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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문은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전문 감독 알랭 두아일리 씨의 외규장각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사전 답사 차원에서 이뤄졌다. 프랑스에서 인터뷰 촬영은 이미 마친 박 박사는 “두아일리 씨의 한국 내 촬영에는 관여하지 않으려 했으나 맹랑한 질문을 하는 것을 보고 아무렇게나 다큐멘터리를 만들지 않을까 두려워 협조하기로 했다”고.
전등사 방문은 이날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왕실의 전적(典籍)을 보관하는 사고(史庫)였던 강화도 외규장각을 약탈한 프랑스군을 물리친 전투지인 정족산성과 함께 포함됐다.
정족산성 남문을 통해 전등사에 들어선 박 박사는 경내에 가득한 불교문화와 자연에 매료된 눈치였다. 보호수로 지정된 400년 됐다는 느티나무를 향해 “너는 역사를 다 알겠다”며 “역사를 말하는 느티나무”라고 말을 건넸다.
특히 대웅전 밖에 길게 늘어뜨려진 ‘외규장각 도서 반환 기원 만등불사’ 플래카드에서 국민의 염원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박 박사는 “국민의 뜻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마치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이 짜르르 하다”고 말했다.
<직지>와 외규장각 도서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많은 불이익을 봤던 그로서는 조국에서의 외규장각 도서에 대한 큰 관심이 무척이나 반가웠던 모양이다.
박 박사는 “나는 프랑스에서는 국가의 기밀을 누설한 자로 취급 받고, 한국 관료로부터는 괜한 문제를 야기하는 골칫덩이로 인식돼왔다”면서 “하지만 조국에 대해 특별한 기대를 가진 바 없었고, 나의 사명을 다 한 것뿐이므로 서운함은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조국은 그에게 1999년 은관훈장, 2001년 해외동포상 등을 수여함으로써 한참 뒤늦게야 고마움을 표했다.
곱지 않은 시선을 무릅쓰고 외규장각 도서를 12년이나 걸려 요약·정리해서 책으로 펴내는 등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 까닭에 대해 그는 “<직지>든 외규장각 도서든 내가 찾은 이상 끝까지 책임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학자들은 쓸데없는 짓이라며 외면했지만, 병인양요 때 무엇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고 지낸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에 사명감을 갖고 연구했다는 것.
박 박사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 협상에 대해 “이제 국가간의 문제가 됐으니 반환되기만을 바랄 뿐이다”고 희망했다. 또 프랑스 소장 어람용유일본의궤와 국내 복본(複本)을 교환하는 방식의 반환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프랑스에 가 있는 외규장각 도서만으로도 안타까운데 무엇을 또 보낸다는 말이냐”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외규장각과 약탈도서 반환문제는 한국과 프랑스간 첨예한 입장차를 보여 왔다. 시작은 지난 1978년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베르사이유 별관 파손 창고에서 처음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면서 고서 반환 문제가 양국간 문화적 분쟁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반환추진은 1991년 10월 서울대학교에서 외무부에 추진을 의뢰, 이듬해 7월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이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요청하면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2001년 프랑스측은 외규장각 도서를 국내로 반환하는 대신에 국내에 소장중인 비슷한 가치를 지닌 우리 문화재를 대신 프랑스에 내주는 ‘등가교환’에 합의가 이뤄지는 듯했으나, 지난 해 현 정권이 재검토를 결정 원점부터 다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직지>에 담긴 오묘한 진리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몽고침략기에 민생구제를 위한 불교계의 노력이 <직지>에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산에 나무껍질도 없고, 들에 풀조차도 귀하던 각박한 시기에 국민의 정신적 지주를 마련하기 위해 <직지>를 찍어낸 것이니 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 일인가요.”
박 박사는 청주의 직지축제나 강화도의 삼랑성축제에 대해 <직지>와 외규장각도서의 소중한 가치를 제고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지역축제에 머물지 말고 점점 확대돼 전 국민의 축제로 승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80을 바라보는 박 박사는 아직도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현재 그는 2005년 출간을 목표로 불어판 <한국사>를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