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을 워낙 아끼시는 분이셨어요. 아이들이 스님 방으로 찾아가면 과자나 초콜릿을 모아놓았다가 주시곤 하셨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칠보사 어린이법회에서 석주 스님을 처음 만난 대원행 보살은 40여 년 동안 가까이서 모셔온 스님을 이렇게 회고했다.
대원행 보살이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석주 스님의 모습은 학생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생회 활동 당시 수재민 돕기 거리 모금을 한 적이 있었다. 모금을 하는 학생들을 격려하며 스님께서는 양말, 내복 등을 모두 새 것으로 내 놓으셨다. 스님을 위해 준비해 드렸던 내복이나 양말을 입지 않고 모두 모았다가 내 놓았던 것이다. 평소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내복을 손질해 입는 모습을 보아왔던 학생들은 욕심 없는 스님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스님의 검소함을 잘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어느 날 밤, 스님 방에 갔더니 불을 켜지 않은 채 어두운 방에 앉아 계셨다. 아이들이 불을 켜려 하자 스님은 “책을 읽지 않는 한 불을 환하게 밝힐 이유가 없다”며 근검절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린이나 학생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각별했던 스님은 학생회 수련회에도 빠짐없이 함께 하시곤 했는데 취침 시간이면 수련에 지쳐 잠이 든 학생들이 깰까 조심스럽게 돌아보며 이불을 덮어주실 정도로 자상했다. 또한 스님은 남몰래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곤 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장학금을 받는 학생만 조용히 불러 장학금을 건네곤 하셨다.
늘 아이들을 아끼고 보살폈던 스님 방엔 언제나 아이들이 넘쳐났다. 스님을 시봉하시던 노 보살이 버릇없는 아이들을 야단치면 스님은 “저 아이들이 자라서 불교의 미래를 이끌고 갈 사람이니 야단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스님의 아이들 사랑을 나타내는 또 다른 일화 하나. 스님이 총무원장 재직 시절, 칠보사 어린이 법회 아이들이 스님을 찾아갔다. 시봉 스님이 어른 스님 집무실까지 몰려온 아이들을 호통 치자 그 때도 스님은 “식당에 가서 밥이나 챙겨 먹이라”며 아이들을 챙겼다.
“철이 없었으니 스님 일하시는데 까지 찾아뵈었죠. 평소에 워낙 자상하시니 그럴 수 있었던 거죠.”
스님은 어린이 법회 출신들이 결혼할 때 가훈을 손수 써주셨다.
스님이 자주 써 주신 글귀는 자실인의(慈室忍衣). 자비로서 집을 삼고 참음으로써 옷을 삼으라는 것. 대원행 보살이 받았던 가훈은 지족상락 능인자안(知足常樂 能忍自安). 대원행 보살은 어려울 때 마다 ‘항상 족할 줄 알고, 참을 줄 알라’는 스님의 그 가르침을 새기며 생활하고 있다.
언제나 인자한 스님이었지만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또한 일본어를 사용하면 야단을 들었다. 일상용어처럼 굳어진 말이라 해도 일본어 사용은 금물. 우리나라 말을 두고 일본어를 쓰면 안 된다는 것.
70세 때 소백산 정상에 학생회와 함께 올랐을 정도로 건강하셨던 스님은 최근까지 법회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스님 건강 비결은 소식과 규칙적인 생활. 새벽예불을 빠지지 않고 참여했으며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법당 참배만은 반드시 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또한 스님은 반 공기 정도의 소식을 했으며 밥 한 숟갈 정도를 덜어놓고 모자란 듯 식사를 하셨다.
시력과 청력도 연세를 의심할 정도로 좋았다. 4-5년 전 서울대학 병원에서 종합 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스님의 청력이 좋지 않을 것으로 지레 짐작, 동행한 대원행 보살에게 스님의 병력과 건강 상태를 질문했다. 그러나 작은 소리로 한 얘기까지 모두 알아듣고 대답을 직접 하시자, 의사는 이상하다며 스님의 건강을 신기하게 여겼다. 검사 결과도 별 다른 이상이 없었다.
칠보사 주변의 어린이 인구가 급격히 줄면서 칠보사 어린이 법회가 없어지자 스님은 늘 그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어린이 법회 당시 인연되었던 보살들의 근황까지 챙겨주시며 안부를 묻곤 했던 석주 스님.
대원행 보살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법명을 직접 지어 주시고 과자를 챙겨주시던 스님이 원적에 드셨다는 것을 아직은 실감하지 못하겠다”며 눈시울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