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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23명의 사형수가 한꺼번에 처형된 이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사형집행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사형수들에게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죽지 않은 날’이다.
‘사법 살인’이라고도 불리는 사형제는 현재 전 세계 121개국에서 폐지한 제도로, 유럽연합(EU)은 가입 조건으로 ‘사형제 폐지’를 내걸고 있을 정도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사형수 출신’인 열린우리당 유인태 의원이 사형폐지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혀 사형제 폐지 논란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그 어느 때보다 법안 통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시점에서 30여 년간 사형제 폐지운동에 앞장서 온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 회장 이상혁(69) 변호사를 9월 23일 서울 공덕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72년부터 자원봉사로 구치소 재소자 교화활동을 시작한 그는 74년 서울구치소 교화협의회장을 맡아 본격적인 교화활동을 펼쳐왔다. 처음엔 가족도 모르게 시작한 그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드러난 것은 87년, 2,000여 명의 재소자를 교화한 공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후부터다.
“선행은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되, 자의든 타의든 남에게 알려지면 곱으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 상을 받고나니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교화활동에 앞장서던 그가 사형제폐지운동으로 눈을 돌린 것은 75년 전남 광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오며 17명을 살해한 범인 김대두 씨의 변호를 맡으면서부터다. 법원에서 아무런 변론도 하지 않던 김 씨를 설득해 말문을 열게 했지만, 결국 그는 처형을 당했고 이 변호사는 사형제의 정당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생명은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생명권 등 모든 기본권의 바탕이 되는 ‘절대적 가치’입니다. 사형제도를 폐지하자는 것은 사형수들을 풀어주거나 그들의 형량을 턱없이 낮추자는 말이 아니라, 그들을 교화를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도덕성 회복운동이자 평화운동이며 생명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89년 5월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이하 사폐협)를 결성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 그는 일본 최고재판소 판사 단도 시케미쓰의 <사형폐지론>을 번역해 자비로 사회 각계 인사 3천여 명에게 책을 보내는 등 사형제 폐지의 정당성을 알리는데 주력해왔다. 사형폐지운동을 시작한 초기에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항의전화도 숱하게 받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왜 사형제가 폐지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자료와 책자를 보내주겠다”고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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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 생활비라도 벌겠다며 재소자들의 빨래를 해주고 돈을 벌었던 ‘엄마 사형수’와 다른 재소자들을 교화하며 이 변호사에게 100여 통의 편지를 보낸 30대 청년 등 전국 각지에서 100여 명의 사형수를 만나왔다는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사형수 서채택 씨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재소자들 사이에서 ‘생불(生佛)’이라 불렸던 서 씨는 ‘개심하고 나가서 다시는 들어오지 마라’ ‘자꾸 교도소 들락거리면 나처럼 된다’며 재소자 교화에 힘썼다. 스스로 수번(囚番)을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번으로 정했던 서 씨는 결국 92년 ‘108번뇌 모두 떨치고 간다’는 말을 남긴 채 처형됐다.
“수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앙굴리말라(Angulimala)도 제자로 받아들인 부처님은 일체중생의 생명이 모두 존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어느 종교보다 자비와 용서를 강조하는 불교계가 사형제 폐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종교에 의지하게 되는 재소자들을 위해 불교계가 교화활동이나 사형제 폐지운동에 앞장서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또한 그는 ‘나는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구하고 또 구하겠다(吾救救 九死一生)’는 뜻으로 선정한 전화번호(599-9413)도 얼른 바뀌길 바란다.
“변호사법 1조에는 ‘사회정의와 인권옹호를 변호사의 사명으로 한다’고 되어 있어요. 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변호사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큰돈은 못 벌었어도 변호사라는 직업윤리를 실천하는 데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죠. 허허.”
문득 그의 방에 걸려 있는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일흔을 바라보는 그가 30년을 지고 온 ‘사형제 폐지’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국내 사형제 현황>
지난 7월말 기준,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는 58명이다. 문민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 23명의 사형수가 한꺼번에 처형된 뒤 지금까지는 사형이 한 건도 집행되지 않고 있다. 10년 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으면 ‘사실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하는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기준에 따른다면 우리나라도 2008년이면 이 범주에 들게 된다.
사형제 폐지에 대한 찬반논란이 지속돼오던 지난 7월 열린우리당 유인태 의원이 “사형제도 폐지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키로 했다”고 밝혔지만, 며칠 후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붙잡히자 사형제폐지 반대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고다. 현재 유 의원은 이 법안을 국회 법사위에 상정하기 위해 국회의원들의 서명을 받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