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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스님은 46년 6월 경봉·용담·대의·석기 스님등과 함께 민족불교개혁을 위한 불교혁신연맹을 조직해 불교개혁에 앞장섰다. 53년 10월에는 효봉·동산·금호·청담·자운 스님등과 불교정화운동을 위한 촉구 결의를 선학원에서 했으며, 54년 5월 대의·종익·재열·정열 스님들과 불교정화운동을 발기하기도 했다.
스님은 58년 경주 불국사 주지, 60년 불교정화 사태수습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 61년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 등을 거쳐 대한불교청소년 교화연합회 총재(70년), 조계종 8대 총무원장(71년), 영천 은해사 주지(76년), 조계종 초대 포교원장(77년), 조계종 제15대 총무원장(78년), 중앙승가대학 초대학장(80년), 비상종단운영회의 부의장 겸 상임위원(83년), 조계종 23대 총무원장(84년), 중앙승가대학 명예학장(88년), 동국역경사업 진흥회 이사장(89년),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94년), 동국역경원 한글팔만대장경 역경사업 후원회 회장(94년)을 역임하는 등 현대 한국불교의 ‘산 증인’이었다.
석주 스님은 총무원장을 세 번이나 역임했지만 매번 임기가 끝나기 전 사표를 내는 등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나는 행정을 잘 모르는 수행승일 뿐이며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총무원장을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종정 후보로 여러번 추천되기도 했지만 “난 산중에 있지도 않고 다른 어른스님이 해야 한다”며 매번 사양하기도 했다.
“한글대장경 마쳐야 세상 하직하겠다”
“스님이 동국역경원 부원장직에 계셨을 때 10년 동안 지각이나 결근 한 번 안하고 출근했습니다. 스님 생신이라고 신도들이 보시한 돈을 전부 역경원 후원금으로 주시기도 했습니다.”(최철환 동국역경원 편집부장)
스님의 역경에 대한 원력은 남달랐다. 한글대장경이 완간될 수 있었던 것도 “한글대장경을 마쳐야 세상을 하직하겠다”는 스님의 원력 덕분이었다.
석주 스님은 사재를 털어 1961년 5월 현 동국역경원의 전신인 법보원을 설립했다. <열반경> <법화경> <유마경> <육조단경> <현우경> <선가귀감> 등을 번역 출판했고, <부모은중경> <목련경> <우란분경>은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한 이후 운허 스님과 함께 한글대장경 편찬 작업에 착수, 37년만인 2002년 9월 318권의 한글대장경을 완간했다.
스님의 역경불사 원력은 주석하던 칠보사 대웅전 현판을 손수 ‘큰법당’이라고 바꾼데에서 엿볼 수 있다.
수행자다움에서 한치 벗어남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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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스님은 아흔이 넘은 최근까지도 조석 예불을 철저히 하고, 예불 끝에는 으레 좌선 정진을 하거나 108참회를 꼭 했다. 이후 스님은 빗자루를 들고 나와 도량을 쓸었다.
이러한 엄격함은 前 전국비구니회장 광우 스님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언젠가 진관사 주지 진관 스님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1975년에서 1976년 사이 비구, 비구니 이부승 계단이 구성될 때 일입니다. 그 때 계단에서 석주 스님을 존증아사리(證師)로 모시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말씀을 드리자 뜻밖에 단호히 거절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증사를 할 수 없소. 전복을 넣고 끓인 죽을 먹은 적이 있는데 내 어찌 증사를 할 수 있겠소.’ 언젠가 스님께서 제주도에 가신 적이 있는데 누가 전복죽을 끓여 공양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그 단 한 번의, 그것도 자신도 모르고 계율을 지키지 못한 일로 증사의 권유를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석주 스님은 특히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지만, 수행자가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수행에 곤궁해진다”며 식탐을 제일 무겁게 경계했었다.
일평생 ‘오유지족’의 삶 견지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있던 시절 어느 마을에 당도했을 때 해가 저물어 그 마을에서 묵게 됐습니다. 그래서 근처 절을 찾아 하루 묵기를 청했는데, 주지가 객실이 없다고 거절해서 마을에 가서 주무시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그 객승이 총무원장이라는 걸 알고는 그 주지가 찾아와서 참회를 하고 간 적도 있었습니다.”(서울 칠보사 주지 선근 스님)
일평생 ‘오유지족(吾唯知足, 오직 만족함을 안다)’의 삶을 견지한 석주 스님. 스님은 종종 화장실에 들어가면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속옷과 양말 빨래를 손수 했던 것이다.
또 석주 스님은 양말이나 속옷에 구멍이 나 새 것으로 바꾸려고 하면 불호령이 내렸다. 그리고 손수 구멍난 양말을 기웠다. 그렇게 해서 모은 옷이나 양말은 수해로 고통 받는 이재민들을 위해 내놓았다. 이불이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중앙승가대학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는 사람들에게나 중앙승가대학 기숙사로 보내졌다.
시대와 더불어 호흡
석주 스님은 ‘산 속의 스승’만은 아니었다. 시대와 함께 숨쉬고 아파했다.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진관 스님은 11월 15일 ‘석주 스님 열반에 눈물흘리며’라는 글을 통해 “언젠가 만해 스님 후손이 있는 심우장에서 추모재를 올릴 때 조국을 위해 나투는 열사들의 정신을 우리 불교가 이어나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기억이 생생합니다”라고 회고했다.
또한 “1980년 광주 민중들의 죽임을 목격하면서 인권이 마비됐을 때 조국의 민주화에 나서는 정치인들에게 힘을 주셨다”며 “당시 종교인으로 불교에서는 석주 스님이, 개신교의 문익환 목사,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더불어 사회 민주화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스님의 이러한 생각은 노년에 접어들자 자연스럽게 노후복지 쪽으로 집중됐다. 아산 보문사에 ‘안양원’을 설립, 어려운 노인들과 스님들의 노후복지에 진력을 다했다.
원적에 들기 사흘 전 지은 게송 발견
석주 스님은 평소 게송이나 휘호를 손수 써주기를 좋아했다. 이를 통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갈 것을 당부하는 뜻이었다. 또 불사하는데 필요하다며 게송이나 휘호를 써달라고 부탁하면 거절하는 법 없이 밤을 새서라도 모두 써주었다.
스님이 원적에 들기 사흘 전인 11월 11일 서울 봉은사 주련을 쓰다가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지은 게송이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96년의 세월 되돌아보니(廻顧九十六年事)
마치 왕자가 구걸 다니는 듯 했네(一似懷珠傭作擔)
오늘 아침 무거운 짐 내던지니(貧今朝放下煩重)
옛 모습 오롯이 본 고향이구나(本地風光古如今)
‘자비원력보살’(서옹 스님) ‘천하를 사랑하는 이’(범룡 스님) ‘안과 밖이 여여하신 자비보살’(관응 스님) ‘삶 자체가 바로 법문이신 분’(도원 스님). 현대 한국 고승들이 석주 스님을 평한 것처럼, 스님은 원적에 들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부처님 열반경이 임종게이거늘 어찌 임종게를 남기겠는가. 사리도 수습하지 마라.”
대원행 보살이 회고하는 석주 스님
어린이를 유난히 아끼셨던 ‘천진불’
사진설명-스님은 평소 “한국불교의 장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불자화하는 데 있다”고 늘 얘기할 정도로 어린이들을 유난히 아끼셨다. 칠보유치원 어린이들과 함께 한 석주 스님.
“어린이들을 워낙 아끼시는 분이셨어요. 아이들이 스님 방으로 찾아가면 과자나 초콜릿을 모아놓았다가 주시곤 하셨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 칠보사 어린이법회에서 석주 스님을 처음 만난 대원행 보살(50)은 40여 년 동안 가까이서 모셔온 스님을 이렇게 회고했다.
어린이나 학생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각별했던 스님은 학생회 수련회에도 빠짐없이 함께 했다. 취침 시간이면 수련에 지쳐 잠이 든 학생들이 깰까 조심스럽게 돌아보며 이불을 덮어주실 정도로 자상했다. 또한 스님은 남몰래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곤 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장학금을 받는 학생만 조용히 불러 장학금을 건네곤 하셨다.
늘 어린이들을 아끼고 보살폈던 스님 방엔 언제나 어린이들이 넘쳐났다. 스님을 시봉하시던 노보살이 버릇없는 어린이들을 야단치면 스님은 “저 어린이들이 자라서 불교의 미래를 이끌고 갈 사람이니 야단치지 말라”고 말씀했다.
평소 “한국불교의 장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불자화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셨던 ‘천진불’ 석주 스님.
대원행 보살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법명을 직접 지어 주시고 과자를 챙겨주시던 스님이 원적에 드셨다는 것을 아직은 실감하지 못하겠다”며 눈시울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