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유대(黃金紐帶)’
이번 대회기간 동안 사용된 한중일 3국 불교 교류 10년을 함축하는 말이다.
‘우호ㆍ협력ㆍ발전’을 주제로 시작된 한·중·일 불교교류는 1993년 10월 당시 중국불교협회장 조박초 거사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94세를 일기로 지난 2000년에 타계한 조 회장은 중국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며, 혁명원로로 중국공산당 서열 4위까지 올랐던 실력자였다. 그의 제안으로 95년 북경에서 첫 ‘한중일 불교유호교류대회’가 열렸다. 역사적 근원이 하나인 한국ㆍ일본ㆍ중국불교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단절된 불교전통을 복원하려는 중국정부의 의지와 3국의 이해가 일치한 결과였다. 96년 9월 서울대회, 97년 10월 나라-교토 대회가 잇따라 열리면서 종교를 통한 3국의 우호협력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그러나 98년~2000년 까지 한국 대표종단 조계종이 분란에 휩싸이면서 대회개최가 어려워졌다. 대신 이기간 동안은 ‘한중일 불교교류위원회’를 열어 3국간의 교류 실무를 담당할 조직 강화에 힘을 쏟았다. 2000년 10월에는 서울에서 ‘세계평화기원법회’와 학술 심포지움을 통해 한국불교의 위상을 높였다. 한편으로는 한ㆍ중 두 나라는 불교선수행체험단의 교차상호방문을 시작했다. 97년 제3차 대회에서 ‘양국 불교의 우호ㆍ협력 증진’이라는 취지로 결의돼, 이듬해 한국 측 수행단이 중국을 처음 방문한 것이다. 올해 4회째로 중국 복건성 일대에서 40여명의 한국 스님들이 중국불교를 체험했다.
2001년 10월 북경에서 다시 재개된 3국 교류대회는 ‘불교와 환경보전’을 주제로 열려 현실문제에 대한 불교의 역할과 참여를 제기했다. 이때부터는 ‘우호교류대회’와 ‘교류위원회의’도 같이 치러진다.
올해 10년째를 맞고 있는 3국의 우호 교류의 가장 큰 성과는 역시 오랜 역사를 같이한 3국의 불교가 상호 동질감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또 ‘3국 교류위원회’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인적 교류확대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도 주목할만한 성과로 꼽힌다. 무엇보다 ‘세계평화기원법회’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 나라가 자비와 평화라는 불교적 사명을 다하는데 적극 나서는 대회로 정착돼가고 있다.
이런 일련의 성과를 바탕으로 올 북경대회는 ‘세계불교포럼’ 창설이 가장 큰 이슈로 떠올랐다. 포럼은 한중일은 물론 아시아 불교권 국가를 비롯한 소ㆍ대승, 출ㆍ재가, 모든 계층이 참가해 언어와 국경의 장벽을 넘어 교육문화, 자선구호, 환경보존, 전쟁반대, 평화수호 등의 사업을 전개해 나가자는 취지로 중국불교협회와 ‘3안(홍콩, 마카오, 대만)’ 불교계가 처음 제안한 것이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세계불교도우의회’나 ‘세계불교승가회’같은 태국, 대만, 일본 등이 주도하는 단체들을 견제하고 세계불교를 중국이 주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또 불교를 통해 정치적으로 민감한 ‘3안’을 자연스럽게 통합 시키겠다는 속셈도 한몫하고 있다.
22일 교류위원회의 집중적인 논의가 시작되면서 한국대표 홍파, 중국대표 휘성, 일본대표 고바야시 스님 등 각국 대표들은 포럼 창립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했지만 한ㆍ일 운영위원들은 포럼창립을 중국이 주도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분명히 했다. 결국 홍파 스님의 제안으로 각국대표들은 추후 세부적인 실무를 논의하기위한 간사회의를 2005년 3월 제주도에서 갖기로 하고 이번 회의를 마무리 했다.
중국 측 대표 성휘 스님은 이날 한국 일본 대표들의 견제를 의식한 듯 “사업을 추진하기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 한국과 일본의 동의를 구한 상태에서 포럼이 추진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앞으로 좀더 시간을 두고 각 나라의 입장과 상황에 맞게 준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대회 한국측 단장으로 대회에 참가한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세계불교포럼의 창립을 비롯해 공식적 활동은 반드시 3국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매 2년 씩 한중일이 상임대표를 번갈아 맡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입장”이라고 밝히고 “선의의 경쟁과 폭넓은 교류를 통한 한중일 불교계의 발전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할 것 ”이라고 강조했다.
교류 10년을 맞은 한중일 불교계가 ‘세계불교포럼’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통한 새로운 미래를 열어 나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