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7.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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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시위를 당기는 순간 ‘나’는 없다”
궁도(弓道)로 전하는 ‘선 사상 입문’
<활쏘기의 선>(오이겐 헤리겔 지음, 정창호 옮김, 삼우반, 9천원)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 독일의 철학자 오이겐 헤리겔(Eugen Herrigel)은 일본 도호쿠(東北) 대학 교환교수 자격으로 처음으로 일본에 발을 들인다. 6년간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궁도(弓道)를 배웠던 그는 독일로 돌아간 이후 당시의 경험을 책으로 펴냈다. 1948년 독일에서 출간된 <활쏘기의 선>은 이후 독일과 유럽에 일본의 선(禪) 문화를 알리는 필독서가 됐다.
일본 궁도의 명인 아와 겐조. 사진제공=삼우반


이 책이 최근 <연금술사>로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브라질 출신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가 “젊은 시절 영감과 열정을 일깨워준 책”이라고 언급함으로써 다시 한 번 세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책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학창시절부터 신비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던 헤리겔은 ‘선불교’를 일종의 ‘신비주의의 동양적 발현’으로 여기고, 선 사상에 접근할 수 있는 방편으로 활쏘기를 배우게 된다. 처음에는 활시위를 당기지도 못하던 헤리겔은 일본 궁도의 명인 아와 겐조(阿波硏造, 1880∼1939)의 지도 하에 ‘대나무 잎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눈처럼’ 화살을 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궁사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는 지극히 비서구적인 가르침을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활쏘기의 선> 표지

책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헤리겔이 스승과의 대화를 통해 ‘활쏘기의 비밀’을 전해받는 대목이다. 가령 활을 제대로 당기지 못해 오랫동안 고생하던 그는 스승이 가르쳐 준 호흡법을 익히자 활쏘기에 성공하게 된다. “왜 처음부터 호흡법을 말해주지 않았냐”는 헤리겔의 질문에 스승은 답한다.

“만약 수업을 호흡법에서 시작했다면, 아마 호흡에 결정적인 것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거듭된 시도를 통해 좌절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던져 주는 구명 튜브를 움켜쥘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스승은 “활쏘기에 이르는 길은 마음이 순수하고, 활쏘기 외에는 잡념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열리게 마련”이며 “활을 쏠 때는 쏘는 사람 자신도 모르게 쏘아야만 흔들림이 없다”고 말한다. 무심(無心)의 상태에서 ‘함이 없는 함’을 해야 한다는 ‘활쏘기의 기예’는 바로 선불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일본 궁도와 선에 대한 보고서이자 넓은 의미에서 ‘서양인의 동양 문화 체험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헤리겔은 일본의 선불교를 유럽에 알리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서양인들이 동양, 그 중에서 일본과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신비적이고 반이성적이라 여기던 ‘선’의 요체를 시종 진지한 자세로 깨우쳐나가는 그의 노력도 흥미롭다. 이미 출간된 지 5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책이 독자들에게 유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
2004-10-15 오후 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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