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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장부터 시작해 마지막 장까지 단숨에 읽히는 시집은 흔치 않다. 시인이자 출판인인 박진숙(47, 작가정신 대표) 씨가 14년간의 침묵을 깨고 펴낸 <혜초일기>는 108편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시집에는 신라 혜초 스님이 서역을 여행한 후 지은 <왕오천축국전>에 나타나는 순례 길을 좇으며 삶의 근원과 진리 그리고 불법(佛法)을 추구하는 시들이 ‘한 호흡’으로 묶여 있다.
<왕오천축국전>을 읽어 본 이라면 시 곳곳에 숨겨진 의미를 더 잘 이해하겠지만, 읽지 않았다 해도 상관없다. ‘불교’라는 겉옷을 입고 있지만 전문용어를 배재한 일상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이 이 시를 17년간 썼다는 사실이나, 실제론 <왕오천축국전>의 여정을 따라 여행을 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해도 시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법구경>과 <숫타니파타>를 읽으며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마음이 열렸다”고 말하는 시인은 86년 <왕오천축국전>을 접하고 “내 인생의 궤적과 혜초 스님의 발자취가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시인은 “<왕오천축국전>에 시적 향기를 불어넣고 싶다”는 마음에 혜초 스님의 구법 여정에 자신의 발을 들여 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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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더디지만 꾸준한’ 순례가 시작됐다.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빼듯” 시가 나왔다. 한 달에 고작 한 편을 쓸 때도 있었지만, 여정이 중도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없었다. 그렇게 시인은 혜초 스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때로는 혜초의 어머니가 되고 때로는 부처가 되고 또 때로는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되어 그들의 눈과 입을 빌어 노래한다.
“혜초 스님은 순례 길에 보고 들은 것을 자신의 가치판단 없이 그대로 기술해 두었죠. 이런 ‘열린’ 기록이 시인으로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선적(禪的)’이라거나 ‘깨달음’이라는 말을 쓰는 데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제 시는 깨달음의 노래가 아닌 ‘번뇌의 노래’입니다. 깊은 수행에서 나오는 깨달음의 시를 ‘오도송’이라고 한다면, 시는 결국 삶을 노래하는 번뇌의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평론가 이남호 교수(고려대)는 <혜초일기>의 미덕으로 ‘진정성’을 꼽는다. 이 교수는 “세상과 삶의 이치에 대한 <혜초일기>의 시적 사유들은 가벼운 아포리즘들이 범접할 수 없는 진정성에 닿아 있다”며 “이 시집은 종교적 주제나 소재를 지닌 많은 시집들 가운데서 하나의 모범이 될 것”이라고 평했다.
길을 걸으며 길 위의 것들을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시의 종착점은 순례를 처음 시작하던 바로 그 마음자리다. 마치 삶이 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법륜이라는 듯이.
“나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고/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길 위에서/모든 것은 끝났다/나는 그 누구도 무엇도 아니다 이 순간”(‘대운사의 아궁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