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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호북성(湖北城) 성도 무한(武漢)에서 의성(宜城)까지 고속버스로 꼬박 6시간. 택시를 임대해 물어물어 겨우 방 거사가 수행했다는 방거촌(龐居村) 방거동에 도착했다.
방거동은 일반에 알려지지 않아 왕집진(王集鎭)에 가서야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게 됐다. 중국땅 어디에서도 방 거사는 물론 방거동에 대해 아는 이가 거의 없어 헛걸음하는 것은 아닌지, 가는 길 내내 불안에 떨어야 했다. 광활한 중국 땅을 헤매고 나선 것은 인도 유마힐 거사, 한국의 부설 거사와 함께 세계 3대 거사로 추앙받는 방 거사를 만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절도사 우적이 쓴 <방 거사 어록>에 따르면 방 거사는 중국 당나라 때 호남성 형주사람으로 이름은 온(蘊)이고 자는 도현(道玄)이다. 아버지가 형양의 태수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친구 단하와 과거 시험을 보러가다가 주막에서 스님을 만나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선관장(選官場)에서 관료가 되기보다 선불장(選佛場)에서 부처 되는 것이 으뜸이다”는 스님 말에 부처되기를 발원하고 당대의 선지식인 석두, 마조 스님 문하로 들어간다. 여기서 친구 단하는 훗날 목불을 태워 사리를 찾던 단하 천연(丹霞天然) 선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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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방 거사에게는 이미 부인과 일남일녀의 가족이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이를 탓하지 않았다.
그 후 방 거사 식구들은 대나무 바구니를 짜서 시중에 팔아 생활했다.
방 거사가 호북성 방거촌에서 수행하던 때는 호남성 동정호에 재산을 버린 후다. 방거촌에는 방거사가 은거했던 ‘은사거(隱士居)’라는 동굴이 남아있다. 지역민들이 ‘방거동’으로 부르는 이 동굴은 마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야산 7부 능선에 자리해 있다. 동굴 입구엔 ‘은사거’란 명패와 7언 2구의 글이 주련마냥 돌에 새겨져 있다.
산중일월한래왕(山中日月閑來往)
산중의 해와 달은 한가로이 오가고
동구연하자고금(洞口煙霞自古今)
동구의 저녁 연기 예와 다름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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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유로 방 거사가 방거동에 은거하게 됐을까. 동네사람들에 따르면 “당시는 나라가 혼란스런 시기여서 싸움을 피해 왔다”고 전한다.
또한 “지역에서 도인으로 추앙받았고, 훗날 홀연히 남쪽으로 떠났다”고 한다. 재산을 호수에 버린 후여서 생활은 ‘무소유’ 자체였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대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았을까’ 하는 마음에 동굴 밖을 둘러보니 대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동굴에서 내려다보이는 비옥한 대지에는 지역특산물인 목화, 땅콩, 옥수수가 한창이다.
방 거사는 철저히 필요한 만큼만 생산활동을 해서 그날그날을 자유롭게 살았다. <백장 청규(百丈淸規)>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의무가 강조된다면, 방 거사의 생활은 ‘수행에 걸림없도록 필요한 만큼 일한다는 것’이다.
동굴 왼편 벽면에 청나라 때 새긴 ‘유방백대(流芳百代)’란 비석이 있다. 동행한 병진 스님(지난 9월 중국 칭따오에 한국사찰 장안사 창건)의 해석에 따르면 ‘방 거사를 추앙’하는 내용이라 한다.
이런 연유로 훗날 방거동에는 방거사(龐居寺)라는 사찰이 건립되어 수백년간 이어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중국 전역을 휩쓴 문화혁명때 폐찰되고 말았다.
‘방거촌 소학교’ 서기 호가보(胡家普·53) 씨에 따르면 “1949년 방거동 절을 무너뜨려 목재를 가져다 소학교건물을 지었다”고 증언한다. 당시 커다란 불상이 사람들의 힘으로 넘어가지 않자 물소가 끌어 훼손했다는 것이다.
마을 중앙에 자리한 소학교에는 곳곳에 방거동 절의 유물이 남아있다. 아이들이 밟고 다니는 계단석 가운데 절에서 가져온 비석이 놓여있기도 했다. 학교 정문 양쪽엔 사찰에서 옮겨온 초석이 방치되어 있다. 호 씨는 “방거촌 지명이 방거사에서 유래됐다”며 “지금도 음력 3월 3일이면 마을사람들이 방거동을 찾아 한해 행운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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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거사는 마조 문하에 있는 많은 선승들과 교류하면서도 수행에 있어 독특한 면을 보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 하지만 나는 순간의 고요를 즐긴다. 돈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고요 속에 본래의 내 모습이 드러난다. 탐욕이 없는 것이 진정한 보시요,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진정한 좌선이다. 성내지 않음이 진정한 지계요, 잡념이 없음이 진정한 구도다.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인연따라 거리낌없이 사니 모두가 반야의 배를 탄다.”
이렇듯 방 거사와 가족들은 얽매임 없이 유유자적하며 자유인으로 살았다. 그들의 마지막 열반모습은 평소 어떻게 살았는지를 짐작케 한다. 방 거사가 딸 영조에게 죽을 시각인 정오가 되면 알려달라고 하자 영조는 ‘일식(日蝕)이다’며 방 거사를 집밖으로 불러내고 자기가 아버지 죽을 자리에 앉아 숨을 거둔다. 결국 방 거사는 딸의 장례를 치르고 7일만에 입적한다. 밭에서 일을 하던 아들이 아버지 소식을 듣고 괭이에 기대어 서서 죽자, 방 거사 부인은 아들을 화장한 후 좌탈한다.
시방의 모든 납자 함께 모여서 / 모두가 함이 없는 도를 배우니 / 이 곳은 부처 뽑는 과거장이라 / 마음이 공하니 급제하더라(十方同聚會 個個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젊은날 부처가 되겠다던 방 거사는 이렇듯 마음을 비우고 가족들과 함께 부처에 급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