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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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효과'-자학의 영화 속에서 불교를 찾는다
맨땅에 헤딩하기: 집요한 자학의 슈퍼스타들

"나는 누구일까?"
근래 이런 물음을 묻는 영화들이 크게 늘고 있다. 최근에 개봉한 <나비효과>도 그런 영화들 가운데 하나이다. 주인공
애쉬튼 커처 주연의 <나비효과>
에반은 해답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찾으려 한다. 현재의 나는 과거로부터의 연장이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을 바꿀 수 있다면, 현재의 나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바꾸고 싶은 것은 불안한 현실이다. 불행한 ‘나’이다. 누구라도 한번 쯤은 상상해 보았을 법한 설정이다. 가지 않은 길도 있고, 깨고 싶지 않은 꿈도 있다.

과거가 바뀌면 현재도 바뀐다. 과거가 있기 때문에 현재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바뀜을 에반의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과거의 조건과 현재의 결과. 이 영화는 그 사이의 관계를 ‘나비효과’로 설명하려 한다. 북경에서 나비가 날개 짓을 한번 하면, 그 결과로 뉴욕에서 허리케인이 불 수도 있다. 아주 작은 원인이 예측할 수 없는 큰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비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일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추정할 수도 조절할 수도 없다. 영화 나비효과는 시점을 현재에서 과거로 옮겨 놓았다. 게다가 나비효과는 기상을 예측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현상일 뿐이다. 기상을 예측하는 일과 ‘나’를 예측하는 일은 아주 다른 일이다.

불교도 물론 ‘나’에 대하여 묻는다. 에반과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비효과에 비견할 표현으로 ‘이숙(異熟)’이라는 표현이 있다. ‘다르게 익는다’는 말이겠다. 원인과 결과의 성질이 다르다는 말이다. 과거에 내가 지은 행위에는 선한 일도 있고, 악한 일도 있다. 선한 행위는 즐거움의 과보를 낳고, 악한 행위는 고통의 과보를 낳는다. 하지만, 선한 행위와 즐거움의 과보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생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고, 그 사이에 변화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행위는 선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결과인 즐거움의 과보는 선하다고 하지 않는다. <금강경>에는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라는 말도 있다. 여기서 유래한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까?’라는 공안도 있다. 에반의 상황에 견주어 볼 만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메멘토>라는 영화가 있었다. 시간과 기억 사이에서 ‘나’를 묻는다는 점에서 나비효과의 선배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간과 기억사이의 "나"를 묻는 영화 <메멘토>
이 두 영화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집착이다. 물러서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간은 반복된다. 시간이 반복된다는 말은, 같은 문제에 반복해서 집착한다는 뜻이 된다.

“저는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으나, 보살이 어떻게 보살의 행을 배우며, 보살의 도를 닦는지 모릅니다. 성자께서 잘 가르쳐 주신다 들었습니다. 저를 위해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동자가 하는 말이다. 그는 선지식을 새로 만날 때마다 똑 같은 말을 똑 같이 50차례나 반복한다. 영화로 치자면 매우 긴 영화라고 하겠다. 그래서 지루한 면도 있다. 영화에서는 이런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극적인 반전들을 집어 넣는다. 파괴적인 이미지들을 섞어서 생각을 흔들고, 흥미를 지속시키려고 한다. 선재동자의 구법기에도 비슷한 효과들이 담겨 있다. 물을 때마다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무엇인가를 배우지만, 그래도 물음은 바뀌지 않는다. 보살행과 보살도. 이쯤되면 물음의 내용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똑 같은 물음을 반복할 수 있는 미련함이다.

<나비효과>의 에반이나 <메멘토>의 레너드는 시간과 기억에 도전한다. 도전을 통해 찾으려는 것은 물론 나 자신이다. 그들의 도전은 치열하다. 어려움이 커질수록 꺾이지 않는 의지가 돋보인다. 나를 찾는 도전. 그런 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선재동자의 구법기를 닮았다. 물론 집착과 반복으로 치자면 선재동자를 따를 수 없다.

영화 한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맨 땅에 자기를 짓이기는 자학성 가득한 영화 <파이트클럽>
어차피 그들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맨 땅에 헤딩하기다. 풀 수 없는 문제를 문제 삼는 일. 미련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들이 노리는 것은 문제제기도 아니고, 해답은 더더욱 아니다. 영화는 다만, 맨 땅에 헤딩하는 일을 보여 줄 뿐이다. 그 장면들을 보여 줄 뿐이다.

생각해 보라. 생 머리를 맨 땅에 짓이기는 장면을. 누가 시켜서도 아니다. 자기 몸을 스스로 학대하는 일이다. <파이트 클럽(Fight Club 1999)> 이라는 영화가 그렇다. 자기 몸을 스스로 짓이긴다. 사람들은 자기 몸을 그렇게 스스로 짓이기는 일에 열광한다. 자기 살을 물어 뜯고, 거기에 청산가리를 들이 붓는 주인공,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 고통을 웃으며 받아들이는 용기에 감동한다. 자학의 수퍼스타들이다. 그들 수퍼스타들은 자신들이 가진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맨땅을 향해 머리로 달려 드는 사람들이다.


"여기 이 자리에서 내 몸이 메말라 가죽과 뼈와 살이 다 없어져도 좋다. 저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이 자리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겠다."

파키스탄에 남아있다는 싯다르타의
싯다르타의 "고행상"
고행상이다. 자학으로 치자면 저만한 자학도 없다. 집착으로 치거나 미련함으로 따져도 비교할 거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서 감동을 느낀다. 이런 극단적인 조상을 만든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싯다르타는 자학의 수퍼스타이다.
그들은 모두 ‘나는 누구일까?’(구체적인 물음들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라는 맨땅을 들이 받는다. 막막해 보이는 장벽을 향해, 미련하게 돌진한다. 불교에서는 싯다르타의 저 같은 미련한 자학성을 ‘위법망구(爲法忘軀)’라고 부른다. ‘법을 구하기 위해 몸을 버린다’는 뜻이다. 손가락을 태우고, 팔뚝을 자르고, 맹수를 향해 몸을 던지고…. 이 같은 집요한 자학성은 구법의 모델이 되었다.

맨땅에 머리치기식 영화들의 원조는 물론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이다. 이 영화의 원작자, 필립 딕이다. 그는 집요하게 인간의 문제, 자아의 문제에 집착했던 사람이었다. 싸구려 SF 작가로 어렵게 살던 그는, 블레이드 러너가 개봉되기 직전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역시 어둡고 처절했던 그 영화는 크게 성공을
맨 땅에 머리치기식 영화의 원조 <블래이드 러너>
거두지는 못했지만, DVD 시장을 통해 컬트문화로 자리를 잡았고, 여기서부터 맨땅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1982년, <블레이드 러너> 이후로, 1990년의 <토탈 리콜(Total Recall)>, 1995년의 <스크리머스>, 2002년의 <임포스터(Impostor)>와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3년에는 <페이첵(Paycheck)> 등이 차례로 영화화되었다. 특히 토탈 리콜은 필립 딕이 가진 대중적인 잠재력을 확인한 작품이었다. 이후로 필립 딕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었다. 현재 영화화가 진행되고 있는 작품들만 하더라도, 디즈니 영화사가 어린이용으로 제작하고 있는 "The King of the Elves", 미라맥스의 "The Short, Happy Life of the Brown Oxford", 워너 브러더즈의 “A Scanner Darkly” 등이 있고, 원작 소설이나 오리지널 스크립트들도 모두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

“우리는 미디어나, 정부, 거대기업, 종교집단, 정치집단들에 의해 조작된 실재들이 만들어지는 사회 안에 살고 있다. 나는 내 글을 통해, ‘무엇이 실재인가’를 묻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쉴 틈도 없이 아주 섬세한 사람들이 아주 섬세한 전자 메커니즘을 사용하여 만들어 내는 의사실재 (pseudorealities)들의 폭격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동기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들의 권력을 의심한다. 그건 놀라운 권력이다. 전체 우주, 정신의 우주를 창조해낸다. 난 알아야만 한다. 나도 같은 짓을 하고 있다. “

그는 이처럼 소설 밖에서도 맨땅에 헤딩을 하면 살았던, 자학의 수퍼스타였다. 그의 삶을 되돌아 보자면, 그는 물론 수퍼스타는 아니었다. 그는 마약과 백일몽과 환상에 쌓여, 자신과 사회, 우주와 정신을 향해 머리를 치박던 괴상하고 미련한 (때로는 미쳐 보이던)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의 삶도, 그의 작품도 영웅적이지도 않았고,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영화 <스크리머스>에서 주인공(…)은 외계에서 온 로보트 폭탄으로 의심을 받는다. 그는 처음에는 바로 그 외계인에 대항하여 싸우던 인간 전사였다. 마지막 순간, 그는 비로서 자신이 로보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는다. 바로 그 순간 대폭발을 일으킨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 자체가 폭발을 일으키는 방아쇠였다는 설정이다. 그의 글, 그의 글에 바탕을 둔 영화들에는 모두 그런 의심의 대폭발이 들어 있다. 그런 폭발을 통해, 제 코를 쥐어 박던 미련하고 괴상한 사람들은 수퍼스타로 재탄생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된다. 폭력과 폭발, 폭발을 통한 반전 너머에 절대로 풀릴 수 없는 맨 땅이 존재한다.

한국에는 간단히 ‘이뭣꼬’라는 화두가 있다. 이런 화두를 가지고 은산철벽에 박치기를 하다가, 백척간두에서 한걸음을 더 나아가라고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물론 맨 땅일 터이다. 맨땅에서 쓰러지면, 다시 맨 땅을 딛고 일어나라고 한다.

맨땅에 헤딩하는 자학의 수퍼스타들이 각광을 받은 시대가 왔다. 이들은 의심을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맞서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수퍼맨이 아니다. 특별히 아름답지도 현명하지도 않다. (물론 이들이 헐리우드로 들어 오면, 아놀드 슈왈제네거나 탐 크루즈 처럼 멋과 힘을 갖기도 한다.) 대개는 주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도 대단한 것들도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을 법한 단순 명백한 의문들일 뿐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재미있으면 그만이라는 뜻일 것이다. 지나친 문제의식이나 과장된 해석은 오히려 영화의 재미를 깎아 내릴 뿐이라는 투정들도 있다.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매트릭스>
<매트릭스> 연작에 대해서도 그런 의견들이 많았고, 최근에 국내에도 상영되었던, <공각기동대>의 후속편 이노센스의 경우에도 그랬다. 일리가 있는 비판들이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의 재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자학만이 있다면, 변태 영화가 되고 만다. 폭력만이 있다면 전쟁영화가 되고 만다. 물론 그런 영화들이 재미없다는 말은 아니다. 앞에 언급했던 영화들에는 플러스 알파가 있다. 플러스 알파로부터 오는 재미가 있다. 맨땅에 대한 의심이고, 맨땅을 향해 질주하는 스타들에 대한 감동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플러스 알파는 예전의 ‘재미있는’ 영화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새로운 재미는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재미가 아니다.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사들이 다투어 이 같은 영화들을 양산해 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 해도,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들도, 이미지를 읽는 사람들도 맨땅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필립 딕의 대중적 잠재력을 확인한 작품 <토탈리콜>
그것은 어차피 맨땅일 터이다. 그들은 말라 비틀어지고 피를 흘리는 자학의 현장을 볼 뿐이다. 거기에 메시지가 있다.

필립 딕의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나, 해답을 제시하려는 노력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만이 더 선명해지고, 선명해진 문제만이 남을 뿐이다.
예를 들어, 블레이드 러너에서 데커드는 인간이 아닌 레플리컨트를 잡으러 다니면서 인간성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은 점점 커지고, 관점은 점차 인간보다는 레플리컨트 쪽으로 기운다. 마지막엔 데커드 자신이 레플리컨트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만이 남는다. 의심을 하는 자가 의심을 받는 자로 뒤집히고 나서는, 의심 자체가 의심스러워질 뿐이다. 이런 것이 맨땅의 정체이다.
오윤희 편집위원 | yhoh@buddhapia.com
2004-12-01 오후 3:08:00
 
한마디
amijinok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생각케 하니 영화읽기의 새로운 즐거움을 주시는군요. 나비효과 지금 상영중인데 보러가야겠어요.
(2004-12-06 오후 6:22:54)
20
khpark2 <매트릭스와 선>과는 또 다른 느낌의 글, 잘 읽었습니다. TV화면처럼 정면에서만 보던 사물을 비틀고, 구겨보고, 사방팔방에서 들여다보기…. 이 글을 읽으니, 수퍼맨처럼 어딘가 허공에 뚫려있을 탈출구를 향해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2004-12-02 오후 8: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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