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학생은 부모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표시하는 것이 정말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모르면서도 요행을 바라면서 넷 중에 아무 것이나 골라 아는 척 표시를 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분명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니면서 바른생활 시간이나 윤리시간에 늘 선생님으로부터 귀가 뚫어지게 들은 것은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 ‘정직이야말로 최선의 정책이다’라는 말이 아니었던가?
그 학생은 담임선생님에게 자신이 한 일을 설명했다. 담임선생님은 그 학생의 설명이 다 끝나자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 선생님은 다 이해하겠는데, 네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려면 성적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너도 잘 알겠지. 네가 비록 어떤 문제를 몰라서 정답을 표시할 자신이 없다고 할지라도 넷 중에 하나는 정답이라는 것은 알지 않니? 그렇다면 네가 아무렇게나 골라도, 정답을 고를 수 있는 확률은 25퍼센트라고. 대단히 높은 확률이야. 그런데 그걸 표시하지 않고 그냥 놔둔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야. 철수야, 좀 미안하다. 이왕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하나만 더 말해 줄께. 너희들이 답을 답안지에 표시한 것을 채점할 때 말이다. 구멍을 뚫어 정답표를 만들어 맞는 답을 세어 점수를 먹이지 않니. 너도 보아서 알지? 그러면 선생인 나는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전혀 알 수가 없어. 나는 그저 까맣게 칠해진 것만 세어서 점수를 계산하는 거야. 퀴즈놀이 하는 기분이야. 학생 하나하나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으며, 무엇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학생과 교사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전무한 거야. 나도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이런 사정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구나.”
우리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정직을 강조하면서도 실은 요행과 부정직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수학능력시험을 핸드폰을 가지고 부정행위를 했다고 그 학생들을 잡아 가두고 벌을 주어서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미 사지선다형 문제 속에는 요행과 부정직이 도사리고 있다.
이제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답을 하고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는 사람을 키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학교교육이 대입수능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을 안다면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번에 일어난 휴대전화를 이용한 수능시험 부정사건은 오로지 '승자의 정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커닝과 같은 불법과 반칙을 조장하고 묵인해온 세태의 모습이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파급되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목적만 달성되면 그것이 곧 정의로 간주되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에서 한없이 절망할 뿐이다. 과연 우리는 수험생들에게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