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로 가는 길은 세간(世間)에서 출세간(出世間)으로 가는 길이요, 속(俗)에서 성(聖)으로 가는 길이다. 절은 걸어서 들어가야 맛이다. 옛 사람들은 공양미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땀을 흘리며 걸어가는 동안 세사에 묻은 티끌들을 다 떨구어냈다.
요즘은 그런 풍속이 사라지고 없다. 부처님 코앞에까지 찻길을 내놓고 승속이 모두 차를 타고 오르내린다. 절에 가는 날만이라도 차를 집에 두고 나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논산에서 양촌행 시내버스를 타고 중산리 쌍계사 입구에 내리면 작봉산에서 개울물이 내려온다. 이 개울은 지방 2급하천인 장성천 본류이다.
개울가에 갈대, 물억새, 달뿌리풀 등등 수생식물이 그득하다. 물가의 갈대숲도 붉게 물들었다. 가을이면 눈길 닿는 곳마다 가을이다.
물가에 물미나리가 파랗게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 물미나리는 외래종이다. 돌미나리나 논미나리보다 향은 덜 나지만, 줄기가 질기지 않고 부드럽다. 열을 내리게 하고 이뇨작용을 해주는 식용 미나리이다. 사찰 경내의 연못가에 심어두면 수질도 정화시키고 초여름에 하얀 꽃도 보여준다. 물미나리 덕분인지, 개울물이 맑다.
중산리에서 쌍계사까지는 십릿길, 길을 따라 집들이 모였다가 흩어졌다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을 ‘절골’이라 부른다. 그러나, 지금 절골 마을에는 교회가 2개나 들어와 있어서 그것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비단 이곳 만이 아니다. ‘절골’이라는 지면은 곳곳에 남아있지만, 해방 이후 교회들이 속속 들어서서 이제는 찬송가를 들으며 절로 들어가야 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전통적인 사부공동체가 무너지고, 산중사찰들은 싫든 좋든 그들과 함께 어깨 부딪치며 살아가야 한다. 이제 사찰은 새로운 상생의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절이 가까워지면 저만큼 절골지(池) 저수지가 나타난다. 저수지 둑 아래 몇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집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집들이 모두 낡았다. 이미 빈 집 하나가 대나무밭 속에 거꾸러져 있다. 여기까지가 쌍계사 소유 절땅이다.
한 아낙이 혼자 앉아 세월을 잊은 채 팥 타작을 하고 있다. 등 뒤의 낡은 황토벽에는 곶감이 매달려 가을햇살에 제 몸을 태우고 있다.
작봉산의 단풍이 절골지 물속에 울긋불긋한 치맛자락을 드리우고 있다. 오랜 가뭄으로 낮아진 수면 위를 논병아리들이 한가로이 유영하고 있다. 논병아리는 오리류 가운데 몸집이 가장 작지만, 민물과 바닷물을 가리지 않고 우리나라 전역에서 서식하고 있다. 텃새인 논병아리는 무리를 짓지 않고 대체적으로 한쌍 또는 두쌍이 붙어 다닌다. 잠수를 해서 물속의 고기를 낚아채는 솜씨 좋은 사냥꾼이다.
새들은 몸이 가벼워야 하기 때문에 물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똥오줌도 따로 누지 않고, 오래 참지도 않는다. 심지어는 날아다니면서도 싼다. 그러나, 새들에게도 물은 반드시 필요하다. 세수도 하고 목욕도 해야하기 때문이다. 절골지 주변에 새들이 다양하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늦가을이면 어디선가 내려오는 원앙을 비롯하여 어치, 물까치, 직박구리, 오색딱다구리, 박새, 동고비, 쇠박새... 등등이 쉽게 관찰된다.
저수지 물가 질퍽한 개흙바닥에는 짐승들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나 있다. 너구리 한 마리가 물 마시러 내려왔다가 방금 발자국을 찍고 골짜기로 올라갔다.
쌍계사는 무문(無門)의 절이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다. 본래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화재로 소실된 후 다시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설이 깃든 하마비를 지나면 산자락의 낙엽송 숲속에 부도와 중건비가 모여있다.
멀리 작봉산(鵲鳳山)이 보인다. 조선조 문헌에 ‘雙溪寺 在佛明山’이라 기록되어 있는 걸로 보아 작봉산의 옛 지명이 ‘불명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봉산은 해발 418 미터에 불과한 육산이지만, 충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쌍계사는 작봉산의 북쪽 기슭에 북향으로 앉아 있다. 절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계곡이 내려와 작은 쌍곡을 이룬다. 그래서 절 이름을 쌍계사라고 했다. 처음에는 ‘백암(白庵)’이라고 불렀으나, 절에 화재가 잦아서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다리 아래에 생강나무 한 그루가 홀로 노랗게 단풍 들었다. 이른 봄에 노란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는 전국 어디서나 자라는 낙엽활엽수 관목이다. 줄기나 가지를 꺾으면 생강냄새가 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예전에는 절에서 이 나무의 기름으로 등불을 켜기도 했다. 어린잎은 말렸다가 차를 우려 마셨다고 한다. 토질은 별로 가리지 않고, 종자의 발아력도 좋지만, 조경수로는 환경내성과 이식성이 떨어지는 것이 흠이다.
문 없는 문을 들어서면 눈높이의 석축이 있고, 돌계단이 나 있다. 돌계단을 올라서면 대웅전과 봉황루가 넓은 중정(中庭)을 만들고 있다. 때마침 봉황루 해체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지붕을 걷어낸 집체가 사찰건축의 생태성을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찰건축물은 조립성이 강해서 기둥과 써까래 같은 구조물들을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지은 절집이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조립성 때문이다. 그리고, 못을 사용하지 않고 사개를 맞추어 치목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그대로 해체하여 옮겨서 다시 지을 수 있는 이실성(移室性)도 뛰어나다. 요즘 학계에 흔히 말하는 ‘지속가능한 생태건축물’이 바로 사찰의 전각들이 아니던가.
쌍계사 절터는 제석천이 잡아 주었다고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보물 408호인 대웅전은 제석천의 아들이 강림해 각지의 백성들이 보내온 여러 가지 진귀한 나무들로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웅전을 세운 기둥들을 보면 느티나무, 소나무 등 다양하다. 심지어 대웅전의 오른쪽 3번째 기둥은 칡줄기로 만들었다는 전설까지 있다. 비틀어진 근육질을 보아 칡 기둥은 서어나무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어쨋거나, 그만큼 공을 들여 지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대웅전은 단층 팔작지붕의 당당한 규모와 함께 천의무봉한 자연미를 자랑한다. 가지만 툭툭 쳐서 세운 듯한 자연목 기둥에서부터 다듬지 않은 덤벙주초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인공(人工)을 절제했다. 후불벽을 세운 기둥까지도 구불구불한 자연목 그대로이다.
상제의 아들은 문짝 하나, 벽화 한 점도 하늘의 상제에게 물어보고 지었다고 한다. 천장에는 부처님 회상 당시 하늘에서 내리던 꽃비가 흩날리고, 그 꽃비 속을 3마리의 극락조가 꽃을 희롱하며 날고 있다. 아름다움은 문밖에도 있다. 모란, 연꽃, 국화 등 여섯 가지 꽃으로 조각된 10짝 꽃문짝이 그것이다.
요사채 마당에 감나무가 잎들을 떨군 채 나목으로 서 있다. 가지 끝에 매달린 연시가 지나가는 바람에도 뚝 떨어진다. 감은 세계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만 재배되는 동양 과일이다. 성질이 수더분해서 마당이나 밭둑이나 산자락이나 가리지 않고 잘 자랄 뿐만 아니라 따로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또, 감잎은 과일나무 가운데 유일하게 차(茶)를 제공해준다. 여름날의 그늘도 좋다. 새들이 둥지를 틀지 않고, 해충이 거의 범접하지 않다. 또, 단풍이 들기 무섭게 잎을 떨쳐내 사람들이 감을 따기 쉽도록 도와주는 자상함도 있다. 그래서 감은 사과나 배보다 우리 정서에 가깝다.
나한전 벽에 큰멋쟁이나비 한 마리가 가을햇살 아래 낮잠을 즐기고 있다. 큰멋쟁이나비는 날개의 편 길이가 6센티 가량되는 중간 크기의 나비이다. 양쪽 앞날개 가장자리는 흑색 바탕에 주황색 무늬가 있으며, 뒷날개 바깥 가장자리에는 주황색에 검은 점들이 나 있어서 매우 아름답다. 가을에 보이는 것은 어른벌레로 겨울을 지낸다. 보호색이 강해서 나무나 꽃에 앉아 날개를 접으면 전혀 폈을 때의 색깔과 무늬는 전혀 오간 데가 없어진다.
대웅전 뒤로 작봉산 자락에 급하게 내려온다. 쌍계사를 감싸고 있는 숲의 나이는 비교적 젊다. 나무들의 나이들도 모두 고만고만하다. 이러한 동령림(同齡林)은 과거에 산판이 있었거나 산불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군락을 이룬 노간주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작봉산 산림은 사람의 힘을 많이 받아 이루어진 천연갱신림(natural regeneration)이다. 낙엽송(일본이깔나무)이나 소나무나 잣나무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낙엽송은 이름 그대로 일본을 원산지로 하는 낙엽 지는 소나무이다. 우리 소나무에 비하면 매우 빨리 자란다. 잘 자란 나무는 높이가 무려 30미터에 닿고, 지름도 무려 1미터 가까이 자란다. 게다가 줄기와 가지가 곧아서 얼른 키워서 목재로 쓰기에는 그만이다. 그리고, 이른 봄 연두색 신록도 아름답고, 가을날 황갈색 단풍도 아름답다. 겨울날 설경도 좋다.
이곳의 사람손으로 심은 듯이 많은 노간주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노간주나무는 다른나무에 비해 생육이 더디다. 키도 작고 옹이가 많아서 재목감도 못 되지만, 산판이나 산불이 지나간 척박한 곳에 앞장서 들어오는 선수종이다. 옛 사람들은 나무를 보고 쓸모를 생각한다고 했다. 짧고 억센 가시가 있어서 경내외에 생울을 만들면 그런대로 제몫을 해낸다.
그 밖에 굴참나무, 졸참나무, 밤나무, 소나무, 잣나무, 서어나무, 생강나무, 쪽동백, 철쭉, 진달래, 쥐똥나무, 국수나무, 청미래덩굴 등등이 있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없다.
대웅전 뒤로 정상으로 오르는 유일한 등산로가 나 있다. 등산객들에겐 미안하지만, 절에서 그 등산로를 폐쇄한 것은 잘한 일이다. 대웅전 뒤로 객이 드나들면 경내도 산란하거니와 부처님 등뒤로 난 길은 풍수적으로도 좋지 않다.
작봉산 정상에 서면 금남정맥이 전북과 충남을 가르고 있다. 익산쪽은 경사가 급하고, 논산쪽으로는 완만한 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작봉산은 <산경표>에 나오는 금남정맥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것은 <산경표>의 금남정맥이 실제와 다르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산경표>에는 금남정맥이 전북 완주 주화산에서 시작하여 부여 부소산 조룡대에서 금강에 잠수되고 있으나, 실제 산줄기는 싸리재-불명산 시루봉-남당산-작봉산-천호산-미륵산-오성산을 거쳐서 서해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