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7.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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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이 만난 ‘쑹싼 쓰님’ 이야기
아래의 글은 도올 김용옥 씨가 숭산 스님과 처음 만난 감회를 술회한 것입니다.


숭산 스님
최근세 조선 선종(禪宗)의 종맥(宗脈)을 따지자면 경허ㆍ만공의 거맥(巨脈)을 빼놓을 수 없다. 20세기에 우리 귀에 익숙한 고승 대부분이 경허ㆍ만공맥의 문하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 만공 문하 고봉의 수제자로 숭산 행원이라는 인물이 있다. 내가 다녔던 한국신학대학 뒤쪽 물 건너 수유리 우이 기슭에 있는 화계사의 큰스님으로서 참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숭산 스님을 하버드 다닐 때 케임브리지 어느 허름한 미국집 안방에서 만났다. 내가 숭산 스님을 만나 뵈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분은 그리 널리 알려진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의 명성은 뉴잉글랜드 지역, 특히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권 내에서는 좀 시끌시끌할 정도였다. 내가 숭산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들 대강(代講)을 하고 있을 때 학생 중에 한국불교 전공을 지망하는 참하고 예쁘장한 미국 여학생으로부터였다. 그 학생 이름은 베키였는데, 하버드대학 학부를 졸업할 때 하버드대학 전체 수석을 했으니까 무지하게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다.

그런데 베키는 당시 한국 불교사를 가르치고 있던 나를 만날 때마다 ‘쑹싼 쓰님’ 운운하는 것이었다. 베키의 ‘쑹싼 쓰님’에 대한 존경을 절대적이었다.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존경하는 학자인 당신이야말로 꼭 한 번 ‘쑹싼 쓰님’을 만나보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도올 김용옥
나는 사실,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 ‘쑹싼 쓰님’이란 분이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데 딱 정해진 날만 케임브리지 젠센터(하버드대와 MIT 사이에 숭산 스님이 세운 절)에 오셔서 달마토크(Dharma talk, 법문을 이렇게 영역)를 하시니까 그때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키 말에 따르면 ‘쑹싼 쓰님’ 달마토크 때는 하버드 주변 학생 수백 명이 줄줄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실상 속마음을 고백하자면 나는 ‘쑹싼 쓰님’을 순 사기꾼 땡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베키를 쳐다보건대 저 계집아이를 저토록 미치게 만든 놈, 즉 저 계집아이가 숭산이라는 개인에게 저토록 절대적 신앙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사교적(邪敎的) 권위의식을 좋아하는 절대론자일 것이고 따라서 해탈한 인간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자유로울지 모르겠지만 타인에게 절대적 복속과 부자유를 안겨주는 놈은 분명 사기꾼일 것이다. 또 숭산이 다 늙어서 미국에 건너온 사람인데 무슨 영어를 할 것이냐, 기껏 지껄여봐야 콩글리시 몇 마디일 텐데 영어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무적 김용옥도 이 하버드에 와선 벌벌 기고 있는데 지가 무슨 달마토크냐 달마토크는. 하버드 양코배기 학ㆍ박사들을 놓고 달마토크를 한다니 아마도 그놈은 분명 뭔가 언어 외적 사술(邪術)을 부리는 어떤 사기성이 농후한 인물일 것이다. 그런데 베키의 간청에 못 이겨 캠브리지 젠센터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숭산의 달마토크를 듣는 순간, 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나의 식(識)의 작용 속에서 집적해 왔던 객기(客氣)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 인간이 수도를 통해 쌓아올린 경지는 말과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몸과 몸으로 전달될 뿐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그가 해탈인임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에는 위압적인 석굴암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땅꼬마’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해탈의 최상의 경지는 바로 어린애 마음이요, 어린애 얼굴이다. 동안(童顔)의 밝은 미소, 그 이상의 해탈, 그 이상의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숭산은 거부는 아니라 해도 결코 작은 덩치도 아니었다. 당시 오순 중반에 접어든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 얼굴 그대로였다. 그의 달마토크는 정말 가관이었다. 방망이를 하나 들고 앉아서 가끔 톡톡 치며 내뱉는 꼬부랑 혀끝에 매달리는 말들은 주어ㆍ동사ㆍ주부ㆍ술부가 마구 도치되는가 하면 형용사ㆍ명사 구분이 없고 전치사란 전치사는 다 빼먹는 정말 희한한 콩글리시였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영어의 도사인 이 도올이 앉아 들으면서 그 콩글리시가 너무 재미있어 딴전 피울 새 없이 빨려들어 갔던 것이다. 그의 콩글리시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언어의 파워를 과시하고 있었다. 주부ㆍ술부가 제대로 틀어박힌 유려한 접속사로 연결되는 어떠한 언어 형태도 모방할 수 없는 원초적인 마력을 발하고 있었다.
남동우 기자 | dwnam@buddhapia.com
2004-12-07 오후 8: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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