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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광고가 있다.
“엄마와 딸이 외식을 나간다. 고급스런 양식당이다. 카드를 나눠 보고 선물을 푸는 모습으로 보아 엄마의 생일이나 그런 특별한 순간인 모양이다. 서양인 요리사가 접시에 불을 붙인다. 멋진 모습에 박수를 치다가 엄마는 문득, 가스 불을 켜 놓고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걱정 마세요’, 딸은 휴대전화로 홈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가스를 차단시킨다. 걱정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순간은 이어진다.”
우연히 어깨 너머로 보게 되었던 광고였지만, 광고를 보는 순간 유비쿼터스라는 말이 우리 사회 안에서 함축하고 있던 의미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의 생일날, 고급 식당에 가서, 서양 요리사의 서빙을 받으면서 외식 한 번 할 수 있는 여유. 쾌적한 환경에서 잠시라도 가족간의 다정한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여유. 그 광고는 그렇게 여유 있는 삶의 모습을 그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여유의 바탕에 유비쿼터스 테크놀로지가 놓여 있었다.
근년에 미국에 다음과 같은 광고가 눈길을 끈 적이 있었다.
“한 사나이가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간다. 덥수룩하니 수염을 길렀고, 투박하고 긴 코트를 걸쳤다. 단정하지 못한 차림새에 두리번거리는 꼴이 범죄자를 연상케 한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밝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진열대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뽑아 코트 품 안에 쑤셔 넣는다. 좌우를 살피는 모습이 천상 좀도둑이다. 가슴이 두툼해진 사나이는 입구를 향해 종종걸음을 친다. ‘선생님’, 건장하게 생긴 경비원이 사나이를 불러 세운다. 사나이는 체념한 듯, 한숨을 몰아 쉰다. ‘영수증 가져 가셔야죠.’ 돌아 보는 사나이에게 경비원이 영수증을 건네주고, 둘은 마주 보며 밝게 웃는다.”
유비쿼터스는 미래의 컴퓨터 환경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나라의 정책이 ‘디지털 혁명’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쓰는 시대가 되었지만, 가전제품이 가진 기능들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현실의 테크놀로지도 모르는데, 미래의 테크놀로지라면 당연히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저 슈퍼마켓의 장면 정도라면 문외한들에게라도 뭔가 손에 잡힐 듯한 설명을 해 주는 것 같다. 물건을 집어 드는 순간, 그리고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계산도 지불도 한꺼번에 자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건과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결들이 있고, 그러한 연결들을 유비쿼터스와 같은 테크놀로지들이 매개하고 있다.
슈퍼마켓의 광고가 유비쿼터스 네트워크를 쉽게 설명해 주듯이, 가스불의 광고도 비슷한 ‘연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결이나, 네크워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슈퍼마켓의 광고가 가스불의 광고 보다는 몇 수는 위라는 생각은 든다. 반면에 가스불의 광고에는 다른 측면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또 다른 유행어, 웰빙에 대한 메시지이다. 유비쿼터스 테크놀로지를 삶의 가치로 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슈퍼마켓의 광고에도 그런 가치는 존재한다. 하지만, 가스불의 가치는 훨씬 직설적이고 강렬하다. 엄마와 딸이 함께 갖는 행복한 순간은 동서고금을 잇는 보편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스불이나 슈퍼마켓 같은 이미지들은 그저 한두 가지 비유를 담고 있을 뿐이다. 사실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의 비유에는 한 가지의 메시지만을 담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스불의 광고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엄마와 딸이 누리는 여유 있는 삶’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들 사이에는 메시지와는 관계없는 서로 다른 의미들이 얽혀 들 수 있다. 그런 의미들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판단이 개입할 수도 있다. 대낮에, 엄마와 딸이라는 두 여성이, 화려한 식당에서 호젓하게 외식을 해야 하는 배경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들의 생활수준은, 신흥 상류사회를 상징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엄마는 낮에도 음식을 불에 올려놓아야 하는, 전업 주부로 보인다. 남자들은 일터에 가 있겠지. 이런 배경이 암시하는 웰빙의 가치들은, ‘엄마와 딸이 함께 누려야 할 행복한 순간’이라는 다른 가치와 상충할 수도 있다. 유비쿼터스 드림관이 추구하는 ‘드림’도 가스불 광고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웰빙의 드림을 이야기하고, 이를 가능하게 해 줄 ‘동력으로서의 유비쿼터스 테크놀로지’를 주장하지만, 아직은 뭔가 어설퍼 보인다. 테크놀로지와 웰빙의 가치가 따로 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말 가운데, 웰빙처럼 이해하기 힘든 말도 없어 보인다. 웰빙이라면, 그냥 잘 산다는 말일 뿐일텐데, 사람들은 이 말을 통해 특정한 행위나 특정한 물건들을 연상한다. 웰빙의 바람은 불교계에도 예외가 없어 보이는데, 예를 들어 웰빙과 녹차를 연결시키는 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차 문화에는 불교의 색채가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녹차가 갖는 이미지 안에는 불교적인 이미지들이 자연스럽게 담긴다. 녹차가 웰빙의 이미지들을 가질 수 있다면, 따라서, 이런 이미지들도 또 자연스럽게 불교가 가진 이미지들과 겹쳐 질 수 있다.
녹차를 매개로한 웰빙의 이미지나 불교의 이미지들 사이에도 모순들이 존재한다. 가치들이 상충한다. 예를 들어, 절에서 의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맑은 물 한 그릇을 불단 위에 올린다. 차가 아니라, 맹물이다. 그리고는 맹물을 올리지만, 감로차로 아시고 드시라는 게송을 읊는다. 간편하다. 하지만, 의식을 마치고 돌아 나와서는 값비싼 차를 즐기는 경우들도 있다. 이미지나 가치들이 얽히는 순간이다. 웰빙의 문화나 불교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은 늘어 가는지 몰라도, 맹물과 감로차 사이의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는 걱정이 든다.
유비쿼터스 웰빙도 마찬가지다. 사실 유비쿼터스의 이미지는 불교에게는 매우 익숙한 것들이다. 유비쿼터스가 연결이나 네트워크를 암시하는 말인 것처럼, 불교는 연기법이라는, 연결의 가르침, 네트워크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억지를 좀 쓰자면, 유비쿼터스의 환경은 그대로가 불국토가 그리는 형상이라고까지 단언을 할 수도 있다.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 불법승
예경문의 한 구절이다. 여기서 ‘광명운대’는 ‘빛으로 짜여진, 구름 같은 누대’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미간의 힌 터럭으로부터 빛을 놓아서 광명운대를 나투니, 다시 그 광명운대 가운데서 부처님들이 빛을 놓아 시방의 보살들을 비추었다고 한다. 화엄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변법계, 법계에 주변하다는 말은, 말의 뜻대로만 해석하자면 그대로 유비쿼터스라는 의미가 된다. ‘언제 어디에나 있다’라는 뜻이다. 그렇게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까닭은 빛으로 짜여진 관계의 네트워크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를 제쳐 놓고, 비유나 상징으로만 따지자면, 가스 불이나 슈퍼마켓은 오히려 시시해 보인다. 경전 안에는 이와 비슷한 비유나 상징들이 넘쳐난다. 모든 존재, 모든 생명체들이 이미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연기의 네트워크, 관계의 네트워크의 일부일 뿐이라는 비유들이다.
그래서, 저 예경문은 ‘자타일시 성불도’라는 서원으로 마감을 한다. 우리나라의 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의식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생일불공이던, 입시불공이던, 사업성취를 바라던, 학업성취를 기원하던, 의식의 끝은 오직 이것일 뿐이다. 차 한 잔, 사실은 맹물 한 그릇을 올리는 까닭도 이것이다. 불교적인 웰빙, 그 마지막 목적지,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유비쿼터스의 웰빙을 짐작하게 해 주는 물 한 그릇이다.
유비쿼터스와 웰빙, 오늘의 한국을 읽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단어들이다. 연결의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삶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겠다. 한국에 가스 불이 있고, 미국에 슈퍼마켓이 있다면, 한국불교에는 맹물 한 그릇과 광명운대가 있다. 비슷한 일을 비슷하게 상징하는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이미지들은 이미지들일 뿐이다. 이미지 한 두 개로, 세상이나 삶의 가치를 한 칼에 모두 재단해 낼 수 없다. 그렇긴 해도, 한두 가지, 그런 이미지들이 세상이나 인간을 읽는 신선한 지혜를 자극하기도 하는 것 같다. 마크 와이저도 예언했듯이, 유비쿼터스 컴퓨팅은, 컴퓨터만의 문제가 아니다. 컴퓨터 환경이 바로 삶의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웰빙의 환경이고, 거기에는 가치들이 개입한다. 테크놀로지에도 지혜들이 필요하다는 뜻이겠다. 일테면, 맹물 한 그릇이나 광명운대의 이미지들이 자극하는 지혜 같은 것 말이다.
유비쿼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은 1988년 미국, 제록스 파크(PARC) 연구소의 마크 와이저(Mark Weiser)가 처음으로 제안했던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 환경이다. 그는 미래의 이상적인 컴퓨터 환경은 컴퓨터가 삶의 환경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어, 눈에 보이지도, 의식할 수도 없어야 한다고 보았다. 유비쿼터스는 어디에나 편재한다는 뜻으로, 공기와 같은, 어디에나 있는 것들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디에나 편재한다’ 는 말처럼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신비적, 마술적 의미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마크 와이저는 이 말을 단순한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영역에 국한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컴퓨터 환경, 그런 환경이 배후에서 작용하는 삶의 환경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일본의 노무라연구소에서는 급변하는 네트워크 기술을 기반으로, ‘유비쿼터스 네트워크’라는 보다 실용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이런 시도는 ‘e-Japan’이라는 국가비전을 넘어 ‘u-Japan’이라는 새로운 비전으로 발전을 했고, 이런 비전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의 ‘u-Korea’ 정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u-Korea’ 정책은 유비쿼터스 컴퓨팅이라는 표현을 ‘모든 사물이 지능화되고 네트워크화 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람, 나아가 사물과 사물 간에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 이에 따라 개인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기업의 생산성이 증대되는 사회’라고 규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