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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간 고서를 수집한 끝에 드디어 지난 10월 15일, 그간 모아온 13만 4천여 권의 고서로 자신의 호를 딴 ‘화봉(花峰) 책 박물관’을 개관했다. 고서적을 모아 인쇄ㆍ조판 기술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책 박물관을 만들겠다던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고서 수집을 시작한 이후 책을 찾아 도쿄, 마드리드, 파리 등 안 가본 도시가 없을 정도”라는 여 씨는 “화봉 책 박물관은 그동안의 결실”이라고 했다.
83년 당시 해외에 있는 한국 고서적을 찾아 여행하던 여 씨는 일본 오사카의 한 고서점에서 <천로역정(天路歷程)> 한국어 초판본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번역된 서양소설인 동시에 원근법을 사용한 기산 김중근의 삽화가 들어있어 자료사적 가치가 충분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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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문화재는 국제간 교류를 금지하고 제한법을 만든다고 해서 보존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규제를 낮추고 문화재를 더 많이 접하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하죠.”
그는 “문화재는 누군가가 독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그 문화재를 더 사랑하는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들에게 ‘책 사는데 돈을 다 써버린다’는 원성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사재를 털어 고서를 모아 박물관을 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여 씨가 박물관을 세울 수 있었던 데에는 부인 황선(64, 경희대 음악대학 학장) 교수의 힘이 가장 컸다. 황 교수는 지난 10월 26일 수원포교당에서 열린 나혜석 추모음악회를 기획하기도 했다.
고서를 수집하면서 여 씨가 특히 주력한 부분은 우리나라 책의 발자취와 인쇄발달사를 보여주는 고활자ㆍ고판화ㆍ고지도 영역의 인쇄본들. 덕분에 여 씨의 고서 콜렉션 중 7천여 권을 차지하는 조선시대 활자본과 약 500편의 고지도 등은 국내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고인쇄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불경(佛經)도 1천여 권 가량 소장하고 있다.
“불교가 우리나라 인쇄술에 끼친 영향은 막대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글로 전하는 과정에서 인쇄문화가 발달됐기 때문입니다. <팔만대장경>이나 <직지>가 바로 우리나라의 찬란한 인쇄 발달사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는 또 불경은 우리나라 판화의 발달사와도 맥을 같이 한다고 언급했다.
“불교경전 속에 등장하는 ‘변상도(變相圖)’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판화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부모은중경>등의 경전에서도 판화가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판화사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여 씨가 밝히는 불교경전의 사료적 가치는 이 뿐만이 아니다. 다른 고서들과는 달리 불경은 특이하게도 책 뒤에 책을 편찬하게 된 이유와 시기, 편찬한 장소를 비롯해 시주자, 화주자, 각수(刻手)까지 소상하게 밝혀 놓기 때문이다. 이 기록들은 책이 편찬된 시대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인쇄술의 의미가 각별합니다. 금속활자가 발명되고서야 비로소 책을 싼 값에 널리 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넓게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서양 민주주의의 싹이 텄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나라의 책 역사와 인쇄술은 문화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됩니다. 현재 독일 마인쯔에는 구텐베르크 박물관과 함께 박물관 부설 인쇄대학이 설립돼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200년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한 우리나라는 그간 제대로 된 고서박물관 하나 없었습니다.”
그는 인쇄출판 문화는 우리민족이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강대국들의 외침과 약탈로 고서들이 유실되어 버린 점을 안타까워했다. 또 그나마 남아있는 고서 또한 일반인들의 무관심과 외면으로 제대로 보존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화봉 책 박물관’은 일반인들의 ‘고서는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지우는 한편 소중한 문화유산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여 씨의 노력이 배어들어 있다. 박물관 한 쪽에는 고인쇄체험실도 제작해 놓았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해외 관람객들이 직접 목판에 먹을 묻혀 인쇄를 해보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인쇄술이 무엇인지 깨닫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결국 우리가 우리 문화재를 더 사랑하는 것만이 문화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번 박물관 개관을 계기로 고서의 중요성을 깨닫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하는 게 제 작은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