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호 길을 묻는 이에게
은산철벽을 뚫으려면...
질문: 은산철벽을 뚫으려면 어떤 장소를 찾아서 공부해야 하는 것 아닌지요? 부처님 경전에도 처음에 공부할 때는 조용한 데를 찾아서 하라고 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물러서지 않고 정진해 나가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나요?
답변: 불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 살림살이 빼놓고, 우리들 빼놓고, 자식들 기르는 것 빼고, 사회를 빼놓고 무슨 불법이 있습니까! 그래서 만 가지 천 가지 번뇌 망상이 다, 육십이견(六十二見)이 다 공한 까닭에 색이 공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이 실상이고요. 망상을 끊어야 한다, 끊어야 한다 하는데 망상, 그 만 가지 망상이 나오는 대로, 그게 뭘 뜻하는 줄 아십니까? 자기의 불심을 키워주는 바로 보리예요, 보리! 불심을 키워줄 수 있는 보리! 그러니까 그 망상이 망상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 망상이 없으면, 이 생각 저 생각이 없으면 목석이게요? 목석이 무슨 부처를 이룹니까? 무슨 인간입니까? 그러니 그 망상도 소중하죠. 아주 묘하죠.
그러니 망상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소중하게 주인공에 놔라 이겁니다. 한데 뭉쳐 녹이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대자비와 대승 경지이며 그것을 이루어서 이 산하대지를 그냥 훌떡 집어삼킬 수 있다 이겁니다. 부처가 보이더라도 집어삼키고 넘어가고 마구니가 보이더라도 집어삼키고 넘어가라 이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은 저 부처도 아니다 하니까, 그저 부처를 아무런 방편도 없이 막 때려 부수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몸뚱이가 맞아서 죽더라 이거예요. 그거를 내 몸과 같이 생각하고 내 마음과 같이 생각하고 내 생명과 같이 생각한다면 아, 그거를 홀딱 그 자리에 갖다 넣고는 그 물질만 없앴으면 아무 일이 없을 텐데 그런단 말입니다.
어느 스님이 은사에게 이렇게 말했죠. “나는 도무지 어지러워서 공부를 못하겠습니다. 사람들도 많고 시장바닥 같아서 도저히 공부를 못하겠으니까 산으로 올라가겠습니다.” 하니까 “그럼 알았느니라. 그러면 어서 가거라. 옷 벗어 놓고, 이 오장 육부 속의 생명들도 다 꺼내 놓고, 땅도 딛지 말고, 물도 먹지 말고, 나무도 베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너 혼자 가서 살 수 있으면 너 혼자 가서 살아라.”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그 공부하는 스님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오장 육부 속의 생명들도 다 꺼내 놔라, 땅도 딛지 마라, 나무도 베지 마라, 먹지도 마라, 입지도 마라 하고 죄 했으니 뭘 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그때서야 지금 저 양반이 말하듯 ‘아, 이거는 바로, 같이 음파를 타고 돌아야 소리가 제대로 나겠구나.’ 한 겁니다. 그래서 공부를 했답니다.
그러니 이 말 저 말이 들어가면 산란해서 공부를 못해요. 진짜 공부를 못 합니다. 그래서 경을 덮은 겁니다.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경을 덮은 겁니다. 자꾸 이 말 저 말을 해서, 이리로도 갈 수 없고 저리로도 갈 수 없이 만들어 놓으니까요. 그러니까 들이고 내는 데는 오직 내면세계 바로 그 한 구멍밖에는 없다. 빗장 없는 빗장을 쥐고 늘어져라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한생각이면 그냥 윤회에 끄달리지 않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아, 일체가 다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거니까, 윤회라는 것에도 매이지 말자.' 하고 놓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 포함해서 놓는다면 몇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를 깨닫는 데에 지름길이며, 또 업식을 다 무효화시키는 데 지름길이며, 생활을 이끌어가는 데 지름길이며, 나를 건강하게 하는 데도 지름길이며, 모든 것의 지름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생각을 잘 하십시오. 내가 열 마디 백 마디 해 봤자 여러분이 생각 한 번 잘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끌어 주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차원이 같아야 됩니다. 이 배우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과 이끌어 주려고 하는 마음과 동일해야만이 바로 한자리 금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림하면서도 어떠한, 저 골방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것보다도 시장바닥에 내놓고 공부를 할 때, 모든 일체 만법을 받아들이고 거기 놓을 수 있을 때 바로 참선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해야 좌선이고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도 함이 없이 할 때 시공이 없는 도리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 마음과 마음이 통할 때 여러분은 스스로서 오신통을 그대로 하고 계신 겁니다. 누구한테 배우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가까운 데 내 마음과 마음 사이에 백지장 하나를 뚫을 수 있고 넘을 수 있어야만이 바로 상봉하는 길입니다. 만약에 바깥의 저런 은산철벽을 뚫어라 이런다면 은산철벽이 그냥 있어서 뚫으라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그건 뚫을 수 있어요.
내 마음속에 양면에, 부와 자가 있는 양면에, 백지장 하나 사이를 넘어라 이겁니다. 그러면 은산철벽도, 그건 무색할 정도예요. 나의 백지장 하나 사이를 두고 부와 자가 상봉을 못할 때, 공부는 진짜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이 상봉했을 때 진짜 공부하러 들어가는 거예요, 살림살이하면서도. 그때는 맛을 알고, 어떠한 맛인지 알기 때문에 그 맛을 좇아서 용도에 따라서 그 맛을 볼 때는 물러설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왜 좋으냐. 찰나의 살림살이 그만하면 떳떳함을 가지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 속에서 이 중생 속에서도 벗어났으니 이 중생, 수억겁의 중생을,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니 스스로 한 찰나에 제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사생이라 하면 알로 낳는 것 태로 낳는 것, 질척한 데서 낳는 것 화해서 낳는 것 이 사생, 이 모두를 바로 한 찰나의 살림살이로서의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때에 여러분은 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누가 불러 주지 않아도 내 마음에서 대인이라는 행을 하고 그대로 떳떳한 거죠. 나는 양심이 부끄럽지 않게 남이 뭐라든, “아이구, 별것도 아니야, 뭐. 만나 보니까 똑 저 고구마같이 생겼고 그저 별것도 아니야, 그냥. 키는 똥자루만하고.” 이래도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래도 좋고 똥자루같아도 좋아요, 난. 왜냐. 똥자루같은 거 똥자루같다는데, 뭐. 뭐 틀린 게 있나요? 그러니까 그 사람도 여기의 맛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거거든요. 거죽으로만 보고 물질만 보는 거예요.
‘내가 언제 적에 나를, 내가 참나를 알아서 이렇게 했을까. 저 사람도 내가 몰랐을 때에 바로 내 모습같구나.’ 이러니 그것도 미운 생각이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잖아요. 남을 미워하는 데 내 속이 상하는 거고, 남을 증오하는 데 내 업이 되는 거고, 남을 죽이는 데 나는 바로 죽는 겁니다. 진짜 사는 게 아니에요. 그게 지옥입니다. 독사지옥이요, 칼산지옥이요, 그게 지옥이지 뭡니까. 그래서 속에서 불이 일어나서 펄펄 뛰게 되는 것이 바로 무슨 지옥인줄 아세요? 그게 화탕지옥이죠. 그러니 지옥이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지금 지옥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보면 지옥 속에서 그냥 허덕이고 있는데 내가 생각할 땐 ‘아이구, 저 사람들 참 이상해. 아니, 백지장 사이 같은데…. 우리가 살림하면서도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거라고 이끌어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왜 믿질 않어? 얼마나 자기가 자기를 소중하게 생각을 해야 돼? 만날 아침에 일어나면 먹어야 하고 쓰다듬어야 하고, 씻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이러면서도 자기를 못 믿는 거야. 왜 못 믿어, 그걸?’ 그렇게 작용을 하게 만드는 자기 자아의 참자기를 왜 못 믿느냐고요? 내가 말을 어폐가 있게 잘못했다면 좀 욕도 하고, 그것 잘못됐는데 이렇다고 얘기 좀 해 봐요.
믿음이 약해집니다
질문: 스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으로 공부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고 있는 해외 불자입니다. 공한 도리를 어렴풋이 짐작해 나가고 있는데 근기가 약해서인지 그 때 그 때 다가오는 역경계마다 흔들리고 주인공에 대한 믿음이 약해집니다. 당장 발등이 타 들어가는 형국인데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인연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냥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극복을 할 수 있는 방편이 있는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체계적으로 공부를 못해서 믿음도 얕고 이리저리 세파에 휘둘리다 보니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드리게 되는데 저에게는 지금 절실한 문제이니 한 말씀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우리는 함이 없이 살기 때문에 공해서 따로 한 게 없습니다. 내가 너무 많아서 고정됨이 없이 그냥 보고 그냥 듣고, 그냥 만나고 이러기 때문에 내가 먹었다고도 할 수가 없고, 내가 산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이렇게 했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돈 벌었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망했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는 걸 알아야 자유스럽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누가 대신 해 줄 수는 없다는 거죠. 다른 건 다 해 줘도 깨우치는 거하고 죽는 거, 아픈 거, 똥 누는 거, 잠자는 거, 먹는 여섯 가지는 아무리 해도 대신 못해 준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지혜가 풍부한 사람들은 가정에서 누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주 마음 태연게 대치해 나가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방방방 뛰죠.
여러 가지예요. 여러 가지 말 못하는 문제들이 너무 많아요. 내가 이날까지 여러분한테 말을 했어도 정작 할 말 못한 것이 너무 많죠. 내가 해서 될 말이 아니거든요. 여러분이 스스로 알면서 점점 이렇게 돼야 이게….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대로 같이 해 주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대로 같이 해 주고, 길면 긴 대로 같이 해 주고 짧으면 짧은 대로 같이 해 줘라. 이것이 바로 모가 나지 않고 둥근 거니라.” 때로 이렇게 자기 몸을 보면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몸은 어디 아픈 걸 더 잘 알 거예요. 기운이 없다거나 입맛이 없다거나 또 어디가 아프다거나 이런 거는 더 잘 알죠. 딴 사람보다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알면 아는 대로 대치를 빨리빨리 해 나가야지 대치를 할 생각은 안 하고 ‘이거 어디가 어떻게 돼서 내 몸이 이런가. 병원에 가서 좀 검진을 해 봐야 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시간을 오히려 더 늦추는 거예요. 빨리 해결을 할 것도 말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에 아무리 관해도 안된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근데 그건 여러분의 믿음이 그만큼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거죽으로 주인공을 부르면서 안된다고 하는 겁니다. 방방 뛰는 걸 보면 벌써 알아요. 이름만 부르고 다녔다는 걸요. 남이 이렇게 하면 된다더라 하는 말만 믿고 하는 거 말이에요. 저 나무들이 딴 나무를 믿고 삽니까? 자기 뿌리에 의지하고 살죠. 그런데 보세요. 나무 이파리 하나도 뿌리에 다 붙어 있으니깐 뿌리에다가 다 놓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에너지 거름이 골고루 다 먹어져서 푸르르게 살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여튼 열심히 공부한다는 생각도 놓고 꾸준히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지세요. 그대로 여여하게 갖추어 가지고 있으니까요.
어떤 사람은 '그거 뭐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하늘이 무너져서 찌부러져서 죽는다 하더라도 죽으면 죽는 대로 살죠.' 이러는 사람은 아주 살게 되고 괜찮은데, 살려고 바둥바둥 발버둥이 친다면 어리석은 행이 아니냐 이거죠. 해 달라면 벌써 둘이 되는 거예요. 누구 더러 해 달랍니까? 내 마음이 안되고 있는 걸 알고 있는데 누구더러 해 달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온 우주가 동일하게 초월해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계기와 더불어 우리가 한생각 하는데 법이 또 세계를 그렇게 살릴 수도 있는 그런 계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 항상 얘기하듯 스스로 내 마음이 청정한 줄 어찌 알았으리까. 스스로 내 마음이 그렇게 갖추어 가지고 일체 만법을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걸 어찌 알았으리까. 내가 있기 때문에 구족한 걸 어찌 알았으리까. 내가 있기 때문에 일체 만법을 들이고 냄을 어찌 알았으리까, 능히 말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자기 거가 돼서 스스로서 당당하고 여여하게 이렇게 퍼내서 쓸 수 있도록 진짜 믿어야 하고 진짜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자기 과거 씨가 있으니 진짜 믿고 관하라는 겁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질문: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병고로 인해 숨이 턱에 차올라서 마음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막막한 심정을 해결해 주십시오.
답변: 여러분이 마음을 정성스럽게 쓰고 지극한 마음으로 할 때 참 감개무량하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할 때 눈물까지도 글썽거려지는 그런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또 질병을 앓고 그렇게 찾아오실 때, 자손들을 돈이 없어 학교에 못 보내고 등록금을 못 내고 울 때,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그런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난할수록, 질병이 올수록 이 공부를 꼭 해야 한다는 그 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절에 가시든지 꼭 타의에서 구하시는데, 그런 습관들을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아니었더라면 절에를 어떻게 가며 부처가 있는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여러분 먼저 여러분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여러분의 그 육신이 집이라면 그 속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그 자체, 부처님이 계신 까닭에 그 속에 또 중생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그 까닭을 여러분은 잘 아셔야 할 겁니다. 남의 말을 듣고 이리저리 끄달리지 마시고 믿는 것은 자기 주인공에 모든 걸, 삼합이 합쳐서 공존하는 그 자체를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진면목은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일체만법을 들이고 낼 수 있다는 그 자체. 불성은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만법을 들이고 낼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여러분은 같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중생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항상 자기를 못나게 생각하고 아주 값싸게 생각하고, 능력이 없는 걸로 생각해서 남한테 물어보고, 절의 스님네한테 가서 물어보고 점쟁이한테 가서 물어보고, 능력이 없으니까 부적이라도 갖다 붙여야 하고 이러는 습을 가졌어요.
여러분, 길가에 가다가 엎드러지면 여러분은 일어서지 못하십니까? 여러분은 엎드러졌으면 일어날 수 있는 힘도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서 병이, 질병이 나왔다면 그 속에서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질병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인과의 업보, 유전, 모든 그 오관지옥의 꼴을 누구나가 면치 못하고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하는 거를, 바깥으로 끄달리면 못 면합니다. 반드시 그것, 안의 주인공에 일임해서 놓고 거기서밖에 해결 못한다는 그 믿음을 진실하게 갖고 물러서지 않을 때, 비로소 그건 그것대로 해결을 하면서 이거양득, 삼거양득으로 됩니다. 그거를 해결을 하면서 나는 체험하면서, 또 그 감흥을 얻는다 말입니다. '아! 나한테도 이러한 능력이 있구나.‘ 단호히 이런 것을 믿고 들어가라 이겁니다. 그때는 선맥을 쥐고 들어가기 때문에 그 맛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 맛을 알기 시작하면 참나가 감응이 되고 참나가 서로 부와 자가, 즉 말하자면 만나는 거죠. 만나게 되면 때로는 일을 할 때는 부는 자식이 돼 주고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자식은 부가 돼 주고, 자유자재권과 더불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죠. 고거를 못믿겠걸랑 여러분이 남편을 금방 만났다가 자식을 만나보세요. 남편 만났을 때는, 때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여러분은 화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딸 같아지기도 하고, 아내로서 되기도 하고, 어떤 땐 누이도 되고 어떤 땐 어머니도 되고 그렇게 변화가 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멋쟁이는 뭐가 멋스러우냐 하면, 묘법이라고 하죠, 그걸. 그 묘법은 마음에 따라서 행도 말도 뜻도, 삼합이 한데 자동적으로 굴러가면서 남편한테 접근을 하거든요. 자동적입니다. 한 찰나예요. 그런데 한 찰나에 말입니다, 자식을 만나니까 금방 아내라는 게 그냥 아예 없어지고 자동적으로 어머니라는 게 됐어요. 이렇게 묘법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힘이 없다구요? 여러분이 그렇게 묘법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자각할 줄 모르고 자립할 줄 모르고, 자기 진화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창조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생각도 못하는 거죠.
우리 생활이 그대로 심성과학이며 그대로 철학도 될 수 있으며, 인간의 도리가 그대로 부처님 법이며 진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등 동물로서 태어난 것은 마음이 그렇게 묘하게 돌아갈 수 있는 역량력을 가졌기 때문에 고등 동물입니다. 그래서 인간 이하로 된 물건들은 우리 인간이 지배하게 돼 있고 지배를 받는 것은 인간을 위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의 진리를, 가만히 펼쳐 놓은 이 이치를 가만히 들어 보십시오. 우리 몸뚱이 속에 들어 있는 그 모든 물질의 생명이,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한테 만날 ‘한번 괴로움이 있으면 거기 일임해서 놓아라. 아프면 아픈 것도 거기에 놓아라. 아픈 것이 거기서 나왔다면 바로, 낫게 할 수도 있는 능력도 거기 있다. 가난하게 만들었다면 가난하게 만든 그 장본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잘살게 할 수 있는 능력도 거기에 있다.’ 그럽니다. 그러니 매사 게 다 그렇다는 것을 진짜로 아시고 눈물 흘리지들 말고 멋지게 사실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이 공부를 꼭 해야 하는 이유
질문: 왜 마음공부를 꼭 해야만 하는 것인지요?
답변: 우리가 왜 이렇게 치열하게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물으셨는데, 우주와 우리의 집인 지구와 세계가 우리가 차원이 높아지는 대로 모두 그 수명을 연장하면서 말입니다, 또 이 말 하기 전에 우주는 모든 물질적인 그 모두를 해소시키고 그 근본만 남아서 블랙홀이라는 큰 별이 그것을 생산을 합니다. 새로이 생산을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사람이 죽으면 몸뚱이는 없어지고, 도로 지수화풍에서 와서 지수화풍으로 돌아가지만 그 근본 종자만은 남듯이, 남아서 그 영원한 자기의 근본이 다시금 정자 난자를 빌려서 다시 생산이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차원이 사 차원, 오 차원, 육 차원, 칠 차원까지 이렇게 이르러야만이, 이 몸은 가만 놔두고라도 그 마음 자체가 천차만별로 벌어져서, 그 블랙홀로 깊숙이 들어가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게 하나가 돼야 이 전 세계 컴퓨터의 모든 문제도 더 성장이 되게끔 할 수 있고 수명도 연장시킬 수 있고, 허공에 에너지 있는 거를 다 끌어 쓸 수 있는 차원이 돼야만이 우리가 점차적으로 길게 살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진리의 삶이 길게 연장될 수 있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차원이 그만큼 되지 못했는데 벌써 물질은 다 떨어지고 아니, 에너지라고 합시다. 에너지가 다 떨어져서 우리가 살 수 없는 그런 빈털터리가 되고 집이 무너지고 또 살 수 없다면, 우리 힘이 없으니깐 어디서 어떻게 해서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차원을 높여야 합니다. 여러분! 먹을 게 말입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선반 위에 높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 키를 키워야 그걸 꺼내 먹죠. 그렇기 때문에 걸상이라도 갖다 놓고 올라서서 꺼낸단 얘깁니다. 그러니까 우리 차원을 높여야, 걸상을 놓지 않고 높여야 우리가 꺼내 쓸 수 있다 이겁니다. 이건 물질이니까, 육안으로 보이는 거니까, 보이는 걸 놓고 올라서서 꺼내지만 이건 육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건 보이지 않는 차원이 높아져야 우리가 꺼내 쓸 수가 있단 얘깁니다.
부처님의 그 도리가 그래서 깊고 광대하고 무변하다. 이 마음이라는 근본을 없애고서는 절대 세상이 없다. 세상을 확장시킬 수도 없고 방대한 능력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우리 마음이 말입니다. 내 몸속에서 벗어나야, 공기주머니를 벗어나야 대기권을 벗어날 수 있고 대기권을 벗어나야 모든 각처에 어디든지 투입할 수도 있고, 또는 화해서 응신이 될 수도 있고 군사로 화해서 군사로 대비대책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거든지, 바다라든가 산이라든가 들에서라든가 우주에서라든가 세계의, 지구 모두 어디든지 조그만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어디에도 높다 얕다 이런 것도 없고, 길다 짧다 이런 것도 없고, 크다 작다 이런 것도 없고, 멀다 가깝다 이런 것도 없고, 그대로 찰나찰나 그렇게 용무를 장하게 할 수 있다, 평등공법을 장하게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내가 될 수 있으면 이거를, 말을 ‘용무’라고 하면 영어로다가 번역할 때에 다른 사람들이 좀 못 알아들을까 봐 평등공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평등공법’ 하면 누구든지 알 수 있으니까요.
우리 마음이 그렇게 벗어나야 전체 어디고 내 도량 아닌 데가 없고 내 자리 아닌 데가 없고, 내 거 아닌 게 없고 내 마음 아닌 게 없고, 내 몸 아닌 것도 없어요. 지금 사람은 자기 몸 생각만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바다도 흙도 돌도 어디고 다 쓸모가 있는 위치죠.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조금씩 조금씩 체험을 하면서 자꾸자꾸 차원을 올려라. 그래서 고가 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흥겹게 웃고 살 수 있다. 고가 아니다.
아무리 집을 쫓겨나게 됐다 할지라도 ‘흥! 나는 지금 심부름을 하는 입장이고, 또 심부름을 하면서 자기가 넓게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에 주인이 알아서 다 하니까, 자기는 걱정 없이 자기 주인이 나앉으라면 나앉고 들어앉으라면 들어앉을 테지.’ 그러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죠.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길게 있다 죽어도 모두 자기 주인이 할 탓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어야만이 자기를 닦아 나갈 수 있고 차원이 높아질 수 있고, 자기 마음이 보배가 될 수 있고 자기 마음이 보배가 됨으로써 전체의 보배를 자기가 자유자재할 수 있다. 어떠한 극난한 문제도 악이 선을 이길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대비대책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기복으로 모두 가톨릭교나 기독교나 불교나 할 거 없이 모두가 기복으로 나가는데 우리라도 그렇게 해서 그 사람네들을 다 살릴 수만 있다면, 어떻습니까? 우리 한생각이라면 사람이 생각하는 것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량광대한 공부인데 어떻게 이 도리를 배우지 않고 그냥 스러질 수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