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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사람이 고요히 잠깐동안 앉아있으면 수승하기가 항하사와 같은 칠보탑을 쌓는 공덕보다 수승하다. 보배탑은 필경에 소멸되어서 가는 티끌이 되거니와 항상 깨끗한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필경에 성불한다”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잠깐 앉아서 입정한 공덕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잠깐 고요히 앉아있는 그 공덕이 칠보를 가지고 항하사와 같은 보탑을 쌓는 공덕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하면 보탑은 필경에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칠보로 가지고 조성한 보탑은 시간이 지나면 그 풍화우세에 마몰이 되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잠깐 앉아 있는 그 깨끗한 마음은 꼭 성불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칠보로 보탑을 쌓은 그공덕보다도 잠깐 앉아있는 그 공덕이 더 수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간을 모두 다 고요하게 안정 하지 못하고 얘기를 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타고난 대로 살아가겠지만 우리가 더 잘 살기위해서 부처님께 와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데에 있어서도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좋은 자리는 서로 다 양보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좋은 자리는 남에게 다 돌려주라 하셨습니다.
제일 나쁜자리에 내가 앉으라 하셨으니 그것이 모두 복을 받을 일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이 본래 법성자리로 보아서 우리 마음에는 본래 오고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허스님이라 하는 유명한 우리나라 스님이 계셨는데 그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억천겁을 지내도 옛날이 아니고 만세를 지낸다 하더라도 항상 이제와 같다’하셨으니 이 자리에는 본래 오고가는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화엄경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생각으로 널리 한량없는 겁을 보나니 보는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다’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삼세(과거·현재·미래)의 일을 요달할 것 같으면 모든 방편을 초월해서 심력을 얻는다’하셨으니 이것은 바로 부처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방편법문이 많습니다. 모두가 다 우리 중생들의 각자 마음이 다르고 기틀이 달라 그 근기에 따라 부처님께서 여러가지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많은 것입니다.
경이라는 것은 이정표와 같은 것입니다. 이를테면 부산 사람들을 위해 서울은 어디로 어디로 해서 간다는 노정을 안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말씀해 놓은 것이 경전입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부처님이될 수 있도록 부처님이 말씀해 놓은 것을 팔만사천 법문이라 합니다. 또 우리 마음 가운데는 팔만사천가지 번뇌가 있다고 합니다. 번뇌라는 것은 마음의 때를 말 합니다. 번뇌를 정확히 말하면 ‘번요뇌란(煩擾惱亂)’이라 합니다. 흔들어서 괴롭히고 어지럽게한다는 뜻입니다. 본래 우리 마음은 다 부처님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보리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보리심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주인공입니다. 우리들의 본 마음입니다. 번뇌라는 것은 손님과 같은 것입니다. 번뇌를 객진번뇌라 합니다.
손 객자 티끌 진자 ‘번뇌’, 이를테면 우리의 가정이나 하숙집 같은데 손님이 오면 며칠 묵다가 일을 다보고 나면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와같아서 객진 번뇌라 하는 것입니다. 손님이 왔다가는것과 마찬가지로 번뇌는 언젠가는 왔다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번뇌는 언젠가는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번뇌만 없어지면 우리들의 본 마음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일컬어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님을 다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뇌는 왔다가는 것과 같고 반면에 우리들의 본 마음은 부처님이라합니다.
보리는 우리들의 주체고 주인공이지만 번뇌라는 것은 잠깐 생겼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여름날 갑자기 검은 구름이 일어나 소나기가 오고 천둥이 치고 하는 현상이 오래 가지 못하고 날이 개이면 맑게 개이는 그런 현상처럼 우리 마음도 그러합니다. 번뇌에 가려서 우리들이 일시적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 보면 우리가 가는 곳은 깨끗하고 구름 한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래를 내려다 보면 하얀 구름이 뒤덮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구름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우리가 털어서 없애 버려야 하는 것 입니다. 선인들이 여기에 비유를 많이 하는데 특히 거울에 비유를 많이합니다.
거울이 있는데 깨끗할 때는 김씨가 오면 김씨를 비춰주고 이씨가 오면 이씨를 비춰주고 무엇이든지 앞에 오는 것은 그대로 다 비춰주는 그런 힘이 거울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울에 먼지가 겹겹이 앉게되면 비춰주는 힘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비춰주던 그 힘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거울에 있는 먼지만 깨끗이 닦아주면 다시 옛날과 같이 모든 것을 다 비춰주게 됩니다. 지금 우리 중생은 모두가 번뇌망상에 가려서 자기 본성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번뇌의 구름이 활짝 개이게되면 우리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님이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되는 것이 제일의 목적입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은 우리들로 하여금 본래 한분씩 모시고 있는 이 부처님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경전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법화경에도 ‘중생들에게 불지견(佛知見)을 보여서 청정함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으며, 불지견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셨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오셨고, 불지견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처님이 이 세상 오신뜻은 불지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왜그런가하면 우리들이 참답게 잘 살기 위해서는 이것을 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시고 있는 부처님을 깨달아야 모든 괴로움을 여의고 윤회에서 해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하는것도 필경에는 그 회향이 부처님 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완전히 생사를 초월해서 대지혜와 대해탈을 통한 대자유를 얻어 마음대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처님을 깨치기 전에는 영원히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자성부처님을 깨
달아야 된다는 것이 법문이고 그것 하나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
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꾸 향상이 되어야 됩니다. 날마다 달라지고 법회 나올 때마다 깨닫는 바가 있어서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향상되고 진취성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 나올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아무런 향상이 없으면 절에 나오나 마나 한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 감에 절대 이웃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요즘 보면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사람도 있고 지존파라 하여 여러 사람의 생명을 위해하는 일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사람죽이길 파리죽이는 것 보다 더 쉽게 압니다. 그래서 요즘 이구동성으로 인간의 본성을 되찾아야 한다고들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부처님입니다.
우리들이 잘못하면 스스로 잘못된 일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과거에 익힌 버릇에 의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하루 반성을 하고 수시로 고쳐 나가야합니다. 그저 우리의 부처님이 시키는대로 하고 부처님이 하지말라는 것은 안해야 됩니다.
우리들의 본성은 다 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몰라 검은 구름이 일어나 해를 가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울 자체에 먼지가 앉아서 그 맑음이 없어지는 것과 같이 이렇게 막혀있기 때문에 좋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으뜸가는 근본교육인 가정교육의 부재 탓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잘 기르게 되면 이런 일이 없습니다.
좋은 어버이 밑에서 자랐다면 그럴수가 없습니다.
자식을 키우는데 애정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책임이 가정에 있습니다. 가정교육은 그 어느 교육 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원만한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자라기만 한다면 절대로 나쁜짓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면 부모님이 걱정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부모님께서 걱정 하실 일을 저지르지 않게 됩니다. 또한 자식에게 효도를 받을려면 부모가 먼저 효도 받을 일을 해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식을 올바로 교육시키며 키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 축원하는 모든 것이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원문을 보면 ‘원컨대 이 법계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다같이 성불하여지이다 ’하는 그런 뜻으로 혼자하는 축원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원효스님 법문에 보면 ‘막지도 않는 천당에는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 이 몸과 망심을 보배로 삼기 때문에 그러하다’하셨습니다.
그런 습관이 있기 때문에 모두 천당에 적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아무도 지옥에 같이 가자고 권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이 몸과 마음이 욕심으로 꽉차서 그것을 자기의 재물로 삼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고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누구나 복을 받고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범망경에보면 ‘좋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다 돌려주고 악한 일은 모두 자기에게 돌리라’하셨습니다.
언제든지 남을 존경해야지 나만 잘 살겠다고 해서는 잘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스님이 되어 처음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에 보면 ‘내가 아니다 하는 그 상이 무너지는 곳에 함이 없는 도가 스스로 일어나고, 무릇 하심하는 자에게는 만가지 복이 모두 날 위해서 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심이라는 공부는 정말 좋은 것이니 참선하고 염불하는 중에도 ‘나다’하는 생각이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심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법문 많이 듣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그저 한마디라도 들어 실행하는 그것이 귀한 것입니다. 너무 많이 들어도 내 마음이 시끄러워 집니다.
법화경의 상불경보살품의 상불경보살은 ‘나는 여러분들을 존경합니다. 당신들이 장차 다 부처님이 되실 분이기 때문에 당신을 존경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네가 무엇인데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돌을 던지고 때렸습니다. 그런데도 멀찍이 물러서서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매를 맞아가면서도 때리는 사람들을 존경한다며 예배를 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데는 반드시 하심을 해야 합니다. 내 몸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해야만 자신도 존경 받을 수 있습니다. 한 걸음이라도 부처님께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복 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약력>
·1909년 3. 4 경북 안동 生
·28년 남전스님은사로 출가
·범어사 대교과졸업
·78·89년 조계종총무원장 역임
·현재 조계종원로회의의원, 중앙승가대 명예학장
·저서 <불교근세백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