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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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포교 선구자 숭산 행원 대종사 행장- 3신

외국인 제자들과 함께 한 숭산 스님.
숭산(崇山)당 행원(行願) 대종사는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했다.

일제 강점기인 1944년 스님은 지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그로 인해 몇 달 뒤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 수감돼 좁은 감방에서 갖은 곤욕을 치렀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돈 500원을 훔쳐 경계가 삼엄한 만주국경을 넘어 독립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동국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당시는 남한의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불안했던 때였다.


1. 출가

결국 숭산 스님은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스님은 머리를 깎고 절대적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처음 세 달 동안 스님은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같은 유교경전을 공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때 작은 암자의 스님인 친구 중 한 사람이 숭산 스님에게 금강경을 줬다.

이것이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였다.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이 모양이 아님을 알면 그가 곧 부처이니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想非相 卽見如來)”

금강경의 이 구절이 스님의 마음에 와 닿았다.

“아아, 바로 여기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동양철학이 일치하는 곳이구나. 불교의 골수가 여기에 있구나.”

스님은 이 경전을 읽고 또 읽었다.

그때 어떤 스님이 산을 다니다가 절에 들렀다.

“학생, 무엇을 읽고 있나?”
“금강경을 읽고 있습니다.”

“불경은 왜 읽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야.”
“예?”

“불교는 잊어버리는 것일세. 학생도 아는 것이 너무 많구먼. 불교는 이제까지 배운 걸 다 잊어버리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듣고 보니, 그 말에 뜻이 있었다.

“아! 불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해야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이로부터 스님, 아니 정확하게는 청년 덕인(스님의 속명)의 고민이 시작됐다.

‘출가를 할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인 내가 남한에 내려와 중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 그러면 크나큰 불법 진리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평생 속가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다. 4대 독자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부처님은 한 나라의 왕자로 모든 걸 다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셨는데 이만한 용기도 내게는 없단 말인가.’

스님은 결국 1947년 10월에 계를 받아 출가를 했고 출가한 지 열흘 만에 100일 기도에 들어갔다.


2. 수행

수계한 지 10일이 지나서 숭산 스님은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 기도를 했다.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식사를 대신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했다.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했다.

그런데 곧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하러 이토록 극심한 고생을 하는가? 산을 내려가 조그만 암자를 하나 얻어서 일본 중처럼 결혼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가운데 천천히 도를 닦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밤이면 이런 생각이 너무 간절해 스님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다시 마음이 맑아졌다. 이렇게 보따리를 싸고 풀고 한 것이 9번이나 됐다.

50일이 지나자 몸이 쇠약해져 기운이 하나도 없게 됐다. 매일 밤마다 무시무시한 환상이 보였다. 마구니가 어둠 속에 나타나 욕설을 하기도 하고, 유령이 나타나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퀴기도 했다. 커다란 딱정벌레가 나타나 다리를 물려고도 했고, 호랑이와 용이 나타나 바로 앞에서 삼킬 듯 덤벼들기도 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무시무시한 환상에 이어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다. 부처님이 나타나 경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 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스님이 지쳐 잠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잠을 깨우기도 했다. 80일째가 되면서부터 스님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살갗은 솔잎처럼 파랗게 변색돼 있었다.

백일기도가 끝나기 1주일 전인 어느 날,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도량석을 돌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11살이나 12살쯤 되어 보이는 동자 둘이 양쪽에 나타나서 스님에게 절을 올렸다. 동자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 얼굴이 아름다웠다. 스님은 그들을 보고 무척 놀랐다.

자신의 마음이 굳세어지고 완전히 맑아졌다고 느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다. 좁은 산길을 걸어갈 때 두 동자는 뒤에서 따라왔는데, 바위사이로 지날 때 동자들은 바위 속을 통과해 걷는 것이었다. 그들은 30분 동안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다가 스님이 불단 앞에 다가가 절을 올릴 때가 되면 불단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1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드디어 마지막 100일이 되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 소리와 자기 음성도 들을 수 있었다.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깨달았다. 바위나 강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무에는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스님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원각산하비금로(圓覺山下非今路)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배낭행객비고인(背囊行客非古人)
배낭 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탁탁이성관고금(濯濯履聲貫古今)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가가오성비상수(可可烏聲飛上樹)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그 후 스님은 산을 내려와 만공 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 스님을 만났다. 고봉 스님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난 스님이었다. 당시 고봉 스님은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스님 입버릇이 ‘중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다.

숭산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 스님에게 점검 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다. 고봉 스님 앞으로 간 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면서 목탁을 내밀었다. 이 물음에 고봉 스님은 목탁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 것이었다.

숭산 스님이 질문을 했다.

“어떻게 참선해야 합니까?”

고봉 스님이 말했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라고 했더니 조주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님은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모릅니다”라고 했다.

고봉 스님은 “모르면 의심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 수행법이다”라고 말했다.

그 해 봄과 여름 동안 숭산 스님은 항상 행선(行禪)을 했다. 가을이 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 100일 간의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다. 겨울이 되었을 때 스님은 다른 스님들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무슨 수를 써서든지 다른 스님들의 공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스님이 불침번을 서는 어느 날 밤(당시는 도둑이 많았다) 부엌으로 들어가 놋사발과 냄비를 모두 꺼내 앞마당에 둥그렇게 늘어놓았다.

다음 날 밤에는 법당 안 불단 위의 부처님을 벽을 향해서 돌려놓고, 국보였던 향로를 내와서 견성암 마당 위 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절에서는 난리가 났다. 어떤 사람이 왔다고도 하고 또 산신이 내려와 스님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혼을 냈다고도 하는 소문이 좍 퍼졌다.

셋째 날 숭산 스님은 비구니들 처소로 가서 방밖의 고무신 70켤레를 집어다가 덕산 스님 방 앞 댓돌 위에 고무신 가게 진열장같이 늘어놓았다. 바로 그때 한 비구니 스님이 밖으로 나오다가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잠자는 다른 비구니들을 모두 깨웠다. 결국 숭산 스님은 붙잡혔다.

다음날 숭산 스님은 대중들 앞에서 대중공사를 받게 됐다. 거기에 참가한 스님들 대부분이 숭산 스님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해 수덕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신 숭산 스님은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숭산 스님은 자신의 삶에서 그렇듯 신통한 일들이 일어나자 수행을 지도해 줄 스승을 찾기 시작했다.


3. 득도

맨 처음 숭산 스님은 전월사의 덕산 스님을 찾아가 절을 올렸다. 덕산 스님은 오히려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

다음으로 스님은 큰 비구니 스님을 찾아갔다. 큰 비구니 스님은 “젊은 사람이 산중을 이렇게 시끄럽게 하니,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꾸짖었다. 그때 숭산 스님이 “이 세상이, 이 온 우주가 시끄러운데 어찌 견성암만 시끄럽겠습니까?”라고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 다음으로 숭산 스님이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 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 스님이었다.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다.

“스님, 제가 어젯밤에 삼세제불을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 스님은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 스님의 눈을 그윽이 들여다보았다. 그런 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하고 물었다.

숭산 스님이 말했다.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

“아하, 이 사람 큰일 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 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 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 스님이 웃으며 “아하!” 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 스님은 하나도 막힘없이 술술 답했다. 드디어 춘성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 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됐다. 1월 15일, 해제한 뒤 숭산 스님은 고봉 스님을 찾아 길을 떠났다. 고봉 스님은 경허, 만공, 고봉으로 이어지는 전통 임제의 법맥을 이은 선승이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 스님은 금봉, 금오 스님을 만나서 인가를 받았다. 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 채 고봉 스님의 절을 찾아갔다.

숭산 스님이 고봉 스님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다.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하고 고봉 스님이 말했다.

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 주십시오.”

이 말에 고봉 스님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스님의 손을 치우고 장판 위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이게 스님의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 스님이 빙긋이 웃고 말했다.

“나쁘지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지만 몇 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 스님은 1,700가지 공안 중 어려운 것을 골라 물었다. 그러나 숭산 스님은 막힘없이 모두 대답했다. 이를 본 고봉스님이 말했다.

“서식야반 반기기파라.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 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얼굴이 벌개져서 또 다른 ‘여여한’ 답을 말했다. 고봉 스님은 고개를 흔들었다. 참다못한 숭산 스님은 화가 났고 또 실망했다.

“춘성 스님, 금봉 스님, 금오 스님 모두 제게 인가를 해 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해라!”

50여 분간 고봉 스님과 숭산 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 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하더니 그때 갑자기 숭산 스님이 대답을 했다. 그것이 ‘즉여’의 답인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 고봉 스님의 눈에 눈물을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쳐흘렀다. 고봉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숭산 스님을 얼싸안고 말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다음해인 1949년 1월 25일, 고봉 스님은 행원 스님에게 정식으로 법(法)을 전하는 건당식을 열었다. 이 건당식에서 스님은 숭산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이로써 숭산 스님은 고봉 스님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아 이 법맥의 78대 조사가 됐다. 그리고 이는 고봉 스님이 주었던 최초의 전법이었다.

건당식이 끝나고 고봉 스님은 숭산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3년간 너는 묵언해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00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

숭산 스님 나이 22살 때였다.

‘일체 법은 나지 않고 일체 법은 멸하지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 이것을 이름하여 바라밀이라 한다.’(고봉 스님에게 받은 전법게)
남동우 기자 | dwnam@buddhapia.com
2004-11-30 오후 8: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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