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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진 유마 거사의 자취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00년대 초반부터 나온 인도 고고학회 연차 보고서를 샅샅이 훑었지만, 바이샬리에서 유마 거사의 흔적이 발굴되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의지할 수 있는 문헌자료라고는 7세기에 인도를 순례했던 삼장법사 현장 스님이 남긴 <대당서역기>뿐. 여기서도 유마 거사 관련 유적지에 대한 언급은 두세 군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마거사가 붓다와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1000년이 넘게 지난 후에 쓰인 기록이다. 그나마 인도에서 구할 수 있었던 <대당서역기> 영역본 한 권을 끼고, 델리에서 출발할 때부터 단단히 마음을 먹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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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목적지인 바이샬리 인근의 가장 큰 도시인 빠뜨나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빠뜨나에서 바이샬리는 도로 사정이 비교적 양호해 3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빠뜨나에서라면 혹시 책에 나오지 않은 정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1957년부터 60년까지 진행된 바이샬리 지역의 마지막 공식 고고학 발굴을 담당했던 K.P. 자이스왈 연구소(K.P. Jaiswal Institute)가 있는 곳이 바로 빠뜨나이기 때문이다. 당시 연구소장이던 알떼까르(Altekar) 박사는 발굴팀의 총책임을 맡았었다. 그래서 바이샬리를 찾기에 앞서 K.P. 자이스왈 연구소의 쵸두리 (Vijaykumar Chaudhury) 소장을 찾아 자문을 구했다. 거기서 얻은 조언은 유마 거사와 관계된 것 중 실제 발굴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뭔가 알고 싶으면 ‘현장의 <대당서역기>를 참고하라’는 것. 알고 있는 것의 확인 수준 이상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번에는 동 연구소의 전 소장인 빤디(Pandey) 박사를 찾아가 보았지만 여기서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래도 빤디 박사는 나란다에 있는 연구소에 <유마경> 힌디어 번역본이 있으니 찾아보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친절한 한마디를 덧붙인다.
#印 고고학 보고서 유적 발굴기록 없어
그냥 부딪쳐 보는 수 밖에…. <대당서역기>와 나침반을 들고 무작정 바이샬리로 향했다. <대당서역기>에서는 바이샬리에서 유마 거사와 관련된 장소를 두 군데 언급하고 있다. 한 군데는 부처님께서 <유마경>을 설하셨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왕궁을 기준으로 하여 서북쪽으로 5~6리 쯤 가면 가람이 있고, 가람 옆에 있다는 스투파(탑)가 바로 그 장소이다. 이 가람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3~4리 가면 또 다른 스투파가 있는데, 이 스투파가 세워진 곳이 예전에 유마 거사가 살았다는 집터라고 한다. 우선 기준이 된 ‘왕궁’이라는 곳이 문제인데, 이것은 현재 발굴되어 있는 ‘비샬왕의 집터’일 가능성이 높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이 왕궁만 해도 반경 4~5리에 달한다고 했다. 그러나 발굴된 왕궁 터는 채 100미터도 되어 보이지 않는다. 왕궁에서 서북쪽으로 5~6리 떨어져 있었다는 가람은 그나마 이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다시 그 가람을 기준으로 유마거사의 옛 집터를 찾아야 하는데, 가람터를 모르니 집터 역시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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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진리’ 중국 선종서 적극 수용
그리고 그의 집은 ‘불이법문(不二法門)’의 경지에 대한 성현들의 심포지엄(?)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유마경>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서 유마거사는 “절대 평등한 경지에 대해 어떻게 대립을 떠나야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대중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러 보살들이 단지 더러움과 깨끗함, 아름다움과 추함 등 이원적이고도 상대적인 개념을 벗어나는 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들어가는 관건이라는 대답들을 했다. 뒤이어 지혜의 화신 문수사리보살이 대답하기를, “모든 것에 있어서 말도 없고, 설할 것도 없고, 나타낼 것도, 인식할 것도 없으니 일체의 문답을 떠나는 것이 절대 평등, 즉 불이의 경지에 들어가는 일이라 생각한다.” 즉, 문수보살은 ‘입불이(入不二)’란 무언무설(無言無說)이라 정의하고, 모든 것에서 진실로 시비를 떠났을 때에 이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문수사리보살은 같은 질문을 유마 거사에게 되물었다. 이 때 상황을 경에서는, “유마는 오직 침묵하여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든 행동이나 언어의 표현은 소위 신발 위에서 가려움을 긁는 것과 같아서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나 도달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유마 거사는 침묵으로 웅변했던 것이다. 이같이 유마 거사가 설한 침묵의 진리를 중국 선종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생활 속의 선으로 정착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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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 거사는 그 때나 이제나 말이 없다. 바이샬리를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그의 행적을 읽을만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알려주는 또 하나의 불이법문의 경지인가.
그래, 어쩌면 무엇이 남아있건, 또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건,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할 것인가. 아쇼카 대왕이 제국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에 남겼다던 대연회장.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수초 무성한 늪으로 변해버리지 않았던가.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유마 거사가 침묵으로 설한 불이법문의 도리는 얼마나 지순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을 것인가.
글·사진/인도 바이샬리=이지은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