아 가지고 있죠.

그런데 보이는데 색으로만 소임을 맡는 게 아닙니다. 즉 대기권을 지킨다 이겁니다. 레이다 망이 들어오고 나가는 거를 알게 통신을 하고, 모든 면에서 나쁜 건 나쁜 것대로 들어온다고 소식을 통하는 소임을 맡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혹성도 대기가 있으니깐요. 그런 소임을 맡았기에 코는 음식 냄새만 맡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지 않은 냄새, 썩은 냄새 또는 구수한 냄새도 잘 맡아 들이는 소임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소임을 가졌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무심 속에서 무의 세계를 맛보는 소임 말입니다. 만약에 천차만별의 그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한다면 어떤 사업을 한다 하더라도 망할 것입니다. 품목에 따라서 자리를 올바르게 구해야 하는 판단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도 냄새를 필요로 합니다. 그 소임이 다 포함해서 돌아가는 겁니다. 눈의 소임은 색상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데에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이치와 모든 결단을 내리는 데 주목적을 두고 있는 심안입니다. 심안으로서 심안의 그 의식의 작용이 바로 육의 눈으로 줘야만이 이 심안과 육안이 동일하게 판단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색의 소임만 가진 게 아니라 주관적이기도 하고 객관적이기도 한 양면을 다 안고 판단을 내리는 소임을 가졌단 얘깁니다. 그리고 듣는 것도 마음의 귀로 들어서 동시에 같이 판단을 하게끔 만드는 겁니다. 제각기 판단이 아닙니다. 다섯 놈이 합심해서 하나로 돌아가면서 결단을 내리는 거죠. 그런데 왜 마음이 요상하다고 하느냐 하면, 나쁘게 생각할 수 있고 좋게 생각할 수 있고 나쁜 일을 하게도 하고 좋은 일을 하게도 하고, 즉 말하자면 육신의 모든 식들의 집합소가 한마음으로 뭉쳐서 하나의 안을 내세울 때에 비로소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기에 좋은 것이지 이것저것이 제각기 흩어져서 제가끔 생각을 낸다면 도둑질도 하게하고 나쁜 일도 하게하고 또는 ‘내’라고 나서서 마음을 혼동시킬 겁니다. 그런데 어떤 놈이 그렇게 시키는가 하면 항상 얘기하듯이 여러분들의 몸속에는 자생중생들이 있습니다. 자생중생들이란 천차만별의 업식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여러분 속에서 스스로 화나게 하고 에고를 닥치게 하기도 하고 병고도 걸리게 하고 영계성에 시달리게 하기도 하고 세균성에 시달리게 하기도 하고 또는 윤회성에 시달리게 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업보가 바로 여러분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두 여러분의 몸 속에 지금 도사리고 있으면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겁니다. 죽으면 죽는 대로 그 업식은 그림자처럼 따라서 짐승을 보고도 사람인 줄 알고 좋다고 들어가는 것은 자기의 업식과 차원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서 다시 모습을 가지고 나올 때도 사람으로 모습을 가지고 나올 때는 어머니의 살을 빌고 아버지의 뼈를 빌립니다. 빌린단 말입니다. 빌려서 자기 영혼의 근본이 자기를 형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서 정자 난자를 빌려서 자기를 형성시켜서 자기의 집합소로 만드는데 집합소는 `여래'의 집이라고 해도 됩니다. 자생중생들의 집합소!

그러나 여래의 집은 자생중생들의 집합소만 되는 게 아니라 삼라만상 대천세계에 모두 천차만별로 돼 있는 만물만생의 집합소입니다. 그래서 여래의 집이라고 합니다. 여래의 집이기도 하면서 관리인이기도 하고 주인의 심부름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한 생각 잘못으로 그림자처럼 짊어지고, 무겁지 않은 걸 무겁게 짊어지고 지금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49년 설하고 가르쳐주신 것은 업식에서 나오는 대로 속지마라. 한마음으로 네 아닌 게 없다고 믿어라. 네 오장육부 즉 네 몸 속에 있는 자생중생들이 너 아님이 하나도 없느니라. 그렇게 너 아님이 없다고 둘로 보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고가 그냥 무너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물질세계의 50%에서는 컴퓨터를 놓고 입력을 해서 씁니다만 우리 인간에게는 숙명통이라고 이름하는 자동적인 컴퓨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름을 응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컴퓨터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거와 행하는 거와 말하는 것 할 것 없이 모든 천차만별의 행이 전부 입력이 됩니다. 그런데 입력이 되는 것은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근본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에 모든 천차만별의 생활은 바로 가설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속에. 그러기 때문에 내가 마음 쓰고 행하고 말하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자동적인 컴퓨터에 입력이 되기 때문에 이 우주간 법계에 마음으로 전달을 하고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는 것이 우주간 법계에 입력이 됩니다. 모두가 돌아갑니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남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아무리 남이 모르게 행을 하고, 나쁜 행을 했든지 좋은 행을 했든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어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이 세상에 가설이 돼서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되고 통신이 되고 또는 삼천대천세계에 바로 직결이 돼서 법계에 통신이 되니 어찌 천당 지옥이 저기 먼 데 따로 있다고 하겠습니까? 우리 마음 속에 마음을 잘 다스리고 나간다면 천당을 가져올 것이고 잘못 다스리면 지옥을 가져올 거는 뻔한 이치입니다. 모두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은 자기만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내 마음속으로 ‘조놈’ 하고 밉게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쪽에서도 ‘요놈’하고 밉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스스로 내 탓으로 돌리고 “이 세상에 내가 났으니 상대가 있는 거지, 내가 나지 않았다면 상대가 있겠는가.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모든 게 내 탓이로다” 하고 내 탓으로 돌려놓고 참회를 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서 둘로 보지 않고 모든 게 하나로 돌아가야 할텐데 남을 원망하고 증오하고 미워한다면 바로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그렇게 미움을 받고 증오를 받고 우주간 법계에 일체 제불의 마음도 미움을 주게 돼 있습니다. 이 마음과 마음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슬기롭고 또 한 생각 잘 내서 창살없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느냐, 한 생각 잘못해서 창살없는 감옥에 갇히느냐. 웅덩이에 빠져서 세세생생에 허덕거리고 빠져 나오질 못하느냐,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과거에 진 죄는 오늘에 받고 오늘에 하는 것은 미래에 받는다고 했지만 어저께도 과거요, 조금 아까도 과거입니다. 그래서 어저께 따귀를 때렸더니 오늘 따귀를 때리러 오더라. 이렇게 표현을 해도 여러분이 다 알아들으시겠죠.

이런 문제가 있는 까닭에 일체 만법에 천차만별로 돼 있는 문제들을 녹여야 하고 또 양식 먹는 법을, 우리가 먹는 법이다 하면 불상도 자기하고 둘이 아니고 자기 마음과 둘이 아니게 놔야 됩니다. 삼 천년 전에 계셨던 부처님이 이 자리에 서 계시다 할지라도 그 육신을 믿지 말고 마음과 마음을 합쳐서 하나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풀 포기 하나 내 아님이 없고 내 모습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아픔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살림살이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남녀를 막론해 놓고 모두가 둘이 아니게 돌아가고 있는 이 자체를 우리는 바로 알고 모든 것을 집어먹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모든 걸 닥치는 대로 집어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모든 거를 닥치는 대로 집어먹되 걸리지 않게 집어먹어라. 체하면 막히고 막히면 죽는다 이런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섯 가지 재식법(齋食法)이 있다 했습니다.

첫째, 법재식이니 부처님이 가르쳐 준 뜻을 마음 내면에 새겨놓고 내 몸 속에 자생중생들을 한마음으로서 내주인공에 맡겨 놓는 것입니다.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맡긴다고 했습니다.

둘째, 선열법이니 물질세계와 내면세계가 둘이 아닌 마음을 갖고 그 근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니 그것을 감사히 주인공에 놓는 것입니다.

셋째, 염식이니 일체 제불의 마음이 한마음이 돼서 찰라에 내 마음을 통해서 나투니 이 또한 주인공에 감사히 놓는다.

넷째, 원식이니 행선, 입선, 좌선, 와선 이 모두를 한 데 합쳐서 참선으로 돌려서 둘 아닌 행을 하고 체험하고 다스리고 나가는 것이니 주인공에 감사히 놓는 것입니다.

다섯째, 불식이니 일체 만물만생을 보살피며 내 자생중생들과 더불어 무명 굴레에서 벗어나 걸림없이 여여하게 구족하니 이것을 일러 재식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를 생각할 때 여러분의 가정 가정 살아나가는 것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자 여러분의 법이며, 그 생활 자체가 생활이면서 참선이며, 바로 불법입니다. 여러분을 만나면 만나는 대로 항상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캄캄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시 또 말하지만 계향할 때에 마음의 계향이지 그것이 달리 이름의 계향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좋은 거든지 나쁜 거든지 나에게 닥치지, 내가 나지 않았더라면 부딪침도 없고 닥칠 일도 없죠. 그러니까 모두 닥치는 대로 내 탓이라 하고 돌려놓아야만 미움과 증오를 녹일 수 있고 화목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살아나가는 데 부부지간이나 자식지간에도 말로써 몸을 잡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마음을 잡으려 하신다면 바로 잡을 수 있지만 “요놈의 자식, 왜 그런 짓만 하느냐”고 자꾸 그러면은 빗나가서 나중에는 큰 도둑이 되고 큰 문제를 일으켜서 가정에 환난이 생깁니다. 그러나 “얘, 춥지 않느냐. 덥지 않느냐. 배고프지 않느냐. 어떻게 잤니?” 하면서 참 지혜로써 따뜻한 말을 해주고 따뜻한 행을 해주며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기고 마음과 마음을 전달한다면 자식과 부모라 하는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도 마음이 통합니다. 따뜻하게 대해 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 주면은 금방 바른 행으로 모두가 바뀌죠.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하셔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쯤 가슴에다가 손을 얹고 생각해 보고 또 한번 생각해서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을 해서 나쁘게 돌아가는 것을 좋고 슬기롭게 고뇌와 병고가 없이 돌아가게끔 할 수 있는 능력도 여러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실천해야 합
니다.

우리는 지 수 화 풍이 바탕으로 돼 있습니다. 모두가 바탕으로 돼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먹고살지 않습니까. 공기 하나만 없어도 우리는 살지 못하며 물 한가지만 없어도 살지 못하며 불이 없어도 살지 못하며 흙이 없어도 살지 못합니다. 그런 바탕에 의해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얘깁니다. 그 네 가지가 바탕이 돼서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아주 충만히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르고 있을 겁니다. 들은 분은 또 다시 듣겠지만 안 들은 분들은 잘 생각해서 들으십시오. 그렇게 능력이 있는 것도 여러분은 마음의 관습에 의해서, 살아 나오던 그 관습에 의해서 착이 떨어지지 못하고 습이 떨어지지 못하고 욕심이 떨어지지 못해서 자기 마음을 가지고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얽매이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원인은 그 까닭입니다.

그 네 가지의 요소가 바로 에너지의 참 원소로 돼 있다는 사실을 모두 불신해서가 아니라 몰라서 그렇겠죠. 있는지도 모르고 쓰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마음을 닦아서, 닦는다는 이치는 바로 다스리라는 겁니다. `놔라, 놔라' 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업식을 놓는 겁니다. 놓으면서도 거기다 맡기고 그대로 하되 함이 없이 하는 겁니다. 여러분 보는 것이 고정됨이 있습니까? 듣는 거나 말하는 거나 냄새 맡는 거나 몸이 움직거리는 거나 가고 오는 거, 이 모두가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바로 공했기 때문입니다. 공한 세계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하나를 잘 다스리고 나갈 수 있다면, 다스려서 놓고 어떤 에고가 있더래도 “에고가 없어지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어” 하고 놔 버려야 합니다.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체가 없는 데서 체가 있는 데로 나오는 거니까 바로 거기다가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무한대라고 했습니다. 유한은 육신이지마는 무한은 무심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하셔서 기복으로 전전하지 마시고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물질세계에서는 물질세계에서 대로, 무의세계는 무의세계 대로 한마음 한뜻이 돼서 전달을 하고 돌아가니 세세생생에 끊임없이 영원하더라 하는 이치를 아셔야 할겁니다.

질문자1: 사리신앙에 대해서 여쭙고자 합니다. 간혹 외국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다가 봉안하게 되었다는 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사리가 그렇게 많을 리도 없겠지마는 더욱이 진신사리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맞는지요.

스님: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아픈 사람이 부처님을 청해서 가셨는데 일어나지도 못하는 아픈 사람이 일어나려니까 “일어나지 마라. 네 마음이 내 마음을 알면 이 고깃덩어릴 보고 고깃덩어리가 일어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마음과 마음이 통했으면 그걸로써 족하니라.” 이러셨거든요. 꼭 그 말씀뿐만이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을 뜻하는데 그 물질인 사리를 보고 전전해서 되겠습니까. 물질을 보되 부처님의 마음을 보라. 부처님의 마음을 봤다면 마음을 지녀라. 마음을 지녔다면 마음을 자비로써 여러 사람들과 둘 아니게 베풀어라, 이런 것이거든요. 그러니 어찌 사리를 보고 찾겠습니까. 그리고 전전하고 끄달리겠습니까. 천리만리 사리가 있다 하더래도 그 사리의 근본을 내가 지니면 그것은 껍데기가 되죠.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지혜로운 생각으로써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질문자2: 감사합니다. 좋은 법 가르쳐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데인 것 마냥 물집이 잡혀 가지고 내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항상 친정어머님이 제 일을 다 해주셨습니다.

스님: 저 나무들을 보세요. 뿌리가 영양제를 흡수해서 위로 올려 보내니까 저렇게 푸르르게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인간도 근본의 뿌리가 있어요. 영원의 근본이 뿌리라면 바로 몸뚱이는 바로 저 나무들이에요. 그러니까 육신 속에 모든 세포 하나 하나에 생명의 의식들이 있거든요.

그러나 그것이 나와 둘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에 바로 그 업식은 무너집니다. 내가 나를 죽이는 법은 없습니다. 잘 들으셔야 해요. 그러기 때문에 내가 뿌리에서 주는 영양제를 먹고 살아야지 하고 거기다가 맡기고 뿌리의 주인공을 믿는다면, ‘너만이 나를 낫게 해서 끌고 다닐 수 있어’ 하고 맡겨 놓을 때에 진정코 그것은 한 순간에 해결이 날 수도 있는 겁니다.

질문자3: 연일 이 장마철에 하필이면 오늘 따라 날씨가 쾌청하고 또 제가 이렇게 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질문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삼법인(三法印) 중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이 있는데 제법에는 이름하여 붙일 것이 없다 하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법에 이름이 없다면 오늘 수행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라고 할 것이 없다면 업은 어디에 붙은 것입니까? 저의 좁은 공부에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스님: 이 얘길 항상 합니다만 여러분이 찰라찰라 아버지노릇 하고 엄마노릇 하고 자식노릇 하고 사위노릇 하고 이러죠? 그런데 그렇게 찰라찰라 생활하고 돌아가되 찰라찰라 그렇게 많은 것이 천차만별로 돌아가니까 어떤 걸 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으니 없다고 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초월해서 돌아가니까 ‘함이 없이 하는구나’ 이렇게 되죠. 아버지가 될 때에 나라고 할 건가, 남편이 됐을 때에 나라고 할 건가, 자식이 됐을 때 나라고 할 건가, 나라고 할 것이 없이 새가 띠지 않고 찰라찰라 나투며 화해서 돌아가니까 나라는 걸 이름해서 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 그래서 나는 공했노라, 나는 없노라, 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노라, 나는 한 일이 없노라, 나는 여러분한테 설법한 일이 하나도 없느니라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도 그저 바퀴 돌아가듯 남편노릇 했다, 자식노릇 했다, 아버지노릇 했다 하면서 돌아가는데 어떤 거 할 때에 남편이 했다고 그러고 어떤 거 할 때에 아들이 했다 하겠습니까. 그러니 모든 게 그렇게 돌아가니 내라는 게 너무 많아서 그냥 아버지노릇 하고 남편노릇 하고 자식노릇 하고 사위노릇 하고 친구노릇 하면서 여여하게 돌아가더라.

이러니 어찌 붙을 게 없겠으며, 어찌 붙을 게 있겠습니까. 만약에 둘 중에 붙을 게 없다는 것은 공해서 없다는 거를 알면 붙을 게 없을 것이고 그저 천차만별로 바깥으로 끄달리고 ‘내가 있다, 내가 한다, 내가 했다, 내가 줬다’ 하면서 나, 나, 나 이러고 돌아가면 그냥 매사에 걸려서 돌아가죠. 여러분이 음식을 먹고 소화를 잘 시켜서 금새 먹는 대로 소화가 잘 되면 그대로 여여한거고 어떠한 거든지 욕심 많이 내고 먹으면 체해서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대변이 제대로 나가지 않는다면 걸려서 죽습니다. 그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마음을 잘 써서 소화가 잘 되면 걸림 없이 돌아가고, 모든 걸 재료로 알고 실천을 해서 체험을 한다면 마음의 발전이 되고 지혜로운 마음이 생기고 과학적인 문제가 거론되고 창조력이 생기지마는 만약에 그런 마음이 없다면 내내 걸려서 무심의 50% 정신세계는 모르고 물질세계만 알면 걸려서 못 삽니다. 지금은 정신세계가 아니라면 안되는 법! 정신을 뺏기고 정신을 뺏어서 사는 시대가 아닙니까! 꼭 육으로 잡아먹어야 잡아먹히는 게 아니거든요. 정신을 뺏어 먹고사니까 정신을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정신공부를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김주일 기자 | jikim@buddhapia.com
2004-12-14 오후 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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