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 종합 > 기획·연재
"글로벌 시대 원효를 벤치마킹 하자"
한국불교 자생력 강화, 수출하는 길은 없을까?
사람들이 새 불교를 애타게 찾고 있다. 한국불교가 대중들의 달라진 수요에 당혹해 있는 사이에, 수입불교가 어느새 깊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추세는 더욱 가속화해 나갈 것이다. 화두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조계종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빠사나를 포함한 대안적 수련이 활발해졌고, 달라이 라마를 포함한 이방의 선지식들의 책이, 지독한 불황이라는 불교출판계의 신음소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테디셀러를 기록하고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혁신적 전환의 노력이 없으면 한국불교는 가람터의 외형만 남을지도 모른다. 이 위기를 다들 알고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한국불교가 자생력을 강화하고, 그것을 국제적으로 수출까지 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척판암(擲板庵)의 전설처럼, 중국의 쟁쟁한 수도승들이 불교를 배우러 해동을 찾고, 전 세계에 한국불교의 원음이 퍼지게 할 수는 없을까. 이 글은 그 지혜를 얻기 위해, 한국불교가 가장 큰 생명력을 떨쳤던 때, 그리고 원효의 학문이 국제적으로 공인받고 전파되던 호시절을 한번 벤치마킹 해보자는 것이다. 그 성공의 비밀을 분명히 알면, 한국불교의 활로가 보인다. 틀림없다.
원효 성사 진영.


원효는 생존때부터 이미 극단적 비난 아니면 극단적 존숭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아홉명의 제자가 있었다고는 하나, 계승 발전은커녕 그들의 이름조차 묻혀버렸고, 급기야 고려 때 의천은 원효가 더 이상 당대의 자원으로 이해되거나 활용되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마명이나 용수라야 겨우 따라잡을 원효의 위대한 학문을, 지금 무식하고 게으른 자들이, 안타깝게도 이웃집 아저씨 보듯 지나치는구나.(著論宗經闡大猷, 馬龍功業是其 , 如今惰學都無識, 還似東家有孔子).”

원효가 잊혀진 이유는 둘이다.
첫째, 저술의 난해함: 그가 쓴 글을 해독하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누구도 원효가 섭렵한 해박함과 그의 해석의 독창성을 따라잡기 힘들다. 더구나 그 저술들은 주석이라는 간접적 형태로, 그것도 수없이 많은 종류 속에 흩어놓았기에, 그의 사유의 핵심(종요)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둘째, 삶의 불기(不羈): 그가 잊혀진 근본 이유는 그의 삶의 행적이 불교 안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송고승전>의 저자 찬녕은 그를 두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都無定檢)’이라고 평했다. “시정잡배들과 술집과 창기집에 드나드는 사람. 화엄의 이치를 근엄하게 강의하다가도, 신성한 절집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 여염집에 빌붙어 지내는가 싶더니, 깊은 산속에서 좌선에 들어있는 이 사람,”

그것도 모자라 불교의 최후 보루인 금욕의 계를 깨고, 요석궁의 공주와 동침하더니 자식까지 낳고 산데 이르러서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이 앞에서 사람들은 막막해하거나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그를 이야기와 신화 속에 가두고는 그만 편안해 한다. 일반인들은 요석궁의 로맨스를 가십삼고, 학자들은 그의 주소(註疏) 가운데 한 둘을 붙들고 ‘자기가 본 바가 바로 원효’라고 악착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불교 사상은 그의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바, 그의 파천황이야말로 원효를 원효답게 하는 진정성이면서 또한 미래 한국불교의 세계적 자원이기도 하다. 왜 잎을 따면서 줄기는 놓치려 하는가.

원효는, 불교가 인도, 중국, 한국, 일본, 중앙아시아를 포괄하는 국제적 경쟁을 하고 있던 시절,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며 해동에 불교가 있음을 알렸던 선구이다. 그의 성공의 비결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개략 다섯으로 정리한다.
1) 자부심- “나는 이렇게 보았다.”
그는 스스로를 ‘인류의 새벽’이라고 외쳤다. 원효의 과잉된 자의식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한다. 원효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것에 집착하고 있을 때, 그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는 것은 자찬훼타(自讚毁他)가 아니라 자비심의 발로”라고 썼다. 이만한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는 스스로 본 바가 뚜렷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원효에게서 배울 근본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불교 또한 무분별만 찾는 그 거대한 블랙홀의 무기력을 타파해야 희망이 있다. 불교 안팎의 문제를 절실하게 고민하고, 그 문제에 대해서 나름의 지견(知見)들을 활발하게 소통하지 않으면 불교의 회생을 기대하기 어렵다.

2) 독창성- “만인도 대적할 수 없는 사람.”
그는 스승의 학설을 맹종하지 않았고, 한 문호를 권위로 내세우지 않았다. “스승들을 좇아 배우기는 했지만, 자유롭게 매이지 않고 노닐었다(隨師稟業 遊處無恒).” 그 독립심의 가장 극명한 사례는 불교선진국이라는 당나라로의 유학을 포기한 일일 것이다. 현장의 신 유식(唯識)을 배우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무덤 속의 해골물을 마시고는, 불교의 비밀을 깨닫고는 배낭을 수습해 발길을 돌렸다. 유학을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원효가 있게 되었다! “모든 비밀은 내 마음(一心)에 있으니 다시 또 무엇을 구할 것인가(心外無法, 胡用別求).”

10여년이 지난 후 원효는 <판비량론>을 써서, 현장 유식의 오류와 부족함을 ‘웃으면서’ 비판하는 여유까지 갖게 되었다. 모방이 아닌 독자적 상품이 있어야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지금 한국 불교에는 필요한 자원이 ‘이미’ 다 있다. 팔만의 장경이 있고, 원효 이래의 유구한 선교(禪敎)의 전통이 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탈이다. 그런데 무엇이 더 부족해서 다시금 팔리나 산스크리트 원전에 조회하고 그것을 권위로 모시려고 헉헉대는가.
시급한 일은 ‘지금 있는 이 불교’ 자원을 ‘사유’와 ‘체험’을 통해 삶과 접목시키려는 노력이다.

3) 박식함- “불교뿐만 아니라 참서(讖書)와 외서(外書)까지 보라.”
그는 불경만이 아니라, 노장과 참위를 포함한 당시의 문학과 철학을 가리지 않고 섭렵했다. 그 흔적은 그가 쓴 글의 문학적 향기와 독창적 표현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화엄경소>와 <기신론소> ‘별기’ 등에는 특히 노장의 비유와 어법이 즐겨 그리고 적절히 원용되고 있는데, 이는 노장이 불교의 진리 밖에 있지 않다는 통찰의 결과이다. 지금 한국불교 또한 불교밖의 상식을 넓히고, 이방의 사고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운신이 편협해지지 않고, 또 다른 사고와 더불어 화해하면서 더욱 많은 청중에게 불교를 설득할 수 있다.
요컨대 한국불교가 국제화하려면 ‘불교’라는 이름표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가는 화쟁(和諍)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4) 관용성- “모든 것이 불교이고, 또 모든 것이 불교가 아니다.”
비난과 자기고착은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자기가 제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발로이다. 원효는 당대에 들어와 있던 모든 사유와 문헌을 섭렵하고, 그 모든 것이 ‘도구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깨인 눈으로 보면, 불교 아닌 것이 없다.
소승도 대승도, 선도 정토도 다 불교의 노파심의 발로이다. 다만 근기에 따라 상황과 풍토에 따라, 보다 유효하냐 덜 유효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작은 시내들은 불법의 큰 바다에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얕고 자잘한 가르침들도 내버려서는 안된다(淺近敎門 亦不可已之耳."
그런데, 지금 한국 불교는 여직 편협하게 ‘정체성’과 ‘정통성’을 고집하고 있다. 교학을 버리고 선을 오로지 하며, 선 가운데서도 화두선만이 유일하고 정통적이라고 악착하고 있다. 이렇게 쪼잔한 국량, 빈약한 상품으로는 현대인들의 다양한 요구에 적절히 응답할 수 없고, 더구나 세계 시장에서 한국불교의 우위를 점할 수는 더더욱 없다.

5) 삶을 위한 불교- “불교를 살기 위해서는 불교를 버려야 한다.”
이 대목이 가장 어렵다. 원효가 가장 독창적인 것도 바로 여기이고, 후세 불교가 가장 두려워했던 자리도 바로 여기이다. 아들 설총이 “어떻게 살아야합니까”라고 묻자 원효는 “불교(法)를 버려라”고 충고했다. 무덤에서 마신 해골물은 그에게 더 이상 불교의 조언이 필요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불교는 방편적으로는 존중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졸업해야 할 물건이다. 이 돈교(頓敎)의 가르침을 익히 들었겠지만, 거기 원만(圓滿)하게 철저했던 사람은 없다. 원효만이 그렇게 했다. 자신의 삶을 놓치고 불교에 매여 산 사람은 얼마나 많았던가. <금강경>이 그렇게 경계하는데도, 뗏목을 지고 다닌 사람은 얼마나 많았던가.
원효는 불교라는 가르침에 기생하고 있는 기존 교단과 이른바 고승대덕들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질타했다. “사자 속 벌레같은 자들, 불교에 기생하면서, 결국은 불교를 갉아먹고 무너뜨리는 자들이여!”
이것이 원효를 벤치마킹한 개략이다. 배울 수 있을까. 이 다섯을 다 장악해야 희망이 있다. 그런데 하나도 쉽지 않다. 어떤 것은 배우고 싶으나 힘이 딸리고, 어떤 것은 두려워서 나아가지 못한다. 무능과 두려움으로 하여 원효는 마침내 금기가 되었고 신화로 박제화되었다. 그 금기와 신화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원효의 자부대로, 그의 학문과 삶은 인류의 질병을 구하는 아가타 영약이니 두려워 말고 다들 구해서 마셔야 한다.

그 약을 어떻게 개발하고 또 어떻게 수출할 것인가. 원효가 갔던 길을 다시 요약해 보면 이렇다.
1) ‘머리에 난 종기’를 치유하겠다는 큰 발심으로, 처음에는 2) ‘불교의 교설’을 향해 용감하게 돌진하며(勇擊義圍) 3) 그 이해를 독창적으로 표현하며(雄橫文陣),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 장악의 끝에서 불교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찾으며(無碍), 나아가 그 자유를 자비로 회향하여 대중들과 더불어 호흡하고 그들의 어둠을 깨워 나가는(饒益) 길이다.
그렇게 새로 올 파이어니어(pioneer)가 한국불교를 살리고, 그 공덕을 세계적으로 회향할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너무 늦기전에.
한형조(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
2004-11-11 오전 10:59: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11.2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