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현 스님의 스님이야기
선곡 스님(하)
선곡 스님은 선암사에 내려와 있다가 용성 스님이 함양에 농원을 내서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청정수행을 한다는 말을 듣고 함양으로 갔다. 농원에서는 백장의 선원청규를 따라 ‘하루 한 때라도 일하지 않으면 한 끼도 먹지 않는(一日不作 一日不食)’ 살림을 살았다. 스님도 3년간 농사짓고 좌선하며 용성 스님을 시봉했다. 그뒤 우리나라 선방 중 ‘남지리(南地異) 북향산(北香山)’이라 하여 북의 묘향산 보현사선방과 함께 선방으로 유명한 지리산 칠불선원(七佛禪院)에서 조실을 살았다.
이때 순천 선암사 칠전선원에는 선곡 스님의 은법사인 선파 스님이 서울 대각사에서 용성 스님을 모시고 있다가 칠전선원에 내려와 조실을 살다가 열반하셨다.
선암사는 흔치 않은 육방살림(六房山林)의 전통이 있는 사찰이다. 전체를 여섯 덩어리로 나누어 전각 자체가 특별한 가풍을 이어가는 별도 수행체계를 갖추어 생활하면서 그 여섯이 모여 하나의 총림체제(叢林體制)를 갖춘 것이다. 달마전, 미타전 등 일곱 개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칠전은 출가한 지 30년이상 되는 구참납자들이 결제와 해제를 따로 정하지 않고 일년내내 안거에 드는 상선원(上禪院)으로, 스무 명이 넘지 않는 단촐한 살림을 살았다. 바로 오른쪽 옆 무우전(無憂殿)은 정업원(淨業院)이라 하여 능엄주나 대비주 등의 진언을 외우는 전각이다. 50여명의 수행자가 밤낮으로 진언을 염송하며 살았다.
칠전을 내려와 원통보전, 불조전, 장경각 등을 지나 왼쪽의 천불전(千佛殿)은 강원(講院)으로 40여명의 대중이 함께 살았다. 바로 아래 창파당(蒼波堂)은 도감원(都監院)으로 총림내 모든 행정 및 법회 등의 절차와 살림살이를 살피는 곳이다. 요즘으로 하면 종무소격으로 소임 스님 10여명이 살았다. 만일(萬日)은 염불원(念佛院)으로 만일염불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대웅전 오른쪽 아래 심검당(尋劍堂)은 하선원(下禪院)으로 결제동안 특히 열심히 수행정진하는 신참납자들이 모여 살았다.
각기 전각에는 별도의 조실(祖室)을 모시고 살았으며 공양간과 뒷간이 따로 있었을 정도로 일정한 독립성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총림전체의 의사를 표하거나 밖에서 대표할 일이 있으면 칠전선원의 조실이 전체의 조실로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방장(方丈)역할을 하였다. 모든 전각이 독립적인 역할을 하다보니 전각마다 살림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곳이 필요하므로 2층 누각형태의 건물을 형성하게 된 것이 또한 선암사의 특징이기도 하다.
선암사 스님들은 선파 스님의 다비를 모시고 얼마 안 있어서 칠불선원으로 선곡 스님을 찾아와 칠전선원에 머무르면서 납자들 지도해줄 것을 요청해 스님은 본사인 선암사로 향했다. 그러다가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서 절이 어려워지자 주지까지 맡아 살림을 살았다. 선암사는 산이 깊어서 낮에는 경찰이 무대로 삼고 밤에는 반란군이 무대로 삼아서 대중들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대중들은 피란을 가고자 하였지만 스님은 대중들만 보내고는 혼자서 선암사를 지켰다.
그러자니 밤낮으로 당하는 고생이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낮에는 경찰이나 군인들이 와서 밥 달라고 하면 내주고, 밤에는 빨치산이 그러면 또 내주고는 하였다. 그런데 고마워해야할 그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경찰에게는 빨치산에게 밥을 해준 사실이 밀고 되고, 빨치산에게는 경찰에게 도움을 준 일이 고변되어서 양쪽에서 선곡 스님을 못살게 군것이다. 낮에는 경찰이 와서 닥달을 하고 밤에는 빨치산이 매질을 하였다. 사정없이 쏟아지는 뭇매를 맞으면서 스님은 다짐했다.
“부처님 당시 포교제일 부루나 존자는 수로나지방의 험악한 사람들이 불교를 전파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돌과 나무로 때려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무상한 인생을 중단하고 평안한 세상으로 가게 하기 위해 때리는 것’으로 받아들여 사람들을 원망을 하지 않았다. 나도 부루나존자처럼 하리라. 아니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경허 스님처럼 매를 맞으면서도 좌선하는 자세를 풀지 않으리라. 수행자는 앉으나 서나 어떠한 경계가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내 그것을 제자들에게 늘 말해 왔는데 이번에 내 스스로 그것을 시험해 보리라.”
그리고는 매질을 하거나 말거나 좌선자세를 그대로 갖추었다. 몽둥이질에 밀려서 이리저리 구르면서도 가부좌한 다리를 풀지 않았다. 잘못한 사실을 불고, 도망간 상대편들의 간 곳을 대라고 매질하던 사람들에게 아무 말없이 돌부처처럼 좌선만 하고 있자 매질 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미안해 할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은 그 불편부당한 마음에 감동해서 풀어주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상황이 좋아지자 선암사에는 다시 대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상초유의 승단분규 즉 법란을 겪으면서 수행자연 하는 이들을 엄하게 꾸짖고 초연하게 도량을 지키면서 납자들을 제접했다. 1968년 제자들에게 “해가 뜨니 서방을 비추고, 달이 떨어지니 서방을 떠나는구나(日出照西方 月落離西方)”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