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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전할 수 없어. 스스로 익혀 알아야지"
원로도예가 홍재표 옹… 60여년 간 발물레ㆍ전통가마 고수
"말로 해서 전할 수 있는 게 있나. 자기가 노력해서 몸에 익히고 느껴야 알지. 난 별로 할 말이 없어."

사진=박재완 기자
겨울이면 영하 20도를 오르내린다는 강원도 용평면 용전리 방덕골.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고도요(古陶窯)에서 원로도예가 홍재표(73) 옹을 만났다. 높은 가을 하늘 아래 흰 한복에 흰 수염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온 산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장작을 패고 있는 그의 모습은 '도인(道人)' 같다. "일정한 거처를 두지 않고 경기도와 강원도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는 자유인"이라던 후배 도예가들의 설명이 그대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홍재표 옹은 우리나라 도예사(陶藝史)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60여년 동안 발물레와 전통 장작가마를 고수해온 것이고, 또 하나는 국내에서 맥이 끊어졌던 진사(辰砂)를 1970년대에 재현한 것이다.

-전기물레와 가스가마를 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배운 게 '장작' 밖에 없으니까.”

-발물레와 전기물레로 만든 작품은 차이가 많이 납니까?
"만드는 사람은 작품이 좋은지 나쁜지 몰라. (그릇을) 만드는 데만 집중할 뿐이야. 그저 몸이 움직이는 대로 만들어"

-그릇을 빚을 때 마음은 어디에 둡니까?
"마음은 어디에 두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거야. 흙 반죽할 때도 보통 1000번은 주물러야 돼. 그러다보면 다른 생각이 날 수가 없지. 그릇 빚는 것도 마찬가지야. '돈 될 만한 걸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붙으면 끝이야."

- ….

아직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자에게 그는 한 가지 예를 들어준다.
"지난달에 대학생들이 만든 작품 70여 점을 봤어. 다들 작품은 좋았지만 느낌이 똑같아. 똑같은 흙과 유약을 사서 똑같은 전기물레에 돌려 만드니 비슷한 작품이 나올 수밖에. 자신만의 흙을 찾고 유약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안해. 물레 돌리는 것은 발부터 머리끝까지 기(氣)가 돌아가는 작업이야. 그래서 발물레는 내가 생각한 대로, 마음을 따라 돌아가는데 기계(전기물레)는 머리가 기계의 힘에 지게 되지."

발물레는 돌리는 몸짓에 따라 그릇의 선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데 반해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전기물레는 거의 비슷한 선을 이루게 된다. 장작과 바람, 기온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전통가마 역시 작품의 형태와 질감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처럼 작은 차이가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1970년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진사(辰砂)를 재현한 것에 대해서도 그는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우연히 진사 작품을 한 점 사게 됐는데, '이거다' 싶더라고. 그래서 혼자 별짓 다 해봤지."

꽃자줏빛의 진사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유약으로, 산화구리가 녹아있어 이를 이용해 도자기를 구우면 선홍빛을 낸다. 12세기 이후 꽃피었던 진사는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그 맥이 끊어졌다. 진사의 작업 과정이 무척 까다로운 것도 진사 전통이 이어지지 못한 한 요인이다. 진사는 날씨가 좋은 날 장작가마에서 1300도 이상의 고온으로 구워내야만 전통의 붉은 색을 재현할 수 있기에 도공으로서 기량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진사는 손으로 그린 문양이 전혀 없이 가마 안에서 찰나에 이루어지는 우연적인 변화(요변, 窯變)로 그림이 그려지는 거야. 내 손을 떠난 뒤로는 무슨 색이 날지 나도 알 수 없는 거지. 그래서 발색(發色)에만도 10년이 걸렸어."

진사를 재현하기 위해 그는 전국을 떠돌며 흙을 구했고 유약을 배합하느라 밤을 새기 일쑤였다. 그래도 늘 작품이 되어 나오는 확률은 한 가마에서 5%에도 채 못 미쳤다. 그렇게 40여년. 이제 그는 자신의 진사 가 '버선본'이라 말할 만큼 강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홍 옹은 얼마 전 반평생을 자신과 함께 해 온 발물레를 셋째 아들 성영 씨에게 물려줬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이렇다 저렇다 말로 가르쳐주는 법이 없다.

"자기가 노력해서 몸에 익히고 느껴야지, 말로 전할 수 있는 '비법' 같은 건 없어. 그렇게 자기 손끝에, 발끝에 자연스럽게 배어들면 저절로 알게 돼."

현재 고도요를 운영하고 있는 성영 씨는 "아버지를 뵈면 거짓말하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발물레로 도자기를 만든다고 하는 도예가나 교수들이 나이 오십만 넘어도 작업을 하지 못하는데 반해, 일흔을 넘긴 지금도 손수 장작을 패고 물레를 돌려가며 작업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몸에 익음'의 소중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화두를 타파하듯 작품을 참구해 온 그가 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흙이, 물이, 불이 곧 자신이기 때문은 아닐까.

"60년간 한 가지 일에 매달렸는데 아직 답을 못 찾을 걸 보니 난 바보인 모양이야. 그래도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는 법이지. 출세하고 잘 나가던 친구들은 다 세상을 떴는데 나만 아직 살아서 일을 하고 있잖아. 그러니 일생을 건 '작품' 하나 만들어하지 않겠어?"


□ 도예가 홍재표 옹은?

1932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요장을 운영하던 부친(故 홍순환)의 뒤를 이어 13살 때부터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광주요 공장장을 맡아 1970년대 초 국립중앙박물관이 진행한 전통 도예 재연 작업에 참가했으며 72년 홍익대에서 도예를 가르쳤다. 75년부터 일본의 박물관과 백화점, 갤러리를 순회하며 물레 시연회와 작품 전시회를 열었으며 88년에는 '국제 도자기 워크숍'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3개월간 미국 20개 주립대학을 순회하며 시연했다. 70년대 후반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진사(辰砂)를 재현해 내 주목을 받았고, 78년 요장명을 '이조요'로 바꾼 후 도약을 위한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했다. 60여년 간 발물레와 전통가마를 고수해 온 그의 작품은 현재 대영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으며 경기도박물관에서는 그가 작업하는 전 공정을 녹화해 영상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는 거처를 따로 두지 않고 경기도 이천과 강원도 평창의 작업장을 오가며 일생을 건 '마지막 작품' 만들기에 힘쓰고 있다.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2004-11-02 오후 8: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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