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찰 하나만 있어도 주위가 확 달라진다.’ 단순한 기도 공간에서 복지의 중심, 개인의 행복을 책임지는 공간으로 변모된 사찰은 지역의 변화를 선도하며 시대를 한걸음 앞서 나가고 있다.
불교가 있어 개인의 삶이 행복해지고, 사찰이 있어 지역이 발전한다는 등식을 성립시키기 위한 사찰들의 노력은 거창과 합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해인총림 발전과 교구발전을 위한 토론회’라는 고민과 연구의 자리까지 마련해 시도되고 있는 해인사 변화의 바람과 비구니 스님들의 참신한 사고와 실천이 변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거창 불교의 변화는 한국불교의 밝은 미래를 내다보게 했다.
거창
크게 일어날 밝은 곳, 매우 넓은 들, 넓은 벌판, 즉 넓고 큰 밝은 들이란 뜻에서 거열(居烈), 거타(居陀), 아림(娥林)으로 불리어 온 거창. 거창엔 아름다운 고찰이 많다.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 3대 국립공원의 중심지인 거창은 지리적 특성에 걸맞게 아름다운 산자락마다 절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원효, 의상 대사가 창건한 절이 곳곳에서 불법을 전하고 있는 거창은 시대를 반영하는 불교를 가꾸기 위한 ‘씨 뿌리기’에 한창이다. 아직 결실을 맺기엔 이른 시점이지만 거창 지역 사찰들의 내실을 다져온 포교역량이 조금씩 발휘되고 있다.
거창 불교의 중심은 해인사 거창포교당인 심우사. 거창읍 중심에 위치한 심우사는 1935년 창건된 포교도량으로 포교당의 본분을 다하고 있다. 언제나 열려 있는 기도공간이자 수행공간이 되어온 심우사는 불교교양대학을 개설해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첫 수강생이 150명을 넘어설 정도.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동문들을 중심으로 거창 불교를 꾸려가는 일꾼들이 대거 배출되기 시작했고 거창 불교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학생들과 지역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는 심우사 휴식 공간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소. 헬스기구, 포켓볼 당구대, 탁구대를 갖추고 개방된 이곳은 자연스럽게 포교 공간이 됐다. 특히 교사들이 지도하고 있는 초,중,고등학생을 위한 공부방은 지역 학생들이 서로 참여하려고 할 정도로 청소년들의 학업문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컴퓨터 10여 대를 갖춘 컴퓨터실도 PC방으로 몰리는 청소년들의 발걸음을 사찰로 향하게 하며 인기 만점이다.
군부대 포교, 경찰서 포교도 도맡고 있다. 조그만 법당만을 갖추고 제대로 된 법회조차 없던 군부대 장병들을 위해 매주 일요일마다 법회를 열기 시작해 현재는 20여명의 장병들이 심우사를 찾는다. 이 밖에도 심우사가 중심이 됐던 유치인 면회 법회는 거창사암연합회 전체 사업으로 확대시켜 거창 지역 사찰들의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정토사는 거창 지역 어린이 포교의 메카로 통한다. 혜연 스님의 원력으로 20년 전 시작된 법회에는 정토사 어린이법회 출신들이 법회 지도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농촌 사정에도 2박 3일로 진행되는 여름불교학교에는 70-80명의 어린이들이 참여할 정도이며 1박 2일로 일정이 줄어들자, 아이들의 항의가 빗발쳐 3박 4일로 다시 조정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또한 8년 전부터 이어온 사경법회도 정토사의 자랑거리. 매주 금요일마다 사경법회를 열고 그것을 책으로 엮어오길 8년. 사경법회 회원들은 금강경, 법화경, 천수경 등 웬만한 경전은 한차례이상 사경을 했을 정도로 사경을 통해 신심을 다지고 있다. 일년간의 사경책자를 전시하는 초파일 사경전시회는 정토사 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행사로 손자들이 할머니가 사경한 책 앞에 꽃을 받치는 아름다운 풍경이 연출된다. 거사회 창립, 시민선방 운영 등을 과제로 안고 있는 정토사는 거창의 미래가 될, 어린 불심을 키우는 ‘거창불교의 밭’인 셈이다.
전체높이 3.7m, 불상높이 2.75m의 화강석제 불상인 보물 377호 거창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으로 유명한 금용사는 마을 주민들의 정신적 귀의처로 각광받고 있다. 그동안 도량을 잘 가꾸고 석조여래입상 주위에 잔디를 심어 보호해온 주지 준용스님은 석조여래입상의 마모와 파손을 막기 위해 보호각 설치를 계획 중이다. 또한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송계사와 고견사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과 기도객으로 붐비고 있다.
거창에 뿌려진 불교의 씨앗이 알찬 결실을 맺기 위해 남겨진 과제로 청년 불자들의 힘 결집과 거창 지역 전체 신도회 창립을 꼽는다. 거창 불교의 ‘허리’ 역할을 할 청년들과 거사들의 힘이 모이면 크고 넓은 불교의 시대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
합천
합천 하면 곧바로 해인사라는 단어가 따라 붙을 정도로 ‘해인사’를 빼고 합천 불교를 이야기할 수 없다. 사시사철 250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고 있는 해인사는 한국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총림으로 지정됐다.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법보종찰로 근대 한국불교의 상징인 성철 스님이 주석하면서 더욱 관심을 모아왔다.
탄탄한 역사의 기반위에 시대에 걸 맞는 불교적 위상을 찾기 위한 노력은 해인사자비원을 중심으로 복지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 뿐만 아니라 주 5일제 근무에 따른 발 빠른 변화로 해인사 주말 수련회를 열어 분주한 일상을 벗어나 자신을 성찰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최근 해인 총림 발전과 해인사 교구 발전을 위한 제반 상황과 포교, 수행, 교육, 문화사업 분야의 제언을 모집하고 있는 해인사는 내부적인 조직 체계화와 해인사 장기 계획수립 등을 위한 업무 분담을 확고하게 하며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합천 불교는 교구본사가 있는 지역은 상대적으로 지역불교가 위축된다는 속설을 깨지 못하고 있다. 합천불교사암연합회가 오래전부터 결성돼 활동하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상태. 그러나 지역민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간과할 수는 없는 포교 활동을 이어온 지역 사찰들의 활동은 돋보인다. 합천읍의 맏형격인 연호사는 청소년 포교를 위한 노력을 꾸준히 펼쳐왔다. 초,중,고등 학생들을 위한 전국문화유적답사, 영화 상영시설, 다도실, 독서실 등을 갖춘 청소년문화의 집을 운영한 경험을 살려 지역 청소년들에게 명상과 문화혜택의 기회를 주는 청소년 쉼터 건립을 발원하고 있기도 하다. 자원봉사단을 중심으로 원폭 피해자 복지회관, 보육원, 어린이 보육시설, 노인복지 시설 등에서 꾸준히 봉사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합천읍 뿐 아니라 합천군에서도 기도객들이 찾아오는 용흥사도 주목된다. 연호사 신도였던 보살들이 주축이 돼, 기도처로 건립된 용흥사는 보살들이 탁발로 불사금을 모으고 기왓장을 옮기며 세운 도량. 이후 묘관 스님이 불사를 추진해 도량 면모를 일신한 용흥사는 합천제일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히며 대를 이어 다니는 신도들이 많다.
최근 해인사 신임 주지로 현응 스님이 부임하면서 해인사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11월 7일 ‘열린 해인사’를 표방하며 ‘해인총림 및 교구발전을 위한 첫 토론회’를 개최해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합천 지역 전체가 꿈틀대고 있다. 제 12교구 본사 해인사의 변화는 곧 한국불교의 변화로 직결되며 합천 지역 불교 발전에도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합천 팔경 연호사 함벽루
'안개 낀 호숫가에 있는 절' 이름만큼이나 운치있는 절이 연호사(煙湖寺)다. 황강변 남정 석벽에 위치한 연호사는 삼국통일의 계기가 되었던 대야성 전투의 역사가 서린 곳으로 합천 팔경 중 4경인 함벽루가 있어 그 운치를 더한다.
황강 정양호를 바라보는 수려한 풍광으로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읊었다는 함벽루엔 이황, 조식, 송시열 선생 등의 글이 누각내부에 현판으로 걸려 있고 누각 뒷면 큰 바위에 우암 송시열 선생 친필인 함벽루(涵碧樓)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각지붕의 2층 누각인 함벽루의 주된 활용 공간은 2층 누마루. 누각처마의 물이 황강에 떨어지는 배치가 돋보이는 이곳에서 동서로 유유히 흐르는 황강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특별하다.
함벽루(涵碧樓) - 남명 조식 선생의 시(詩)
喪非南郭子 남곽자 같은 무아지경에 이르지 못해도
江水渺無知 흐르는 강물만 멍하니 바라본다.
欲學浮雲事 뜬구름의 일을 배우고자 하나
高風猶破之 높다란 바람이 흩어 버리네.
선용 스님
거창 아림사 회주
거창 지역 포교활동만 26년째. 침체돼 있던 거창불교에 활기를 불어넣어 거창불교의 전성기를 만든 장본인이다. 81년부터 97년까지 거창포교당 주지를 맡으며 소풍 법회를 열고 만화책을 빌려놓기도 하는 등 어린이법회 활성화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학생회, 청년회, 거사림회 활성화도 이끌어 현재 거창불교를 이끄는 인재들 대부분은 스님이 키운 셈. 저소득층 학생을 위한 공부방, 군부대 위문, 불우이웃돕기 등으로 불교의 대사회적 활동에도 앞장서왔다.
지금도 화장실 청소를 손수하며 행으로 후학들을 이끄는 스님은 총무원 호법국장, 총무원장 대행을 비롯 해인사 재무, 포교, 총무 등을 역임하며 종단 발전에도 큰 몫을 해왔다.
심우 스님
해인사 거창포교당 심우사 주지
거창사암연 회장
2001년 초파일을 열흘 앞두고 거창 포교당으로 부임하자마자 등을 사고 연극협회에 가서 전선을 빌려 거창 시내 전역에 연등부터 밝혔다. 또한 불교합창단이 없어 행사 때마다 어려움을 겪자 불교대학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찬불가를 가르쳐 합창단으로 활동하게 했다.
경승도 혼자뿐이고 군 법당 법회도 혼자 도맡아해야 했지만 일을 하면 화끈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지금도 거창신도회 창립, 거창 청년회 재 창립 등에 온 마음을 쏟고 있다. 특히 거창공무원불자회 창립을 위해서는 열 번이나 찾아가 설득을 거듭했을 정도. 종단의 상임감찰, 문화국장, 조사국장 등을 맡으며 뛰어난 일솜씨를 인정받고 있는 스님은 해인사 호법국장 소임도 겸하고 있다.
정안 스님
거창 고견사 주지
생활에 직접 도움이 되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는 게 스님의 지론. 스님은 실천이 용이하고 쉬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불교교양대학 수업을 빠뜨리지 않는다. 단 1명이 오더라도 3개월간은 이어갈 생각. 아미타경을 교재로 진행되고 있는 이 수업은 아미타경을 독송하고 그 내용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스님의 설법을 통해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고 스님은 특별히 무엇을 가르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같이 이야기하고 대화하는 사람으로서 함께 공부할 뿐이라는 것.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그 속에서 진리를 실천하며 살고 있기에 서로 서로 배우고 탁마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종성 스님
합천 홍제암 감원
합천사암연 회장
사암연 결성 당시부터 회장을 맡아온 스님은 뜻한 만큼 포교 활성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자기반성부터 앞세웠다. 그만큼 합천 불교에 대한 애착도 컸고 노력도 각별했다는 반증이다. 처음 33개였던 회원사찰이 9개로 줄어드는 변화를 겪는 동안, 합천 불교 활성화를 위한 일이라면 제등행렬, 선지식 초청법회, 국악인 초청 공연, 성지순례, 유등제 등을 열며 노력을 기울여왔다.
40여 년간 해인사에서 살아온 스님은 ‘해인사의 살아 있는 역사’로 통한다. 73년부터 스님이 몸담고 살고 있는 홍제암엔 꽃을 좋아하는 스님이 손수 가꾼 국화 향기가 그윽하다.
능도 스님
합천 연호사 주지
주지가 너무 자주 바뀌어 어려움을 겪었던 연호사에 10년째 살고 있다. 그동안 기둥만 빼고 모든 당우를 개보수 했고, 도시에 비해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해 청소년회관도 운영했다. 사암연 총무를 맡아 황강 축제에 맞춰 유등제를 열었고, 자원봉사단을 꾸려 노인, 어린이 시설에서 청소, 목욕, 이미용 봉사 활동도 펼쳐왔다.
영화, 음악 등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스님은 해인사 편집위원을 지냈고, 해인사 사회국장 당시, 팔만대장경 이운경로를 기획, 많은 대중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현재는 해인사 기획국장을 맡아 본사의 발전을 위해서도 마음을 쏟고 있다.
묘관 스님
합천 용흥사 주지
79년부터 용흥사와 인연이 닿았던 스님은 15년째 불사를 진행해 지금의 용흥사를 있게 한 장본인. 작은 법당뿐이던 용흥사는 이제 극락전, 대웅전, 요사채, 칠성각을 갖추고 합천 시내의 대표적인 기도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불사와 기도뿐인 스님’으로 통하는 스님은 약수암 안거를 빠뜨리지 않으며 젊은 스님들과 나란히 정진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합천 사암연 통장을 직접 관리하며 합천불교 발전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있어 후학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스님은 “미래불교의 발전을 위해 불교계 어린이집을 운영해야한다”며 상좌들의 분발을 은근히 독려하고 있었다.
정우 스님
거창 송계사 주지
가을이 깊어가는 산사에서 스님은 감을 깎고 있었다. 수정과를 담아 찾아오는 이들을 대접하기 위해서란다. 산에서 나는 당귀, 오디 등으로 차를 만들어 따뜻한 차를 권하기도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송계사에 온 사람들은 호박을 한 덩이씩 안고 돌아갔다니 자연에서 수확한 것들을 나누는 스님의 일상 가운데 불법의 가르침이 스며있다. 이처럼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스님의 마음을 겪어온 사람들은 농작물을 수확하면 제일 먼저 절에 공양 올린다.
“들판의 주인은 풀과 꽃이고 우리는 객일 뿐”이라며 웃음 짓는 스님. 산사의 가을은 무, 배추, 고추 등을 자급자족 하느라 늘 일손이 모자라고 하루해는 짧기만 하다.
수현 스님
거창 정토사 주지
스님은 “사찰 주지를 하는 한 포교를 해야 한다”는 은사 혜연 스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자 노력 중이다. 20년 전부터 열어온 어린이 법회에 필요한 봉고차 운전을 위해 60세를 바라보는 은사 스님부터 정토사의 5명 스님 모두가 1종 면허증 소지자일 정도로 어린이 포교에 각별한 정성을 쏟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찬불가를 가르칠 교사가 없자, 스님이 직접 피아노 학원에 다녔고 결국 그 학원 선생님을 어린이법회 교사로 만들었을 정도.
“포교는 절정에 달해 이제 수행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진단한 스님은 직접적인 수행 체험, 신심을 바탕으로 한 수행이 뒤따라야 포교에 내실을 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준용 스님
거창 금용사 주지
절 문이 따로 없어 동네의 절이 되어버린 금용사. 스님은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마을 주민들을 반가이 맞이하고, 동지나 명절이 되면 팥죽과 떡국을 끓여서 가부면, 딸기집하장, 노인정, 목재소, 경찰서마다 들고 찾아 나선다. 스님의 이런 노력으로 금용사는 아이들에겐 둘도 없는 놀이터요 동네 분들에겐 마음의 위안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스님은 불교만을 강요하진 않는다. 스님의 열린 가르침을 접해왔던 동네 할머니가 절을 독사소굴로 비유한 한 목사님을 향해 항의를 했을 정도. 넉넉하고 열린 마음으로 동네 분들을 감싸 안고 있는 스님은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우리 스님’으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