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창종 33주년을 맞은 불교총지종(통리원장 우승)이 12월 2일 오후 2시 종조 ‘원정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새로운 밀교 중흥종단으로 거듭난다.
종단역점사업으로 서울 역삼동 총지사내에 종조전을 건립해 온 총지종은 2년여간의 종조전 건립불사를 최근 마무리했다. ‘원정기념관’ 불사를 위해 총지종은 밀교의 비법(秘法)과 경궤(經軌), 다라니와 수법(修法) 등을 발굴해 왔다. 총지종조인 원정 대성사(苑淨 大聖師)의 창종의 뜻을 기림으로써 밀교종단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밀교의 새로운 중흥을 도모하겠다는 홍원이 담겼다. 한반도에 ‘밀교’를 꽃피운 원정 대성사의 업적을 되살리고 종단중흥을 이루려는 총지종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총지종의 창종과 정통밀교의 수립
‘원정기념관’은 창종조인 원정 대성사의 사상과 업적을 유물을 통해 총지종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또한 총지종의 원력과 각오가 그 속에 담겼기 때문이다.
원정 대성사는 정확한 인계, 엄격한 의궤와 사종수법을 비롯하여 교상(敎相)과 사상(事相)면에서 완벽한 체계를 갖춘 정통밀교의 확립에 노력하는 동시에 본산인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총지사를 비롯하여 전국 30여개소에 사원을 건립, ‘즉신성불’과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기치로 밀교의 대중화를 이뤘다.
특히 1980년 9월 8일 입적할 때까지 한국에 ‘밀교’라는 용어와 개념을 최초로 도입해 총지종과 진각종이라는 현대 한국밀교의 양대 종단의 산파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한국 현대밀교사에 큰 획을 그었다. 원정 대성사의 일대기와 현대 한국밀교사의 궤적이 일치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원정 대성사의 사상과 교의는 <종조법설집>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직접 번역한 총지종의 소의경전 <대승장엄보왕경>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불교총전> 등에서도 살필 수 있다.
원정 대성사는 종단 운영에 있어서도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그 대표적인 작업이 총지종의 재단법인화이다. 총지종을 재단법인으로 등록해 정재를 보호하면서, 승직자들에 대한 노후대책을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마련함으로써 종단 운영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이를 통해 한국불교 종단들이 나아가야할 방향과 지향점을 제시한 점은 원정 대성사의 큰 덕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원정 대성사의 밀엄국토 건설과 정통밀교 수립에 대한 대원(大願)은 총지종이 한국불교사상 최초로 양계만다라를 완성하여 봉안한 불사로 이어져 끊임없이 계승, 발전되고 있다. 윤원대도(輪圓大道),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정법밀교를 다시 꽃피운 원정 대성사의 업적으로 이뤄진 일이다.
이 땅에 처음으로 현대밀교의 물꼬를 열고 대승불교의 신천지를 개척한 원정 대성사의 가지신력이 ‘불교총지종’을 통하여 온 누리에 호국불교의 대비원과 함께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한국밀교와 원정대성사
1600여년전의 불교전래와 함께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민중을 구제하고 숱한 국난을 극복하며 흥왕했던 한국의 밀교. 그러나 조선조의 억불정책 속에서 밀교는 쇠퇴하고 통불교(通佛敎) 속에서 겨우 그 명맥만을 이어왔다.
이에 원정 대성사는 한국밀교의 중흥을 위해 정통밀교 총지종을 창종했다. 해방 이후 정신적 공황과 민생고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정법(正法)으로서 밀교를 펼친 것.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실의와 좌절로부터 구하겠다는 원정 대성사의 대비원(大悲願)은 밀교를 통한 구국도생(救國度生)의 방편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또한 한국밀교의 중흥의 첫걸음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밀교사를 돌아볼 때, 원정 대성사는 뛰어난 통찰력과 혜안으로 당시 어려웠던 사회에 정신적 치유와 자성참회를 주창했던 진각종 창종주 회당 조사를 만난 것은 신생 한국밀교의 홍복이었다. 원정 대성사의 해박한 불교지식과 뛰어난 밀교수법(密敎修法)의 수행력과 가르침은 총지종과 진각종 뿐만 아니라 한국밀교의 새로운 태동과 밀교중흥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불교국 고려를 끝으로 사라져 버린 밀교정법이 원정대성사의 오지신력(五智神力)으로 하나 하나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한국의 현대밀교는 기나긴 잠을 깨고 태동하기 시작했다. 잊혀졌던 밀교의 비법(秘法)과 경궤(經軌), 다라니(陀羅尼)와 수법(修法) 등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통불교 일색이었던 한국의 불교계에 ‘밀교’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린 순간이었다. 더구나 근현대사에 있어서 한반도에 ‘밀교’라는 말을 처음으로 전파한 이가 바로 원정 대성사인 바, 이에 대한 불교사적 평가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총지종의 소의경전과 수행법
1972년 12월 24일, 원정 대성사는 서울 상봉동에 서울선교부(宣敎部)를 개설(開設)해 개종불사(開宗佛事) 겸 창종식을 거행했다. 이 때 종명을 ‘불교총지종’으로 정하고 정통밀교종단의 성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정통밀교가 진언(眞言)과 정확한 인계(印契), 엄격한 의궤와 사종수법(四種修法)을 비롯해 이론적인 조리가 정연한 교상(敎相)과 사상(事相)을 갖추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불교총지종이 정통밀교 종단임을 표방하기 위해 비로자나부처님을 교주로 모시고 <대일경> <금강정경> <대승장엄보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아 교리적 근거를 마련했다. 또한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에 의거해 육바라밀에 의한 대승보살도의 실천을 완성할 수 있도록 교리의 기틀을 갖춰나갔다. 여기에 교화의 방편으로서 준제법을 주축으로 증익(增益)·식재(息災)·경애(敬愛)·항복(降伏)법 등의 사종수법을 채택했으며, 아사리들을 위해 여러 가지의 밀교비법과 관법(觀法)을 경전에서 마련했다.
창종 이후 한국 현대밀교사상 최초로 삼매야계단(三昧耶戒壇)과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열어 관정식(灌頂式)을 베풀고 정통밀교를 전수할 아사리를 배출했다. 또한 초창기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대승장엄보왕경>과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을 국내 최초로 번역, 대승불교의 연장선상에 밀교가 자리하고 있음을 천명했다.
총지종의 발전상
총지종은 정통밀교의 기치를 세운지 7년만에 30여 사원이 개설되고 종무행정기관인 통리원과 함께 교리적인 면을 뒷받침할 연구기관 법장원이 설립됐다. 또한 교도들의 참여와 신행활동을 위한 신정회가 결성됐으며, 교학적 근거를 마련한 각종 교전이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처처불공 시시불공(處處佛供 時時佛供)’을 강조한 원정 대성사는 모든 불사와 법회를 간소화함으로써 어려운 밀교수법의 대중화에 진력, ‘생활의 불교화, 불교의 생활화’를 실천하도록 방향을 제시했다. 심오한 밀교의 비법을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보인 것이다.
원정 대성사의 밀엄국토 건설과 정통밀교의 수립에 대한 대원은 총지종이 한국최초로 양부만다라를 완성하여 봉안한 것에서도 나타났듯이 끊임없이 계승, 발전되고 있다. 원정대성사의 입적과 원로 스승들의 잇따른 유고로 요원의 불꽃처럼 일어나던 교세가 잠시 주춤한 적도 있었으나 이제 총지종은 새로운 도약의 자세로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이 땅에 처음으로 현대밀교의 물꼬를 열고 대승불교의 신천지를 개척한 동방의 빛 원정대성사의 가지신력(加持神力)이 온 누리에 펼쳐지며 호국불교의 대비원(大悲願)과 함께 총지종의 앞날은 나날이 충실하게 그 빛을 더하여 가고 있다.
현대 한국밀교의 개척 원정 대성사
현대 한국밀교의 개척자이며 정통밀교종단인 총지종을 창종하신 원정 대성사(1907~1980)는 1907년 1월 29일 경남 밀양군 산외면 다죽리에서 탄생하셨다. 본관은 일직(一直) 손(孫)씨, 속명은 대련(大鍊), 총지종의 창종과 함께 정우(禎佑)로 개명했다.
어려서부터 비범해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잊지 않았다고 한다. 유년시절에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개화의 물결과 함께 현대 고등교육을 마친 후 잠시 관계와 교육계에 종사했다. 이후 불교에 큰 뜻을 두고 한반도는 물론 중국, 일본 등지를 편력하며 불경의 수집과 연구에 몰두했다.
한국전쟁 직후 진각종의 개조인 회당 손규상 조사와 함께 진각종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으며, 회당 조사의 입적 후인 1963년부터 진각종 총인의 자격으로 진각종을 이끌며 <응화성전> <총지법장> 등을 편찬하면서 진각종의 교리적, 행정적 기반을 확립했다.
이후 정통밀교의 확립에 노력하던 중 진각종의 수행체계에 <준제관음법>을 시행하려 했으나 일부 종교외적인 곡해와 일부 승직자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정 대성사는 한국의 현대밀교가 새롭게 도약할 기회를 놓친 점을 안타깝게 여겨, 이른바 ‘준제파동’의 와중에서 진각종을 떠나 밀교의 비법으로 정진하시던 중 1972년 4월 7일 ‘대승장엄보왕경과 준제관음법으로 교화하라’는 관세음보살의 몽수를 받고 교상확립에 착수했다.
그 해 8월 21일 법신대일여래의 가지력과 원정대성사의 영명하신 통찰력으로 엄격한 의궤와 사종수법을 비롯한 밀교의 기틀이 갖추어짐에 따라 원정 대성사는 오랜 은거의 수렴을 거두고 정법홍포를 발원했다.
마침 대성사의 행방을 찾던 진각종의 중진스승들과 식견 있는 제자들이 입교개종을 최촉함에 따라 밀교중흥의 결심을 굳히고 1972년 12월 24일 드디어 불교총지종의 창종을 만천하에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