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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7일 보조사상연구원(원장 법산) 정기학술대회에서 인경 스님, 김방룡 박사 등이 제기한 “한국의 간화선은 돈오점수의 체계며 보조지눌을 시원으로 하는 간화선풍은 여말삼사에까지 이어진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새로운 논문이 발표됐다.
신규탁 교수(연세대 철학과)와 윤기엽 박사는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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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교수팀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그에 따른 불교계의 변화를 주목, 선종의 부흥과 신앙결사운동으로 특징 지워지는 무인정권기의 불교계가 원 간섭기에 겪은 변화와 그것이 선종에 미친 영향을 조망했다. 원 간섭기의 불교에 대한 고찰은 잘 다뤄지지 않던 주제다.
다음은 발표의 요지.
보조 스님(1158~1210)이 활동하던 무신정권기(1170~1270)가 끝나고 원의 간섭이 본격화된 원감충지(圓鑑沖止) 스님 때에 이르면 수선사는 자발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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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수선사를 일으켜 세운 이는 제 10세 만항 스님. 만항 스님은 원나라 임제종 양기파의 선승 몽산덕이와의 교류를 통해 임제선을 들여오면서 국내의 수행풍토는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수선사뿐 아니라 당대의 선종계를 대표하는 가지산문 또한 몽산 스님과 교류, 임제선이 적극 수용된 것이다.
보조지눌 스님이 화두참구를 강조하면서도 규봉종밀류의 선교일치 사상, 지(知)를 중시하는 하택종 사상, 이통현 화엄사상의 풍모가 공존하는 반면, 원간섭기를 거치면서는 고려 선풍에서 교학적 요소가 점점 삭제되고 화두 참구에만 몰입하는 몽산덕이 선풍이 풍미하게 된다.
몽산덕이 선풍은 <금강경> <화엄경>수지독송, 화두참구, 보현행원, 지계와 참회, 무심수행, 돈오, 선지식의 점검, 견성성불, 당사자의 주체적인 체험 등을 내용으로 하는데, 이는 여말 삼사에게서도 나타난다.
규봉종밀의 저서를 읽다가 보조 스님의 저서를 읽고, 여말 삼사의 저서를 읽어보면 그 차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종밀 스님과 보조 스님은 통하지만, 종밀 스님과 여말 삼사는 통하지 않는다. 보조선과 몽산선, 보조선과 여말삼사의 임제선 사이에는 각각 단절이 있다.
따라서 여말 삼사의 뿌리를 보조 스님에서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보조종조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같은 신 교수팀의 주장에 대해 논평자로 나선 황인규 박사(동국대 강사)는 “수선사와 선원사가 원 황실의 원찰이 됐다고 보는 것은 무리며, 보조 선풍은 단절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보조 스님과 혜심스님의 수선사풍이 후대 몽산·고봉 스님의 사상과 결합, 여말 삼사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는 황 박사는 1)충지가 <규봉암갑술년동안거원문(圭峰庵甲戌年冬安居願文)>에서 지눌혜심몽여가 지눌의 선풍을 이었음을 밝히고 있고, 충지 비문에는 ‘목우자의 정통을 이어받아 제방의 총림으로 두루 다녔다’ ‘제자는 조계의 적자요 품일(品日)의 후손이다’고 돼 있는 점 2)일연이 지눌을 원사하고, 수선사3세인 몽여와 교류하는 등 가지산문계와 수선사계의 교류가 활발했으며 일연의 제자 혼구의 법이 충탄(沖坦)으로, 다시 태고보우로 이어진 흔적이 보인다는 점 등을 제시하며 “인적으로 이어져 있는데 선맥이 단절될 수 있는 것인가”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윤기엽 박사는 “수선사가 원 황제의 원찰 기능을 했다는 증거는 충분하다”고 반박했다. 또 보조선풍이 연속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인적으로 이어진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나 사상적으로 그 같은 증거가 뒷받침 되지 않는다”며 “충지가 정혜쌍수를 언급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보조와는 상치되는 미타신앙을 수용했고, 수선사 8세인 자각국사는 원나라 사람이라는 설까지도 제기되는 실정이다”고 반론을 폈다.
또 신규탁 교수는 “선종은 일관되이 하택종을 비판하는데, 유독 보조 스님만 하택종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보조 스님의 저술은 화두를 다양하게 거론하며 문학적 수사를 구사하며 지도하는 임제선풍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반박에 대해 김방룡 박사는 “보조 스님 당대 상당법어가 남아있지 않아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