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불·효(佛·孝)’싣고 달리는 사랑의 캐딜락 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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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가 생시인가 손을 꼬집어 보는 할머니. “꽃마차 타고 시집갔는데, 죽기 전에 또 꽃마차 탄다”며 펑펑 우는 할머니. “그랑께 시방 내가 대통령이나 타는 차를 탔승께 인자부턴 내가 대통령이여”라고 목에 힘주는 할아버지. “당신은 지금 산에 묻혀 있는데 나만 이렇게 좋은 차를 타서 미안해요”라며 연신 눈물을 훔치며 밖을 내다보지 못하는 할머니.
배기량 5천 7백cc, 차 길이 7m 52cm의 푸루트우드 캐딜락 리무진과 샤워시설, 침실, 노래방, 씽크대, 비디오 시설이 갖춰진 국내에 단 한 대뿐인 캠핑카를 탄 어르신들의 반응이다. 익산지역 독거노인과 장애인, 백혈병 어린이들에게 리무진과 캠핑카로 무료 관광을 시켜 주는 이윤규(55·전북 익산)씨는 ‘노인분들이 차를 타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2001년 5월부터 이 차로 한 달에 5~6번씩 마이산, 내장산, 채석강 등으로 노인들을 모시고 나가 꽃구경과 함께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때로는 케익과 과일을 준비해 생신잔치를 열어 드리기도 한단다. 지금까지 이렇게 효도관광을 다녀온 노인은 줄잡아 2천여명.
그가 이렇듯 ‘리무진으로 효도관광을 시켜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독일의 한 장례식장에서다. “독일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리무진이 우리나라에서는 장례용 차량으로 사용되는 사실을 알고 효도 한번 못 받고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와 자식을 위해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 생각에 캐딜락을 구입하기로 결심했죠.”
“여보, 죽어서 좋은 차 타본들 무엇 하겠어요. 살아 생전에 태워 드려야죠”라고 조언한 부인 이옥금(48)씨의 말에 결심이 서자 그는 1999년 27년 간의 굴곡 많은 독일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01년 5월 캐딜락을 구입했다.
이렇듯 초호화 차를 소유했지만 이윤규 씨가 사는 집은 정작 23평짜리 임대 아파트다. 부인과 단둘이 사는 이 집은 20년 된 낡은 소파와 이웃들이 버린 것을 주워와 다시 사용하는 커튼 등 재활용품 전시장이다.
전남 강진의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의 어릴 적 소원은 ‘쌀밥 한번 실컷 먹어 보는 것’이었다. 1970년대 독일로 파송된 광부와 간호사가 보내 온 달러가 국민경제에 커다란 버팀목이었던 그 시절, 그 또한 1972년 군복무를 마치고 23살의 나이로 가족부양을 위해 독일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독일의 탄광촌 루루아게의 발줌광산 지하 4km의 막장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악착같이 돈을 벌었습니다.”
낮에는 석탄을 캐는 광부로 밤에는 타일 붙이는 미장공으로 하루에 1시간 새우잠을 자며 일했다. 광산에서 숙식이 제공돼 독일에서 번 돈은 모두 고국의 어머니에게 보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그였지만 고국에서 함께 왔던 동료들로부터 ‘돈벌레’라는 비난의 화살도 많이 받았다. 7년간 밤낮으로 탄광일 하랴 타일공 하랴 건강이 배겨나질 못했다.
그래서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정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벌이는 시원찮아도 조금은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힘든 독일 생활에서 가장 의지가 됐던 것은 부처님이었습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저는 매일 아침마다 <지장보살본원경>을 독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지요.”
특히 84세인 어머니 조복순 씨는 지금도 새벽 4시면 일어나 부처님 전에 청정수를 올려놓고 두 시간동안 기도를 올린다.
“어머니의 지극한 기도 정성이 있었기에 사고가 잦았던 독일 탄광에서도 무사히 일을 마친 것 같다” 는 이씨는 “지장보살님의 마음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독거노인과 장애인, 병 앓는 어린이들에게 계속 무료 관광을 시켜드리며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는 바람을 토로한다.
초호화 외제차를 갖고 있지만 그는 평소엔 리무진과 캠핑카를 타고 다니는 법이 없다. 70세 이상의 독거노인들과 장애인들에게 무료 관광을 시켜드리거나 공공기관의 공적업무에만 차를 사용한다. “캐딜락을 몰고 나가면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 졸부 보듯 따갑습니다. 돈푼 꽤나 있는 사람이 폼 잡으려고 비싼 차를 타고 다고 다닌다고 오해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제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사용하질 않습니다.”고 말하는 이윤구 씨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다. “독일에 있는 동안 동·서독이 통일된 것을 보고 너무나 기쁘고 부러워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나라도 하루속히 통일이 되어 이산가족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태우고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윤규 씨의 ‘불·효(佛·孝)’실은 사랑의 캐딜락은 오늘도 대한민국의 모든 어머니들을 모시고 그의 아름다운 마음만큼이나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화사한 단풍 숲길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