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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성 심장병. 한국화가 오산 홍성모(45) 씨에겐 지울 수 없는 생의 무게였다. 병도 서러웠지만 그것을 다스릴 수 없는 가난은 그를 더욱더 옥죄였다. 그래서 ‘죽기 위한 노력’을 쉼없이 감행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그때의 ‘그날’이 없었더라면 세상의 영원한 그늘이 되었을지 모르는 일.
“그 날이요? 돈이 없어 하루하루 병을 키우고 있는 못난 몸을 위해 친구들이 수술비 모금 운동을 벌이던 날이죠. 부끄러운 사연은 대학 학보에 소개됐고, 그 작은 정성이 모여 저는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심장수술을 받게 된 거예요. 그리곤 다시 태어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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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씨가 ‘그림 그리는 약사여래’의 원을 세운 것은 원광대학교를 졸업하던 1986년 그 해부터다. 세상의 멍든 심장, 뒤틀린 고동소리는 영원히 그의 심장에 묻기로 결심하고 “50명의 생명을 소생시키지 않고서는 작가라 이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자신의 호를 딴 ‘오산심장사랑협회’를 만들어 형편이 여의치 않은 아이들에게 무료 검진을 주선해왔고, 벌써 20년째 생활비를 쪼개 심장수술비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뜻좋고 걸림없는 무주상보시였건만 전셋방을 전전하던 홍 씨에게는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일이었다.
“작은 수술일지라도 당시 돈으로 최소 3백만 원 이상은 들어야 했으니 쉽게 모을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죠. 힘든 수술은 1천만 원이 넘었고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도 일년에 두 아이의 수술비는 장만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상태였습니다. 제게 무슨 돈이 있었겠습니까. 제 그림이 곧 생명이자 대안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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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끊임없이 붓을 들었다. 화선지 결 따라 번져 나가는 먹의 흐름에 그의 ‘현재’를 오롯이 실었다. 붓끝에 나를 싣는 이 순간만큼은 ‘예술’도 없었고 ‘봉사’도 없었다. 먹으로 옅은 물감으로 그저 함이 없이 산수를 노래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작품을 들여다보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헤매던 기억이 생사를 초월한 산천경개 앞에서 소리 없이 녹아내렸다. 누군가의 치유에 힘이 돼야할 그림을 마주하며 그는 그렇게 기운을 모았다.
그 그림이 뜻깊은 수술비로 화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전시회라도 여는 해에는 유동적일지언정 어느 정도의 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3년의 세월을 두고 400~500점을 그려야 전시회를 준비할 수 있었기에 수술비에 대한 그의 고충은 엄청났다.
결국 그는 직접 작품을 들고 거리로 나서 손수 그림을 팔았다. 작품 하나를 팔기도 쉽지 않았지만 헐떡이는 심장에 새 생명을 입히는 과정이라 생각했기에 개의치 않았다. 자기인지 봉사인지 하나를 택하라며 아내는 괴로워했지만, 생활비에 앞서 수술비를 걱정하며 그 험한 세월을 꿋꿋이도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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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한다’ ‘안한다’는 생각도 없어요. 제가 그리는 자연이 그 자리에서 소리없이 제 역할을 다하듯, 시절인연이 맞을 때를 기다려 제 힘을 쏟아부을 뿐이죠.”
얼마 전 서원했던 50명의 수술을 마쳤다. 20년의 세월을 기다려 목표달성을 이뤘지만 홍성모 씨는 여전히 51번째 아이의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그에겐 목표를 이루었다는 기쁨도 앞으로의 봉사를 기획하는 당찬 다짐도 없다. 수술 이후에 도움받은 아이와 연락을 취하는 일도 극히 드물다. 아픔에 가리워진 본디 밝은 마음을 되찾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의 어두운 과거에 작은 빛으로 잠시 머물다 갈 뿐이었다.
홍성모 씨는 이제 한국의 사계를 화폭에 옮기려고 한단다. 늘 변화하고 있지만 그 본디 아름다움에는 흠이 없는 한국의 사계. 그 풍광에 다시금 보살의 서원을 녹이려는 그의 발걸음이 또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