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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 오갈 데 없는 치매 환자들의 보금자리인 김해 효능원(원장 김정자)을 찾았을 때 한 할머니가 반색하며 건넨 인사였다. 일순 당황했지만 김정자(53. 법명 연화정) 원장의 눈짓에 “네, 할머니! 꼭 집에 오세요.”라고 대답하며 손을 잡아 드렸다.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 치매를 앓으며 가족과 사회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인 효능원의 일상은 늘 이런 풍경이다.
32명의 치매와 중증 중풍 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효능원에서는 벌써 9년째 자신을 보살피고 있는 김 원장을 향해서도 욕을 퍼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처음 만난 듯 ‘누구냐?’고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많다. 그 물음은 ‘내가 누구냐?’는 절박한 물음인지도 모르지만 당하는 사람에겐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밥을 안 줘 배가 고프다’거나 ‘김 원장이 내 돈을 가져갔다’는 말로 봉사자들이 김 원장을 오해하게 만드는 경우도 허다하다. 김 원장은 그런 하루하루를 9년째 이어오고 있는 효능원의 안주인이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는 김 원장과 치매 어르신과의 인연은 1995년으로 거슬러간다. 김해 성모병원 간호과장으로 근무할 당시, 장기 입원으로 가족들의 연락은 끊긴 치매 할머니의 퇴원 결정이 내려졌다. 중증이라 보낼 시설조차 마땅찮아 행려병자로 보호를 받게 하기 위해 구청 앞에 데려다 놓기로 했다. 동지 하루 전이라 몹시 추웠던 그 날, ‘내 엄마라면’하는 생각에, 구청 앞을 서성이던 할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온 것이 시작이었다.
“치매 할머니 한 분 모시는 것이 뭐 어렵겠나 했는데 소문이 나자, 집 앞에 데려다 놓고 가 버리고 나중엔 아파트가 비좁아 도저히 모실 수 없을 정도가 돼 버렸어요.”
따로 아파트 하나를 더 빌려 모시다가 결국 2002년 집을 짓기 시작했다. 퇴직금과 저축했던 돈을 모두 투자해 복지 시설로 인가 받을 요량으로 효능원을 지었지만 처음엔 긍정적이던 김해시가 예산부족을 이유로 인가를 해주지 않았다. 보조금 한 푼 없이 32명으로 늘어난 대식구의 생계를 꾸려야 하는 가장이 돼 버린 것이다. 병원 치료가 잦은 식구들의 병원비, 치료비는 물론 하루에도 수십 개씩 소비되는 기저귀를 충당하는 것만도 쉽지 않았다. 남편의 연금과 김 원장이 수술실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과 강의료 등을 고스란히 쏟아 부어야 했다. 남편 류양렬(63)씨는 효능원의 울타리이자 일꾼이 되었고 새벽 2-3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드는 것은 다반사였다.
“어떤 때는 오늘 아침쌀 씻으면서 내일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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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는 살아온 과거를 여실히 드러내는 삶의 거울 같아 놀랄 때가 많다”는 김원장은 선업을 쌓아온 사람은 치매 증상도 선하다고 귀띔 했다. 치매를 통해 김 원장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연기(緣起) 속에 존재함을 배웠고 지은대로 받는다는 인과의 도리도 터득했다. 부모처럼, 때론 자식처럼 보살피던 어르신들을 169분이나 떠나보내며 무상의 도리는 절로 익혔다. 치매와 중풍이라는 병으로 가족들도 어쩔 수 없게 된 어르신들과 함께 하는 나날이 정진과 깨달음의 시간으로 화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대가는 컸다. 극심한 피로로 파김치가 된 몸엔 암이라는 병이 찾아왔고 지금 김 원장은 항암치료 중이다. 다행히 병원에서도 놀랄 정도로 경과가 좋지만 항암 치료 휴유증으로 머리카락이 빠져 가발을 쓰고 있지만 어르신들에겐 아프다는 내색조차 통하지 않는다. 또한 정부 인가 시설이 되려면 내년 7월까지 시설을 보완해야 한다. 그 비용 3억 8천 중 국가보조금 1억 외에 2억 8천을 더 마련해야 하는 숙제도 남았다.
“다행히 암 보험금으로 1억원이 나왔어요. 부처님이 도우신 거죠. 시설 보완해서 인가를 받으면 더 많은 분들을 좀 더 편안하게 모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부처님이 계시니 되겠지요.” 암조차 감사하다는 김 원장을 가로막을 장벽은 없어 보였다. 여러 어려움 앞에 중도 포기도 생각했지만 “할머니들과의 약속이 있는데 하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할머니들과 함께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아들의 말에 힘을 얻고 마음을 다잡았다. 의예과를 다니고 있는 아들 경률이가 김 원장의 뒤를 잇겠다고 하니 한시름 놓았다.
사비를 털어 가족들도 외면한 치매 환자를 보살펴온 김 원장은 부모를 버리는 자식이라고 비난하기에 앞서 국가가 치매 문제를 싸안아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안고 가야 할 모두의 동업(同業)이기 때문이다.
김 원장의 마지막 원은 효능원이 불도량이 되는 것이다. 불법을 배우고 또 배운 것을 어르신들과 나누며 행하는 생활 속의 수행처가 되길 발원하고 있다. “젊어서는 절에서 봉사 열심히 해도 늙어 병들면 갈 곳이 없는 게 불교의 현실”이라고 지적한 김 원장은 스님 두 분도 이곳에서 돌아가셨는데 불교가 많이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도 좋지만 어려운 곳을 찾아 보시하고 봉사하는 게 진정한 보살행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 원장을 향해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 물음에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가진 걸 나눠보세요. 줬을 때 상대가 즐거워하고 기뻐할 때의 그 기분은 해 본 사람은 다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