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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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송이 꽃’ 피우려 1초도 아꼈던 큰 스승
숭산당 행원 대종사 행장
2001년 무상사 동안거 결제법회에서 스님이 제자들에게 큰 원력을 세우고 열심히 수행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모습.
“세상에는 뛰어난 인물들도 참 많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숭산 스님처럼 참 자신을 깨닫게 도와주는 이들이야말로 인간 잠재능력의 최선을 이끌어낸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제게도 그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도올 김용옥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중)

세계 4대 생불로 추앙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캄보디아 종정 고사난다, 베트남 출신 프랑스 플럼빌리지 틱낫한 스님과 함께 ‘살아있는 4대 생불(生佛)’로 추앙받았던 숭산(崇山)당 행원(行願) 대종사는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했다.

일제 강점기인 44년, 스님은 지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감옥에서 나온 후 만주국경을 넘어 독립군에 합세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6년 동국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불교에 뜻을 두게 된다.
그 때 한 친구가 스님에게 〈금강경〉을 건넸다.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이 모양이 아님을 알면 그가 곧 부처이니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想非相 卽見如來)”

〈금강경〉의 이 구절이 스님의 마음에 와 닿았다.
“아아, 바로 여기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동양철학이 일치하는 곳이구나. 불교의 골수가 여기에 있구나.” 스님은 47년 공주 마곡사로 출가했다.

스님은 출가한 지 열흘 만에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를 먹으며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했다.

기도 100일 째,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 소리와 자기 음성도 들을 수 있었다.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같은 체험을 한 뒤 스님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

원각산하비금로(圓覺山下非今路)
배낭행객비고인(背囊行客非古人)
탁탁이성관고금(濯濯履聲貫古今)
가가오성비상수(可可烏聲飛上樹)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배낭 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고봉 스님에게 인가 받아
춘성·금봉·금오 스님께 인가를 받은 숭산 스님은 고봉 스님을 찾았다.

고봉 스님 앞에 절을 올린 후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三世諸佛)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
원적한 석주 스님(사진 오른쪽)과 법담을 나누고 있는 숭산 스님.
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고봉 스님이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하고 답했다.

숭산 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 주십시오.”

이 말에 고봉 스님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 스님의 손을 치우고 장판 위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이게 스님의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 스님이 빙긋이 웃었다.
이렇게 몇 차례 문답이 오고간 뒤, 고봉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숭산 스님을 얼싸안고 말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49년 1월 25일, 스님은 고봉 스님에게 ‘숭산’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나이 22살 때였다.

‘일체 법은 나지 않고 일체 법은 멸하지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이것을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한다.’(고봉 스님에게 받은 전법게)


32개국 120여곳 선원 개원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부처님 법을 전했던 것처럼 한국에서 전 세계로 한국선불교를 전파한 ‘한국의 달마’ 숭산 스님. 1966년 일본 홍법원 개원을 시작으로 35년 만에 전 세계 32개국에 120여개의 홍법원을 개설하고 5만여 눈푸른의 납자와 제자들을 두었다.

62년 조계종
같은 ‘4대 생불’로 추앙 받았던 고사난다 스님(사진 오른쪽)과 함께 한 숭산 스님.
비상종회의장과 통합종단 비상종회 초대 의장을 역임한 뒤, 스님이 조계종 총무부장 소임을 맡고 있을 때였다. 동국대 기숙사를 짓기 위해 공사를 하던 중 지하에서 일본인 유골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스님은 유골을 화계사에 안치했고 이 소식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일본 불교계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부처님 자비정신을 세계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한 스님은 도쿄에 홍법원을 개설한 뒤 69년 홍콩, 72년 미국에 홍법원을 열면서 본격적으로 해외포교에 뛰어들었다.

숭산 스님은 당시 한국불교 최초로 폴란드를 비롯해, 중국, 구 소련 등 공산권에서 법문을 했다. 아프리카권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포교 활동을 했다. 이처럼 스님의 해외포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했기 때문’이다.

숭산 스님은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겁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그 나라의 법식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는 특별한 통제와 간섭이 필요 없어요. 목탁을 치고 설법 준비를 하기도 전에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기다립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경우는 반대예요. 시간이 다 돼야 어슬렁어슬렁 모입니다. 그게 바로 그 나라 사람들의 국민성이라는 겁니다. 이렇듯 나라마다는 각기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존중해야만 포교가 가능해요”라고 생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다.

스님의 이 같은 지론에는 원칙이 있었다. 스님은 “우리 것 중에서 좋은 것은 반드시 지키고 남의 것 중에서도 좋은 것은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동양의 정신과 소중한 전통을 버리고 서구를 따르는 것은 인류 모두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강조했다.


생활 자체가 가르침
무엇보다 스님의 가르침이 전 세계에 펴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스님 생활 자체가 그대로 가르침이며 귀감이 됐기 때문이다.

오래 전 스님이 제자들과 멕시코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곳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제자 대봉 스님(무상사 조실)이 숙소를 찾아왔다. 그때 스님은 잠에서 깨어나 속옷 차림으로 대봉 스님을 반갑게 맞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또 다른 스님이 숭산 스님을 찾아왔다. 스님은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반갑게 맞았다. 잠시 후 한국인 제자 스님이 숭산 스님을 찾아왔다. 숭산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고리와 마고자를 차려입었다.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저마다 어떻게 다른지 헤아리는 스님은, 찾아오는 제자들에 따라 옷 입는 그 한 가지에도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가르침의 핵심 ‘오직 모를 뿐’
스님은 평소 ‘앎’을 가장 경계했다. 앎이란 마음이 제멋대로 이해하고 판단하며 분별해 만든 것이며, 우리가 살아가는데 혼란을 조성하고, 그 여파로 우리 스스로와 남들의 고통까지 낳는다는 것이다.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이란 말은 숭산 스님 가르침의 핵심이자 바로 ‘선의 나침반’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이른 바 ‘숭산 가풍’을 낳았다. 숭산 가풍은 남녀노소나 승속을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수행만
숭산 스님이 구 소련 대통령인 고르바쵸프와 세계평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을 강조할 뿐이다. 합리와 이성으로 길들여진 서양 사람들에게 스님은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그들에게 자신의 머리 속에 가득 채워진 지식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들은 충격을 받는 한편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스님은 ‘오직 모를 뿐’인 그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이러한 대화의 바탕을 미국식으로 ‘공안 인터뷰’라고 한다. 이 공안 인터뷰의 특징은 스승과 제자가 마주한 그 순간의 상황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곧 진리임을 스스로 체득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世界一花’에 일평생 바쳐
스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전 세계 5만 여명의 제자들을 배출했다.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 현각 스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전통 한국사찰 ‘태고사’를 건립중인 무량 스님, 화계사 국제선원장으로 있으며 숭산 스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무심 스님,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하다 숭산 스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한 대봉 스님, 프라비던스 선원 소식지인 ‘프라이머리 포인트’ 편집자 엘렌 사이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스님은 저서 〈부처님께 재를 털면〉 〈선의 나침반〉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천강에 비친 달〉 등을 통해서도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세상은 하나의 아름다운 꽃과 같다는 뜻인 ‘세계일화(世界一花)’.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아무런 말씀 없이 꽃 한 송이를 드셨고, 해방 후 만공 스님이 무궁화 꽃으로 세계일화라고 쓰기도 했다. 이미 세상을 내다보고 세계일화가 돼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스님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1년에 지구 세 바퀴를 돈 적도 있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네. 동서남북 지구촌을 돌고 돌아 35년 올바른 생활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네. 허무한 세상을 실체의 세계로, 실체의 세계를 실상의 세계로, 실상의 세계를 실용의 세계로 세세상행 대보살도를 성취하려고 일분일초도 쉴 사이 없었네.”(해외포교 35주년 기념법어 중)


“만고광명이요, 청산유수니라”

‘한국불교 해외포교의 역사’(前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 스님) ‘세계와 한국에서 제1조와 제28조 여래의 정법을 펴는 불가결한 정신적 기둥’(고은 시인)이라 평가받았던 숭산 스님. 85년 세계평화문화인대회(WUM)에서 세계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스님은 별도의 임종게를 남기지 않았다.
원적을 앞두고 제자들이 이렇게 물었다.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제자들의 물음에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답했다.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만고광명(萬古光明)이요, 청산유수(靑山流水)니라.”
스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열반에 들었다.
남동우 기자 | dwnam@buddhapia.com
2004-12-04 오전 10: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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