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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인쇄기술 지키려면 고서 보존해야”
여승구 화봉 책 박물관장
여승구 관장.
고서(古書)매물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달려가는 고서 전문 수집가 여승구 화봉 책 박물관장(68). 그는 1955년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학비를 벌기 위해 고서적 전문점 ‘광명서림’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책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83년 국내 최초로 ‘서울 북페어 행사’를 개최하면서 본격적으로 고서를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고서가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사라져 가는 게 안타까워서였다.

23년간 고서를 수집한 끝에 드디어 지난 10월 15일, 그간 모아온 13만 4천여 권의 고서로 자신의 호를 딴 ‘화봉(花峰) 책 박물관’을 개관했다. 고서적을 모아 인쇄ㆍ조판 기술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책 박물관을 만들겠다던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고서 수집을 시작한 이후 책을 찾아 도쿄, 마드리드, 파리 등 안 가본 도시가 없을 정도”라는 여 씨는 “화봉 책 박물관은 그동안의 결실”이라고 했다.

83년 당시 해외에 있는 한국 고서적을 찾아 여행하던 여 씨는 일본 오사카의 한 고서점에서 <천로역정(天路歷程)> 한국어 초판본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번역된 서양소설인 동시에 원근법을 사용한 기산 김중근의 삽화가 들어있어 자료사적 가치가 충분한 책이었다.
여승구 관장.
여 씨는 ‘제대로 된 물건을 만났다’는 생각에 120만엔(한화 약 1200만원)을 외상으로 긋고 책을 구입했다. 그러나 이 <천로역정>은 김포세관을 통관할 때 밀수품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고서 압류 당했다. 당시 김포세관장까지 만나 “우리나라 책을 들여오는데 무슨 밀수란 말인가”라고 간곡하게 설득도 해봤지만 책은 결국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이 당시의 상황을 여 씨는 “돈이 없거나 책이 없어서가 아닌, 폐쇄된 사회구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설명한다.

“한 나라의 문화재는 국제간 교류를 금지하고 제한법을 만든다고 해서 보존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규제를 낮추고 문화재를 더 많이 접하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하죠.”

그는 “문화재는 누군가가 독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그 문화재를 더 사랑하는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들에게 ‘책 사는데 돈을 다 써버린다’는 원성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사재를 털어 고서를 모아 박물관을 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여 씨가 박물관을 세울 수 있었던 데에는 부인 황선(64, 경희대 음악대학 학장) 교수의 힘이 가장 컸다. 황 교수는 지난 10월 26일 수원포교당에서 열린 나혜석 추모음악회를 기획하기도 했다.

고서를 수집하면서 여 씨가 특히 주력한 부분은 우리나라 책의 발자취와 인쇄발달사를 보여주는 고활자ㆍ고판화ㆍ고지도 영역의 인쇄본들. 덕분에 여 씨의 고서 콜렉션 중 7천여 권을 차지하는 조선시대 활자본과 약 500편의 고지도 등은 국내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고인쇄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불경(佛經)도 1천여 권 가량 소장하고 있다.

“불교가 우리나라 인쇄술에 끼친 영향은 막대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글로 전하는 과정에서 인쇄문화가 발달됐기 때문입니다. <팔만대장경>이나 <직지>가 바로 우리나라의 찬란한 인쇄 발달사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는 또 불경은 우리나라 판화의 발달사와도 맥을 같이 한다고 언급했다.
“불교경전 속에 등장하는 ‘변상도(變相圖)’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판화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부모은중경>등의 경전에서도 판화가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판화사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여 씨가 밝히는 불교경전의 사료적 가치는 이 뿐만이 아니다. 다른 고서들과는 달리 불경은 특이하게도 책 뒤에 책을 편찬하게 된 이유와 시기, 편찬한 장소를 비롯해 시주자, 화주자, 각수(刻手)까지 소상하게 밝혀 놓기 때문이다. 이 기록들은 책이 편찬된 시대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인쇄술의 의미가 각별합니다. 금속활자가 발명되고서야 비로소 책을 싼 값에 널리 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넓게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서양 민주주의의 싹이 텄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나라의 책 역사와 인쇄술은 문화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됩니다. 현재 독일 마인쯔에는 구텐베르크 박물관과 함께 박물관 부설 인쇄대학이 설립돼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200년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한 우리나라는 그간 제대로 된 고서박물관 하나 없었습니다.”

그는 인쇄출판 문화는 우리민족이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강대국들의 외침과 약탈로 고서들이 유실되어 버린 점을 안타까워했다. 또 그나마 남아있는 고서 또한 일반인들의 무관심과 외면으로 제대로 보존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화봉 책 박물관’은 일반인들의 ‘고서는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지우는 한편 소중한 문화유산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여 씨의 노력이 배어들어 있다. 박물관 한 쪽에는 고인쇄체험실도 제작해 놓았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해외 관람객들이 직접 목판에 먹을 묻혀 인쇄를 해보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인쇄술이 무엇인지 깨닫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결국 우리가 우리 문화재를 더 사랑하는 것만이 문화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번 박물관 개관을 계기로 고서의 중요성을 깨닫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하는 게 제 작은 바램입니다.”
이은비 기자 | renvy@buddhapia.com
2004-10-22 오전 10: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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