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는 삼국의 문화가 무르익을 때라 중국과의 교류가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과 도교에까지 퍼져서 우리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는 수당의 연속된 침입으로 연개소문이 집권하여 대외적인 방면에 국력을 쏟고 백제와 신라도 대외적 교류에 힘을 기울였다. 당 왕조의 건국으로 중국과의 왕래도 활발해지고 문물의 수입이 잦아졌으며 일본과의 왕래도 많았다. 특히 고구려 승려 담징이 도일(渡日)해 법륭사의 금당벽화를 그렸고 백제의 기술자들이 사찰을 건립하는 등 불교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김춘추가 직접 다녀올 정도로 일본은 삼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니 우리의 다풍(茶風)이 저들에게 전해졌다. 신라의 불교는 더욱 융성해 사찰, 불상 건립에 따라 차의 파종과 전파가 확대되는 시기였다.
① 백제는 전 해에 수덕사 금산사를 창건했고 고구려는 이문직에게 <신집>을 편찬게 했으며 신라는 원광법사가 수에서 돌아왔다.
② 담징은 채화에 능숙해 법륭사의금당벽화를 그려 경주 석굴암과 중국의 운강석불과 함께 동양 삼대 미술품을 남겼다.
③ 원효가 그곳에 기거하니 사포성인(蛇包聖人)이 석간수로 차를 올렸다.
④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당에서 돌아온 대렴이 차를 지리산에 심은 것이 처음이 아니고, 차는 원래 선덕여왕 때도 있었다고 했다.
⑤ 이때까지는 선승들에 의해서 교류가 주로 이루어졌으나 유학자들도 입당하는 많아졌고, 그들 사이에서도 차생활이 보편화됐다.
⑥ 자장율사가 당에서 돌아와 통도사에 차를 심었다.
⑦ 서적은 태종에게 ‘이(李)’로 사성을 받았으며 후에 <신수본초(新修本草)>를 남겼다.
⑧ 수의 문제가 머리가 아팠는데 차를 끓여 마셨더니 좋아져서 전국에 차 장려책을 썼다.
⑨ 최초로 차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중국 남방 40여 개 주 군 현이 차를 생산하고 그 무역의 양이 막대했으므로 나라에서 통괄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
599 수덕사, 금산사 창건
600 <신집(新集)> 편찬 ①
원광법사 수에서 돌아옴
도리(고구려)가 일본 원흥사 불상 주조
602 승려 지명(智明)이 수에서 귀국(신라)
604 승려 담육(曇育)이 수에서 귀국(신라)
610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가다(고구려) ②
612 살수대첩(을지문덕)
620 백제와 신라가 당에 조공
622 일본에 불상, 금탑을 보냄(신라)
633 내소사 건립
634 분황사 창건, 영묘사 건립(신라)
635 원효방 ③
@ 선덕여왕 때 차를 많이 마셨다 ④
636 자장 율사의 입당
640 삼국의 자제들이 입당하여 국학에서 배우기를 청하다 ⑤
642 연개소문의 집권
643 통도사에 차를 심다 ⑥
기림사 창건
645 황룡사 탑 건립
647 김춘추가 일본에 다녀오다
648 김인문의 입당
<중국>
594 서적 ⑦
600 문제의 차 장려책 ⑧
612 수양제 고구려 침공
618 수의 멸망
당의 건국
624 균전제, 조용제 실시
626 당태종 즉위
@ 현장 스님 인도로 가다
644 고구려 친정(태종)
646 다법(茶法) 제정 ⑨
<일본>
602 백제 승려 관륵이 오다(달력, 천문, 지리)
604 17조의 법 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