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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전 스님은 법어에서 “비록 사대(四大)를 탈각(脫殼)하고 환귀본처(還歸本處) 하셨지만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에 두루 통하는 만고(萬苦)에 불변(不變)한 노화상(老和尙)의 진면목(眞面目)은 우리 눈앞에 드러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또 “견문각지(見聞覺知)를 거두었지만 그 신령(神靈)스러운 면목(面目)은 오고감이 없이 생사자재(生死自在)한 묘용(妙用)을 갖추어 시방법계(十方法界)에 가득합니다”라며 “나지도 멸(滅)하지도 않고 시종(始終)이 없는 그 신령(神靈)함은 일찍이 불조(佛祖)도 얻지 못했고 중생(衆生)도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노화상(老和尙)의 법신(法身)이요, 일체음색(一切音色)이 노화상(老和尙)의 법음(法音)입니다. 이렇게 불사의(不思議)한 능력(能力)과 묘용(妙用)을 갖춘 노화상(老和尙)의 면목(面目)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라며 원적을 애도했다.
다음은 법어 전문.
宗正法語
어젯밤 금풍(金風)이 낙엽(落葉)을 쓸고 지나가더니
우리 종문(宗門)의 마지막 선지식(善知識)이셨던 석주 큰 스님께서
말후구(末後句)를 보였습니다.
비록 사대(四大)를 탈각(脫殼)하고 환귀본처(還歸本處) 하셨지만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에 두루 통하는 만고(萬苦)에 불변(不變)한
노화상(老和尙)의 진면목(眞面目)은 우리 눈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견문각지(見聞覺知)를 거두었지만 그 신령(神靈)스러운 면목(面目)은
오고감이 없이 생사자재(生死自在)한 묘용(妙用)을 갖추어
시방법계(十方法界)에 가득합니다.
나지도 멸(滅)하지도 않고 시종(始終)이 없는 그 신령(神靈)함은
일찍이 불조(佛祖)도 얻지 못했고 중생(衆生)도 찾지 못했습니다.
찾으려고 하면 은산철벽(銀山鐵壁)이요,
얻으려고 하면 당처(當處)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노화상(老和尙)의 법신(法身)이요,
일체음색(一切音色)이 노화상(老和尙)의 법음(法音)입니다.
이렇게 불사의(不思議)한 능력(能力)과 묘용(妙用)을 갖춘
노화상(老和尙)의 면목(面目)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구(求)해도 얻지 못하고 버려도 떠나지 않는 그 소소영영(昭昭靈靈)함이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
고명력력(孤明歷歷)한 그 주인공(主人公)은 곳곳마다 서로 다르나 보기 어렵고
때때로 함께 가지만 흔적이 없습니다.
생사(生死)와 열반(涅槃), 어디에도 구속(拘束)되지 않고
시시처처(時時處處) 당당하여 가고 머무는 자취가 없습니다.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았다면 이불(泥佛)이 바다를 건널 것이요
죽었다면 노지백우(露地白牛)가 드러나 있습니다.
노화상(老和尙)이 본래 갖추어 있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은 생사의 법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당처(當處)를 떠나지 않은 본분(本分)자리에서 나고 죽음을 말한 자는
야차(夜叉)의 칼날을 피(避)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머물렀던 선지식(善知識) 한 분이 오늘
머리도 끝도 없는 본분철추(本分鐵鎚)를 한번 치니
천지(天地)가 뒤집히고, 곳곳에 무생(無生)의 관문(關門)이 열립니다.
이것이 노화상(老和尙)이 우리에게 보인 말후구(末後句)입니까!
시방법계(十方法界) 중생(衆生)들의 생사를 얽매는 소식(消息)입니까!
회마(會麽, 알겠는가!)
내무소래야(來無所來也)요
거무소거야(去無所去也)로다
별전지(瞥轉之) 현관(玄關)하면
불조망조야(佛祖罔措也)로다
와도 오는 것 없고
가도 가는 곳 없나니
문득 이 경지(境地)마저 벗어나면
불조도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다.
佛紀2548年 11月 18日
大韓佛敎曹溪宗 宗正 法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