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 문화사>
11. 남북국시대 ③
전대에 꽃피기 시작한 불교문화가 더욱 발전하여 해인사 등 사찰이 창건되고 왕공귀족과 스님들이 당나라와 일본에 왕래하게 되었다. 이전부터의 차생활이 이들로 인해 한층 다양화되고 대중들에게까지 깊이 퍼졌다. 대렴이 차를 가져다 심었다는 것은 중국종의 차를 가져왔다는 것이지 차는 그 이전부터 생활 속에 있었다.
혜철 도의 혜소 체증 무염 스님 등이 돌아와 선종(禪宗) 체계가 크게 번창하고 차도 사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육우가 <다경>을 남기고 선다승 회해(懷海)가 ‘백장청규’를 만들어 후세 사찰의 규범이 되었다. 다세문제로 인해 감로의 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종이 불교 정풍운동을 일으켜 많은 사찰이 문을 닫았고 수십만의 승려가 환속했다. 그 중에서도 선종은 이어졌고 한유, 장우신, 이덕유, 노동, 백거이 등의 차인들이 출현했다. 일본도 최징, 공해, 자각 스님 등이 당에서 돌아와 사찰을 건립하고 차를 보급했다고 한다. 한중일 삼국이 서로 교류하여 차문화도 한층 발전한 시기다.
① 중국 사신으로 다녀 온 대렴이 차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 <삼국사기>
② 속성은 김씨. 837년에 정육, 허회 등과 당나라에서 수학 후 귀국해 가지산 보림사에 주석했다. 그의 창성비(국보 제264호)가 전한다.
③ 무염국사의 대낭혜선사비문에 차에 관한 말이 나온다. 무염국사는 당나라에서 불광여만(佛光如滿)과 마곡보철(麻谷寶徹)에게서 법인을 받고 돌아왔다.
④ 백장회회 선사가 만든 사원의 청규로, 후세의 거의 모든 사찰의 규범이 되었다. 그리고 사원에 차를 심게하는 등 ‘다공삼보(茶供三寶)’를 주장했다.
⑤ 당대 문인으로 대종 때 재상이 되었다. 차를 좋아해서 해산천의 물을 길어 차를 달인 이야기는 유명하다.
⑥ 왕애(王涯)는 여섯 임금을 모신 재상으로 각다법(榷茶法, 차에 부과하는 세법)을 시행하다가 감로의 변(과세에 항거한 민중 봉기)로 죽었다.
⑦ 대종의 정풍운동으로 사찰 4만여 곳이 문을 닫았고 26만의 스님이 환속했으나 선종에서는 백장청규의 시행으로 크게 피해를 입지 않았다.
⑧ 백거이는 당대의 시인이고 차인이다. 선교(禪敎)에 가깝게 되어 선승들과 교유해 깊은 경지에 이르렀고, 차에 관한 수십 편의 시를 남겼다. 유명한 비파행에도 차 얘기가 나온다.
⑨ 최징은 천태종을 일본에 펼쳤고 차를 심었다고는 하나 확실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차아 천황과의 차 이야기)
⑩ 공해는 최징과 입당하여 공부하고 귀국할 때 중국의 차씨와 다기, 다서 등을 가지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