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시대에 학문의 분야도 더욱 세분화, 전문화되는 가운데 불교와 제과학의 접맥은 불교의 생활화, 현대화, 세계화를 위해 시급히 정립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소위 ‘불교 응용학’ 분야가 시대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직 학문적인 정립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198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본격화되기 시작해 아직 학적 기초를 이루는 개념 규정과 방법론이 정립되지 못한 상태다. 이에 ‘불교응용학’의 학문으로서의 성격 규정과 바람직한 발전방향에 대해 고영섭 동국대 교수(불교학)의 제안을 들어본다.
부처님 전도선언은 ‘불교 응용학’의 근거
깨달음을 얻은 직후, 부처님이 전법하기를 주저한 것은 “너무나도 깊고 미묘하여 중생들이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어지러움을 느낄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이 때 범천이 법을 설해줄 것을 권청한 것은 “업장이 엷고 모든 감각기관은 영리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 교화하기 쉬운 중생들”이 있어서였다. 전자를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진리’인 진제(眞諦)라 한다면, 후자는 ‘언어로 설명되어 중생들을 알아듣게 하는 진리’인 속제(俗諦)라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구극적 진리(진제)와 방편적 진리(속제)인 이제(二諦)는 순수학과 응용학의 분기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전도 선언’은 속제의 언어이며 그것은 ‘불교 응용학’의 또 다른 근거가 된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간세계를 불쌍히 여기고 천인세계와 인간세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유행하라.”(남전장)
전법은 ‘진리와 실천의 병행’으로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부처님은 기의(義, 所詮)와 기표(文, 能詮)를 갖춘 ‘법’을 설하고 원만하고 청정한 ‘범행’을 설할 것을 주문한다. 이는 ‘법’과 ‘행’ 즉 ‘진리’와 ‘실천’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전도 선언에서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불교 내지 불(교)학의 길은 순수학과 응용학의 측면으로 나눠지고 있다. 지극히 방편적 개념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베네데토 크로체(1866~1952)가 “모든 역사적 판단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천적 요구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에는 ‘현대의 역사’라는 성격이 부여된다”고 역설한 것처럼 모든 역사의 방향 및 학문적 지향은 ‘현재의 역사’라는 관점으로부터 비롯된 ‘현재의 요구 및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불교응용학’ 역시 당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그들의 이해와 요구에 실제적으로 부응하면서 전개되는 학문인 것이다.
불교 순수학과 응용학은 방편
인도에서 비롯된 불교는 동아시아로 전개되면서 그 내포가 심화되고 외연이 확장되었다. 특히 학문분야는 크게 불타론(불학, Buddhology)과 불타의 가르침에 대한 학문(불교학, Buddhist Studies)으로 나눠졌다. 이 흐름은 다시 계정혜 삼학을 기반으로 문사철, 유불도, 선교 화회를 지향하는 ‘불학’과 근현대 서구로부터 비롯된 불교에 대한 객관적, 분석적, 문헌적 연구 일반을 총칭하는 ‘불교학’으로 계승되었다.
불학과 불교학이 역사적이고 내용적인 분류라면 순수학과 응용학은 방편적인 구분이라 할 수 있다. 순수학은 동아시아 불학의 전통적 범주인 ‘경학(고전주석학)’과 ‘선학’과 ‘수행’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와 달리 응용학은 종래 불학이 머금고 있는 ‘순정(純正)’ 혹은 ‘순수(純粹)’의 범주를 우리 현실에 보다 ‘실용적’으로 ‘적용’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불교 용학(用學)’ 혹은 ‘불교 응용학(應用學)’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응용 불교학’ 보다는 ‘불교 응용학’이 타당
종래 일부에서 사용해온 ‘응용 불교학’이라는 표현은 주체적인 학문의 전개라는 맥락에서 볼 때 주객이 전도된 명명이다. 응용학을 시대의 이해와 요구에 부응하여 실제적이고 실용적으로 적용한 학문이라 할 때, 이들을 통섭해야 할 불교 및 불(교)학이 하위 영역에 속할 수는 없다. 때문에 불학 내지 불교학 앞에 관형어 혹은 수식어로 ‘응용’의 모자를 씌우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것이다. 또 ‘불교와 제과학’이라고 할 때도 ‘불교+제과학’이라는 명명 역시 과정적 표현일 뿐만 아니라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명명이어서 학문명 내지 학문의 범주로 자리매김하기는 적절하지 않다.
‘불교 응용학’이란 명명 역시 불학 내지 불교학에 대한 대사회적 이해와 요구에 부응한 응용적 측면 혹은 해석적 측면에서 이루어진 학문명이다. 때문에 ‘응용’이니 ‘순수’니 하는 것은 지극히 역사적, 방편적 개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응용학은 이미 다른 분야에서도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함의를 지닌 학명으로 새롭게 활용되고 있다.
사회문제의 치유와 처방을 위한 응용학
실용학 내지 응용학에 대한 사례는 이미 세계 각국에서 이뤄지고 있다. 특히 사회과학에서는 양적 방법과 질적 방법 내지 규범적 지향(nomative orientation)과 경험적 접근(empirical approach)과 실천적 접근(practical approach) 등의 접근법들이 모색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다변화된 정보사회로 진입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이들 사회학의 방법론들이 지닌 분석적이고 해체적인 접근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들을 적절하게 원용하여 불교학 연구에 적용하면 불교응용학의 지평 확대에 도움이 될 것이다.
국내의 연구 현황 역시 이러한 사회학의 방법론들을 원용하여 인문학과 사회학 및 자연학까지 그 연구지평을 확대하고 있다. 불교생태학, 불교생사학, 불교사회학, 불교심리학, 불교경제학, 불교사회복지학, 불교여성학 등의 학문은 여타 학문분과보다 비교적 심화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불교 응용학의 노력을 ‘이론 정립을 위한 이론’인 메타이론으로만 한정할 수는 없다. “현대의 어떤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을 정립하는데 필요한 이론”을 넘어서서 그 문제를 ‘즉각적’ 혹은 ‘돈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초세속적 담론과 세속적 담론의 구분은 없어지고 그 문제의 ‘치유’와 ‘처방’의 길을 제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70년대부터 불교 응용학 본격 수용
우리 사회에서 불교응용학이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멀리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1906)로부터 비롯된다. ‘불교 순수학(宗乘, 餘乘)’보다 ‘불교 응용학(俗學)’의 과목에 많은 비중을 두어 주당 20여 시간을 포교법, 외국역사, 외국지리, 외국어, 측량학, 산업초보, 산술, 이과, 수공, 체조 등을 이수하도록 했다. 이후 불교사범학교, 불교고등강숙, 중앙학림, 불교전수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혜화전문학교, 동국대학, 동국대학교의 교과과정도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응용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라 할 수 있다. 동국대 불교학과에 불교사원경제론, 포교론(전법교화론), 종교학 및 세계종교사 등이 설강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특히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는 일반대학원 불교학과 석박사과정의 종래의 연구 범주를 ‘불교교학’, ‘불교사학’ 전공으로 정리하고 ‘응용불교학’ 전공을 새롭게 신설하였다. 일반대학원에 개설된 ‘연구’(석사과정)와 ‘특강’(박사과정)은 포교학, 불교사회복지학, 불교서지학, 비교종교학, 불교사회학, 불교경제학, 종교교육학, 불교윤리학, 불교의 여성, 불교고고학, 불교예술, 사원경제 등이며, 불교대학원에 설강된 ‘연구’는 불교사회복지학, 장례문화학, 불교호스피스과정 등이다. 교육과 연구에 전념할 학자의 양성을 타깃으로 하는 순수학 중심의 일반대학원과 달리 불교대학원은 비교적 응용학 중심으로 지향해 가고 있다.
대비→비교→삼투로 학제간 소통
불교학의 범주를 크게 짜보면 인문학의 분류로는 문학, 사학, 철학, 종교, 예술 분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대학에 개설된 학과와 교과과정과 대비해서 분류한 것이다. 사회학 및 자연학의 분류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의 분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응용학의 학제간 소통은 ‘대비’와 ‘비교’를 거쳐 ‘삼투’의 과정을 반드시 겪게 마련이다.
인문학은 불교문학, 불교사학, 불교철학, 종교로서의 불학, 불교예술(미술사, 음악사, 무용사, 서예사, 영화사 등)로 소통될 수 있다. 사회학 및 자연학은 불교정치학, 불교경제학, 불교사회학, 불교문화학, 불교과학(생태학, 생사학, 인지학, 가상학, 한의학 등) 등이 될 것이다.
문제는 불교학과 여타 학문과의 관계를 정립할 때 타학문의 분과(학)으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 타학문을 불교학의 범주로 끌고와 주체(자아)화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학의 내포를 심화하고 외연을 확장하는 길이다.
‘대학원 협동과정’ 개설해야
불교응용학은 이제 교과과목을 설강하는 차원을 넘어 ‘학부 학과’ 개설 내지 ‘대학원 협동과정’의 개설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불교학과 해당 유관 학문들과 학제간 협동을 통하여 새로운 형태로 상호협동 연구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불교계의 적극적인 수요창출이 있어야만 한다. 때문에 교계나 종단에서 해당 불교응용학의 양산을 위한 기금 확보 및 여론 조성이 이뤄진 뒤에야 비로소 전공자의 지속적 양산이 보장될 수 있다.
그러한 장치 없이 ‘당위’로서만 순수학 종사자를 비판하는 한 순수학과 응용학 모두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다. 한 학문 분야의 종사자가 한 천명쯤은 되어야만 상호 비판과 상호수렴이 가능하게 된다.
기금·연구소 개설 등 제도마련 시급
불교가 우리사회의 거대 종교로서 다수의 신도를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학자군이 두텁지 못함으로 인해 신도수에 걸맞는 위상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양산되는 젊은 학자군조차 제도적으로 흡수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당위’로서만 응용학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응용학 탐구를 위한 각종 연구소나 센터들을 개설하여 지속적으로 수요를 확보해 주어야만 순수학 전공자들도 응용학으로 방향을 틀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순수학 전공자들도 실용학에 대한 수요의 감각을 유지하면서 연구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와 응용, 현실과 당위, 공급과 수요의 마찰을 중도적으로 화회(윤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두 항을 아우를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급선무이다. 언론과 학계와 불교계가 하나의 원 속에서 서로 협동하고 연생할 때 구심력을 지닌 순수학은 응용학의 원심력으로 확산되고, 원심력을 지닌 응용학은 순수학의 구심력으로 응축될 것이다. 그러할 때 불교학은 건강하게 자기비판(포살)과 상호비판(자자)을 유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