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범 스님은 어린 나이에 조계산 물을 먹었다. 3대에 걸쳐서 스님을 배출한 집안의 사람으로서는 그리 빠른 것도 아니지만 중학교를 마치던 나이에 출가를 한 것이다.
아버지도 스님으로서 일세를 허튼 곳에 빠지지 않고 살다 가신 분이지만 그 시절 다른 많은 스님들이 그러했듯이 승범에게 그리 맑은 인상으로 남아 있지 못하다.
스님의 자녀는 우리나라에서 그리 많은 편도 아니지만 밝지 못한 분위기가 있는 데다 가족을 거느리면 당연히 져야 할 부양의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
당시의 스님들은 삼보정재는 함부로 쓸 수 없다는 다소 궁색한 논리로 빠져나가며(?) 가족들에게 궁핍을 강요했다.
승범의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어서 혹독한 가난의 시련을 겪었다. 누구는 ‘찢어지는 가난의 시련이 없었다면 어찌 봄날의 배부른 뒤 배치는 평화로움을 알겠는가’ 라고 공부하는 소견을 읊기도 했지만 그 시절의 가난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른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표현이 뭔 뜻인지나 아시오?”
“아, 알다마다요.”
“알기는 뭘 아라라우?”
“나도 안당게 그네”
사실 그 시절엔 봄이나 여름에 들에 난 나물들을 뜯어서 간식이 아닌 주식을 삼을 수밖에 없었는데 봄에 나는 쑥이 가장 잘 먹히는 음식이었다. 그런데 쑥은 섬유소가 많아서 소화되고 남은 찌꺼기가 딱딱하게 굳기 일쑤였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한 번 먹은 뒤 다시 먹을 기회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밥 먹은 뒤 배 꺼지면 안 되니까 뛰지도 말라고 하던 시절이어서 뒷간에도 가능한 한 참다가 늦게 가도록 하였다. 그 때 생긴 말이 ‘오줌은 참으면 병이 되지만 똥은 참으면 약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참고 나서 누운 똥이 잘 안 나오면 그것이 항문을 찢고 나와서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인데 사람들이 물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쓴다고 하였다. 아무튼 승범 스님은 그 시절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아버지가 가신 길인 출가사문의 길로 들어섰다.
“저 사람이 혹독한 가난을 겪어서 그런지 웬만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않아. 스승인 나하고도 의견이 갈릴 때가 있는데 다른 사람 같으면 내 뜻을 따를 텐데, 꼭 자기 의견을 원칙이라고 하면서 굽히지를 않아 소임 살면서 나랑 제일 의견차이가 많았지.”
은사인 선암사 주지 지허 스님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그가 얼마나 원칙을 지키려 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 원칙을 지키려는 자세가 그의 수행을 돋우는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스스로로는 별다른 수행을 해 보지 못했노라고 한다.
하지만 승범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말로는 소임을 살기는 했지만 안거기간에 선암사 상선원(上禪院)이자 남도 제일선원인 칠전선원(七殿禪院)에서 철나기를 할 때와 아도(阿道)화상이 창건했다는 선암사 초창기의 터전인 비로암(毘盧庵)에 살 때가 가장 뜻있는 자기 돌아봄의 세월이었을 거라고 입을 모은다.
비로암은 대각 국사 의천 스님이 주석했던 대각암을 지나 해가 떠오른다는 일출(日出)을 넘어 조계산 장군봉을 넘어 송광사로 가려면 꼭 지나가야 하는 양지바른 곳에 있어 수행자가 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30여년 전 까지 활동하셨던 선곡(禪谷) 스님 등 많은 선객들이 정진하던 수행터이다.
스스로는 은사스님께서 내려주신 ‘이 뭣고’를 늘 참구하고 있지만 아직 소식을 못 보았다고 한다. 설법누각인 만세루(萬歲樓)에 쓰여 있는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편액이 말하듯이 선암사 대중스님들은 중국 선종의 비조라 할 수 있는 육조의 수행가풍을 따르고자 하여 선암사에는 주련(柱聯)이 없다. 그야말로 ‘말이 없음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수행가풍을 면면히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역대 조사의 얼이 스며있는 선암사에 상주해서 그런지 존경하는 스님과 가르침을 말해보라고 하자 “많은 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존경하는 분들이야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지만 혜능(慧能) 대사의 ‘본래 한 물건도 없음(本來無一物)’과 ‘선도 악도 생각 말라(不思善不思惡)’는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한다” 고 한다.
그래서 염불과 참선, 간경 등의 달라 보이는 수행문이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서 달리 보여도 결국 그 목표와 결과는 ‘자기성품 제대로 보기인 견성(見性)’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며 살며시 웃는다.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말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좀 이야기해 보라고 말하자 “아, 있는 그대로야 어디 내뱉을 게 있소?” 한다.
모시는 원불(願佛)이 있느냐는 물음에도 ‘“중생의 근기에 맞춰서 부처님 설명하느라 삼신(三身)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어찌 개성(個性)에 맞는 것을 찾겠느냐”며 자신은 오로지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알고 믿으며 따를 뿐이라고 한다. 승범 스님은 지허 스님의 지도를 받아서 옛 출가자의 전통가풍을 이어받고 있다.
지허 스님은 해외성지순례를 권하는 이에게 ‘자신은 불출주의(不出主義)’라며 ‘한국의 것도 다 알기 어려운데 밖의 것을 언제 알겠느냐’며 스님과 스님의 선조사 및 현재 수행하고 있는 태고종의 스님들이 보수전통의 수행자라는 점을 강조하기에 상좌인 그는 더욱 우리 것 익히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참선 수행에서 간경 및 염불 수행까지 수행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것에서부터, 칠전선원을 중심으로 내려오는 선다(禪茶)의 법제(法製), 물푸레나무를 태워서 들이는 승복의 먹물 입히기 등 이미 대다수 스님들이 기억 저편에 던져버린 것들을 차곡차곡 익혀 왔다.
그런데도 여러 가지 사정상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스님의 그것을 다 익히기가 쉽지 않다며 안타까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