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2: 세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능엄경에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만 깨달아도 능히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님께서도 늘 그와 같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요즘같이 물질문명이라는 편리 속에서 살다보니까 금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나 스님의 말씀을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사실은 그렇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그 끄달리는 의식들이 너무 힘이 세어서 돌아서면 잊어버리려 하고 어떤 닥쳐오는 시련이나 아니면 죽음과 삶의 길에 도달했을 때 큰 재료가 있을 때에만 그런 말씀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 아마 저희들의 일반적인 생각인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질문명이 편리하다 보니 여기에 끄달려져 있는 이런 저희들의 중생심이 과연, 능히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하신 그 말씀과 저희들의 지금 현실과는 어떻게 보면은 아주 코앞에 있는 것도 같고 때로는 굉장히 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능히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을 저희들은 어떻게 다시 알아듣고 또 수행을 해야 될 것인지를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일러주십시오.
스님: 이 마음이란 멀고 가깝고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나라라고 하더라도 그렇고 어떠한 회사라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지도자가 전깃줄이라면, 아주 쉽게 그냥 얘기하죠. 지도자가 전깃줄이라면 전깃줄을 이쪽에서 하나 대주면 그냥 불이 들어와서 한순간에 불이 들어오면은 모두가 밝으니까 밝음의 전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그죠? 그러면 전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나 전지의 그 밝음을 쫓아가는 사람이나 똑같이 밝죠? 그러나 따라가는 사람은 밝으니깐 가야지 하는 그 마음밖에는 없고 그 도리를 하나도 모릅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임시로 변통을 해서 건지는 수가 있고 구원하는 수가 있고, 하나는 정말 지도자가 이 도리를 알아서 거기다가 한마음이 같이 돼준다면, 진짜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한손으로서, 천백억화신 자체의 손이 한손이 돼가지고 그대로 건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두 가지가 있죠. 모르고 구원을 주느냐 받느냐, 알고 구원을 주느냐 받느냐 하는 그런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라도 깨우치면 그 가정과 그 나라를 다 이끌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내가 그런 말을 하죠. 지도자한테 물 한 방울을 딱 떨어뜨린다면은 그 마음이 전체가 한 그릇의 마음이 되기 때문에 그냥 집어넣어준 사람의 마음대로 그냥 행이 나옵니다. 마음이 생기고 행이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끌어가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모든 걸 이끌어가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고 다 그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는 동시에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말로 표현을 하자면은 저쪽 물방울이 했다고 그러겠습니까? 이쪽 물방울이 했다고 그러겠습니까? 없죠? 밝게 불이 들어와서 같이 밝게 살 뿐입니다. 그거를 가지고 여래심(如來心)이라고 합니다.
밝게 불이 번쩍 일어났을 뿐이지 이런 용도에는 이런 불이 필요하고 큰 용도에는 크게 불이 들어와야 하는 필요가 있고, 그러니까 심력으로 말미암아 그 불빛은 가지각색으로 이쪽 전깃줄에다가 이쪽 전깃줄을 붙여주면은 불이 들어와서 큰 데는 크게 붙여주고, 작은 데는 작게 붙여주고 이렇게 해서 천차만별로 건지는데, 건져도 건져준 사이가 없다 이겁니다. 왜냐? 네가 한 것도 없고 내가 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양면에 붙어서 불이 들어왔다면 불 들어온 것뿐인데 이게 했다고 하겠습니까, 저게 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일체 만물만생은 서로 서로가 교환하면서, 돌아가면서 말하고 돌아가면서 서로 인연에 따라 상대성 원리로써 계발도 하고 발전도 하고 이러는 창조력을 발휘하는 거죠. 그래서 과학이다 물리학이다 하는 이름을 넘어서서 심성의학이라야 되고, 심성과학이라야 되고, 심성물리학이라야 그것이 알맞게 작용을 해서 불이 들어올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이래도 이것도 없고 저래도 저것도 없다 하는 것은, 크다 작다 한 것이 없다라고 한 뜻은 어떠한 까닭에 없다라고 했는가 그것을, 우리 공부하면서 그 뜻을 잘 아십시오.
그러고 여러분이 토요일 전에 나를 보러온다고 그러는데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말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상대방이 말을 했으면 들어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들어준다고 믿으면 될 거를, 왜 자꾸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어서 되묻고 되물어서 오히려 전깃줄이 붙었다 떨어졌다 붙었다 떨어졌다 하게 만듭니까? 그리고 외려 불발이 되어서 안 될 수가 있거든. 붙었다 떨어졌다,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 불발이 돼서 잘못될 수도 있고 그런 수가 십중팔구는 되죠.
그러니 때와 장소를 가려서, 때에 따라서 이런 말을 하면은 그냥 하는 걸로 족하게 생각하고 갔으면 되는 거를, 귀가 있으면 듣겠지 하고 가란 말입니다. 그러고 듣는 사람에 한해서는 조건 없는 사랑이라야 되는 거지 조건이 있다면 ‘너는 이런 업이 있으니까 못 하고 이런 업보를 지었으니깐 못 하고 무슨 이러한 병이 있으니깐 너는 못 하고….’ 이런 이유가 붙으면 전깃줄과 전깃줄이 어떻게 붙습니까? 이유가 없이, 불을 켜려면 이유를 불문에 붙이고 전깃줄을 한데 합치는 거죠. 그죠? 이걸 붙일까 말까, 이거 붙일까 말까 하고 붙입니까? 무조건이지. 그래서 컴컴하면 딱 붙여서 불을 켜서 밝게 살고 잠자고 싶으면은 잠자고 먹고 싶으면 먹으라는 소리입니다. 그렇죠! 변소 가고 싶으면 변소 가고. 하하하.
질문자2: 예.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 말씀 중에 한 가지 또 여쭐 말이 있어서, 대중들께는 상당히 죄송합니다마는 이런 기회가 잘 없으니 한마디만 더 여쭙겠습니다. 공부하시는 분들 중에서 돈오점수에 대해서 아직까지 미심쩍어 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간단하게 한 말씀만 더 해주십시오.
깨닫고 난 뒤에는 다시 깨달을 것이 없다. 깨닫고 난 뒤에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찌 무엇이 있으랴, 하는 그런 말씀과 또 어떤 스님들께서는, 깨닫고 난 뒤에는 보임을 잘 해야 된다. 깨닫기 전에는 깨달을 것이라도 있지만은 깨닫고 난 뒤에 보임을 잘못하면은 그건 또 영원히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런 큰스님들의 말씀이 아직까지 공부하는 저희들에게는 상당히 의문으로 돼 있습니다. 정말 깨닫고 난 뒤에는 한 물건도 없다라고 하는 그 의미와 깨닫고 난 뒤에는 보임을 잘 해야 된다는 그 의미를 간단하게 한 말씀만 더 여쭙겠습니다.
스님: 깨닫고 나서 보임을 잘 해야 한다는 것도 맞고, 깨닫고 나면 아무것도 건덕지도 없다 하는 말도 맞습니다. 허허허. 왜냐하면 자성 부(父)와 자성 자(子)가 한데 합쳐지면 (주먹을 서로 붙여 보이시며) 깨닫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데 합쳐졌을 뿐이지 자기가, 즉 씨를 심어서 싹이 났을 뿐이지 자란 것은 아닙니다. 자랄려면 그만큼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머리 깎은 사람들이나 머리 안 깎은 사람들이나 입산을 할 때는 무명초를 다 끊어버리겠습니다 하고선 다짐을 하고 끊어버렸습니다, 아주 애당초에. 그랬는데 형식적으로만 끊어버렸지 수행해 나가는 데 진실하게 우리가 무명초 하나하나를 끊어버린 게 아닙니다. 마음을, 모든 것을 거기다 모아서 놓는 데서 이 무명초가 다 끊어지는 겁니다.
그런 반면에, 지금 점수다 하는 거는 그런 수행을 하는 나를 발견했으면은 보림이라고 해도 좋고 보임이라고 해도 됩니다. 즉 남의 탓을 하지 말고 남의 원망을 하지 말고 어떤 게 있어도 내 탓으로 돌리고, 나로 밀어 넣고 나한테 놓고 또 돌아가야 합니다. 그게 보임입니다.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다가 놓고 가야 합니다. 악이든지 선이든지 다 말입니다. 그래서 잘 되는 거 감사하게 놓고,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거기다.’ 하고 놓고, 이렇게 해서 둘 아닌 도리를 두번째 깨달아야 합니다.
또 세번째 가서는 둘 아닌 도리를 탁 알았는데 나투는 도리를 모르는 겁니다. 아까 전깃줄과 전깃줄을 대어주고 떼어주고 대어주고 떼어주고 하는 도리를 모른다면 모두 일체 여래라고 할 수가 없다, 또 일체 중생이 나아님이 없다 하는 것을 말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나투는데, 즉 아버지가 됐다가 남편이 됐다가 이렇게 나툴 줄을 모른다. 이럴 때는 그 나투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세번째 깨달음이 있어야 된다 이런 겁니다. 그런데 세번째 깨달음이 있어서 만약에 나툼의 도리를 안다면 일체가 나아님이 없이 모두가 난데 자기가 자기 꺾는 법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화해서 자꾸자꾸 돌아가는데 어떤 거 됐을 때 내가 됐다고 하고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수행을 할 땐 점수라고 해도 맞고, 그게 끝났을 때는 ‘아! 너도 나도 다 둘 아니게 돌아가니 하나도 없다.’ 하는 소리도 맞고, 둘이 다 맞으니까 둘이 다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절대적으로 이 도리를 물렁물렁하게 봐서는 아니 됩니다. 형상을 보고 무시하거나 그래서도 아니 됩니다. 이거는 형상을 배우는 게 아니라 형상과 정신과 둘 아니게 작용하는 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고 작고도 없고 일체 만물만생이 생명 없는 것이 하나도 없고 전력이 똑같듯 생명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거를 알려면 모두 하나도 버림이 없어야 되고 버림이 없어야 항복을 받고, 항복을 받아야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도리가 나옵니다. 질문하실 분 또 없습니까?
질문자3: 스님, 간단하게 무와 유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산 사람들이 전체가, 무와 유가 같이 산다는 걸 근래에 와서 더 절실하게 느끼거든요. 그래 제사라든가 이런 걸 지낼 때 집안 전체 싸움이 난다거나 할 때에 무의 세계에서 그런 문제를 만든다는 거를 제가 느꼈어요.
숙모님이 추석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분 돌아가신 이후로 산소를 갔다가 오다가 그 이웃집에서 삽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한 사람은 도망가고 뒤에서 삽을 들고 도망간 사람을 잡으려고 그러고, 연속 낫을 들고 들어가고 몽둥이 들고 쫓아가는 그런 문제들도 무의 세계에서 문제가 있다는 걸 제가 알게 돼가지고 생각을 해보니까 전체가 무와 유가 같이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스님: 그런데 무도 아니요 유도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정신세계에서만 하는 것도 아니고 물질세계에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발생이 되고 가라앉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재를 지내거나 천도를 시키거나 하더라도 그게 오래 걸렸습니다. 여러분이 이 마음공부를 하면서 그것이 부러지지 않게 하느라고 천천히 갔던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저 찹쌀가루 전병 부쳐서 세 조각 아니면 일곱 조각, 일곱 조각 아니면 아홉 조각, 열두 조각 이렇게 해놓고…. 일체 부처님의 조상이나 중생들의 조상이 따로 없으니까 모두가 한 조상, 한마음의 조상으로서 일체 영령들에게 다 할 수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게. 저 불 켜놓고 향 켜놓고 물 한 그릇 떠놓고 그거면 족합니다.
그래서 영령들이 상을 차려놓으면 상 차려놓았다는 스님네들의 마음부터 벌써 캐봅니다. 상 차려놓았다는 생각을 벌써 영령들이 알거든요. 그 상 차려놓은 것만 알게 된다면 영령들이 어떻게 천도가 됩니까? 먹을 생각만 하겠지. 그러니까 우주 전체 그 한 티끌만도 못한 우주를 한꺼번에 거기다 제시한다면, 우주 삼세를 다 제시한다면, 문을 열어준다면 그건 저절로 천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천도가 됐는데 왜 또 지내느냐, 이러겠죠? 그거는 죽어도 마음들은 체가 없기 때문에 이 공간 안에 꽉 찰 수도 있고 천도가 됐다 하더라도 그거는 자식들이 부모의 묵은 빚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하는 것도 되고 둘째는, 자기가 자식을 기르는데 제도를 하기 위해서도 자냔다 이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은혜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간단명료하게, 방편을 쓰더라도 그렇게 간단명료하게 방편을 써서 죽은 영령들도 산 사람들의 영령들도 둘이 아닌 (손바닥을 서로 붙여 보이시며) 까닭에 그렇다는 사실을 모두 여러분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질문자3: 집안 사정으로 인해서 제사를 양쪽 집에서 지내거든요. 그래서 저는 요 근래 제 마음자리에다 제사를 지내고는 제사 지내러 두 집에 다 안 갑니다. 그냥 내 마음자리에 전생이 있다면.
스님: 이거 봐요. 사람이 좀 쥘락 펼락이 있어야지. 바늘을 끼었다 뺐다 끼었다 뺐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해야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지 쥐었다 폈다 하지 못하면 정상적인 사람이 못 돼요. 그러니까 제사를 지낼 때에 가더라도 마음으로서 그렇게 하면은 아무리 큰집에서 그렇게 차렸다 하더라도, 마음으로서 거기에 모두 응해서 따라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또는 영령들도 좋고 이게 다 좋은 거 아닙니까? 댁이 마음이 흥락하고 좋으면은 조상님도 좋고, 그런데 그 몸뚱이가 뭘 잘났다고 거기를 안 갑니까? (대중 웃음, 박수) 그놈의 ‘나’라는 거를 빼놓지 못하기 때문에 안 가고 간다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것까지도 마저 빼놓고 슬근슬근 물레방아 돌아가듯 슬근슬근 돌아가십시오.
질문자4: 안녕하십니까? 저는 10년 전부터 병원에 늘 다녀도 아무 이상이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중 요즘은 눈이 아파가지고 영 앞의 사람이 안 보입니다. 병원에서는 시신경이 말랐다 하는데 치료를 해도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스님, 이 눈을 빛과 광명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스님: 여기서는 관하는 도리를 무조건 가르칩니다. 관하는 도리를 첫째에 알아야 하고 두번째는, 모든 걸 믿음을 가지고 자기가 자기를 끌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운전수가 차를 몰고 다니듯이 자기 정신적인 마음이 바로 물질적인 육체를 끌고 다닙니다. 이런 생각을 해서 이리로 끌고 가고 저런 생각을 해서 저리로 끌고 가고 이렇게 합니다. 그러고 병원에서 그러한 말을 했으면 한 대로 또 들으면 듣는 대로 보면 보는 대로 그것에 착을 두고 입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떠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입력된 그 자체를 부숴버릴 수 있는 그러한 관법을 아셔야 합니다. 관하는 법을 열심히 진실하게 알고 행하면 모든 병 증세도 거기서 나온 거니깐 거기다 놓고, 거기서만이 이끌어줄 거다 하는 믿음을 가지신다면 아마 그것도 멀지 않아서 해결이 날 것입니다.
질문자5: 저는 주인공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는데 저번에도 병이 났는데 주인공을 믿고 관해서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을 믿어도 안 될 때가 있는데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스님: 허허허. 안 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라는 뜻이 있어. 우리가 돌아서서 갈 때도 있고 앞으로 그냥 갈 때도 있지? 응. 어떻게 바로 가는 것만 가는 거고 뒤로 가는 거는 가는 게 아니겠어? 싸울 때도 전진할 때가 있고 후퇴하는 때도 있지? 그러니까 안 되는 것도 되는 거고 되는 것도 되는 거야. 우리가 싸우다가 포위를 당하게 되고 그러면은 뒤로 물러서야 되는 거거든. 후퇴를 해야 살지? 후퇴하는 것도 법이야. 그러기 때문에 안 되는 것도 살리기 위해서 후퇴를 해야 하는 이런 문제가 있어. 후퇴를 하는 것도 법, 전진을 하는 것도 법이다. 그러니까 양면을 다 감사하게 생각해야 된다, 이 소리야. 그래야만이 그 도리를 알게 돼.
질문자6: 저는 부산에서 왔습니다. 친정에 동생이 하나 있는데요. 52살 난 동생이 있는데 하도 아파서요. 한 7년 전부터 아파요. 너무너무 아파서요. 79세 되신 어머니가 오히려 시중을 하는데요, 부닥치기만 하면 싸우고요, 병이 안 낫는데 살려달라고 왔습니다.
스님: 병원에 가니까 뭐라고 합디까, 여긴 병원이 아니니까.
질문자6: 간이 좀 나쁘다 그래요.
스님: 여러분도 상식적으로 알아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80%, 90%는 마음에서 병을 가져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은 어디가 좀 아프면은 그냥그냥 바깥으로 그냥 쪼르르 갑니다. 그래서 조직 검사도 하고 뭣도 하고 뭣도 하고, 이렇게 해가지고는 오히려 몸을 망가뜨리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은 의사들이 이런 소릴 들으면은 날더러 욕을 하겠지만, (대중 웃음) 그게 아닙니다. 의사들한테 가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어느 땐가 내가 얘기했죠. 다리가 썩어서 잘라야 할 텐데 그 마음과 마음이 전깃줄을 붙이니까 고만 인체의 마음들이, 골수의 모든 생명 의식들이 그냥 전부 작용을 해준 겁니다. 그러니깐 썩어 들어간 게 금방 내려가서 발목으로 내려갔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자를 걸 안 자르게 됐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의사들도 머리를 꺄우뚱거리고 종교를 뭘 믿느냐고 묻더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몸속에 들은 인체의 모든 의식들이 이 관법을 알아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그 모든 의식들을 다스리면서 한마음으로 귀결을 짓고 둘로 보지 않아야만이 자기를 자기가 죽이는 법이 없죠. 자기가 자기를, 자기 손가락이 자기 손가락을 꺾을 수는 없죠, 이 손가락 하나가. 그 도리를 알아야 됩니다. 인체의 의식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한 주장자로 돼 있는데, 손가락처럼 하나로 돼 있는데 어떻게 자기가 자기를 죽입니까? 그러니깐 작용을 해주게 돼 있거든요. 모든 데서 작용을 해줘서 굳어 들어가는 데를 완치시킬 수가 있는 겁니다.
무슨 병이든지 어떠한 거든지 종류 종류가 따로따로 있겠지만 모두 뼛속에서, 너무 위대하든 위대하지 않든, 병이 위중하든 간단하든 뼛속의 골수에서만이 모든 작용을 해주고 서로 대치를 해주고 바꿔주고 이러는 데서, 그 의식들이 작용을 해주는 데서 병이 완치되는 겁니다. 그런데 벌써 들으면 아이구! 이젠 영락없이 나 죽네, 아무리 해도 이것은 안 나으니깐 이거는 꼬박없이 죽었다고 생각을 하니까 이 의식들도 전부 작용을 하다 말고 이젠 영락없이 죽었다고 그러곤 작용을 안 해요.
그러니 한마음의 도리가 얼마나 귀중하냐 이겁니다. 그런데 안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바깥에서도 그렇습니다.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가 아니라, 그대로 여여하게, 심력이라는 것은 빛보다도 더 빨리 더 귀중하게, 아까 전깃줄 붙이듯이 (주먹을 서로 붙여 보이시며) 그렇게 붙여줄 수 있기 때문에 일체 중생을 다 건진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아주 과거로부터 지은 것이 돼놔서 참 완고한 사람이라면 어찌해 볼 수가 없죠. 그렇다는 건 뭘 뜻하느냐? 그릇을 만들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착한 마음의 그릇을 만들지 않을 때, 그릇에 담기질 않아요. 붙여지질 않아. 전깃줄도 선을 까고 붙여야죠? 까지 않고 그냥 붙일 수가 없죠. 까지 않고 붙인 거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선을 까서 붙이면 아주 불이 들어오게끔 까가지고 붙여야지 까지도 않고 어떻게 붙여집니까. 그러니까 그릇을 만들어서 받아야 된다 이 소립니다.
질문자6: 그런데 왜 아픈 환자하고 어머니하고 자꾸 싸움을 하려 합니까?
스님: 그것도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온 거니까 거기다 놓는 관법만 아시면 그거는 싸움 대번에 안 할 수 있어요. 삼 형제가 사는데 만날 싸우고 몽둥이를 가지고 쫓아다니고 조금만 해도 ‘이놈의 새끼야, 네가 더 냈니 내가 더 냈지. 네가 부모를 더 잘 모시니 내가 더 잘 모시지.’ 하고 싸우더랍니다. 그래서 그 집안의 큰 며느리가 그 가족들의 화목을 위해서 정성을 들이길 열심히 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아, 어느 때에는 그냥 자기도 모르게 서로를 보고 어서 오라고 그러면서 술을 먹으면서 얘기가 나오는데 이거는 그냥 서로 싸우던 게 다 없어지고 화목하게 ‘아이구, 우리 부모가, 우리 형제들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또 우리 형제가 삼 형제밖에 없는데 우리가 왜 그랬지?’ 하면서 뉘우치면서 화목하게 술을 마시더니, 그때서부터 그렇게 화목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부부지간의 화목도 그렇고 모두 자기가 자기라는 그 마음에서 일으키고 ‘흥, 내가 숙여? 내가 하는 게 옳은데. 내가 잘못한 게 뭐 있어.’ 이럭하고선 일으켜 세우면 그거는 절대 화목이 올 수가 없습니다.
질문자6: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딸이 재수를 하는데요, 시험 때만 되면 공부가 안 돼가지고 목도 아프고 방황을 하는데요, 저걸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스님: 아, 그것도 마음의 조작 아닙니까? 자기가 하려니 능력이 닿지 않고 하니깐 어깨가 무겁고 정신이 혼미하고 그렇게 돼서 병이 나는 거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거를 병이 있어서 있는 게 아니니깐, 관하는 법을 열심히 배워서 하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