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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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불교 용어 표준화에 반대한다
누가 2000년의 불교 용어에 함부로 칼을 대는가

한형조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최근 ‘불교용어표준화불사위원회’가 진행하고 있는 불교용어 표준화작업에 대한 입장을 현대불교신문사에 보내왔다. 다음은 한교수의 기고문 전문이다.

듣자니, 한국불교학회, 불교학연구회, 인도학회 등 14개 불교학술단체가 그동안의 한문 용어를 ‘버리고’ 새로운 불교 용어를 ‘창안’하겠다고 선포했다. 그것도 연구에 필요한 참고 자료로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의무적으로’, 즉 강제로 쓰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표준화 작업이 완료되면 교과서 제작이나 논문 작성때 의무적으로 표준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다음뉴스에 인용된 서울신문의 기사) 사실인가.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한국불교학회는 이 표준화 작업이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거기 총무이사인 김용표 교수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표준화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고,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어디 따져보자. 우선, 문제를 이렇게 설정한다. 1) 왜 새삼 불교 용어가 표준화되어야 하는가. 2) 한다면, 어째서 인도식 발음으로의 복고인가. 3) 그것이 몰고올 이익과 손해는 무엇인가.

1) <불교 용어 표준화 불사 위원회>가 내세운 표준화의 이유는 불교 용어가 중구난방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Kumalajiva(*장음 표기는 생략했다)의 우리말 표기가 ‘구마라집’, ‘구마라습’, ‘구마라즙’, ‘꾸마라지바’ 등, “읊는 사람 각자의 학문 배경이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제각각이어서 불교서적을 읽을 때 의미 파악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지나친 바가 있다. 예로 든 구마라습은 십(什)자의 발음이 좀 애매한 특수한 경우이지, 대체로 우리말 한문 용어는 거의 통일되어 있다. “표준화는 이미 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가. ‘반야’, ‘열반’, ‘보리’, ‘시방’에 무슨 제각각이 있고 중구난방이 있는가.

2) 백보를 양보하자. 꼭 표준화해야 겠다면, 당연히!, 수천년의 경쟁과 담금질을 견뎌낸 한문 용어여야지, 근본도 모르는 새 용어를 ‘수입’하겠다는게 가당한가? 위원회는 말한다. 그동안 써 온 한문 용어들은 구마라습--새 표기법으로 하자면 ‘꾸마라지와’-- 등 역경사들이 산스크리트와 팔리어를 중국음가로 표현한 것이기에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초기 불교의 원음’을 ‘외곡했다’고 당당히 말한다. 정말 그런가. 그럼, 어디 물어보자.
누가 부처님의 원 발음을 복원할 수 있을까. 없다.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는 붓다의 열반 이후 수백년이 지난 후에 불교가 기록될 때 비로소 채택된 언어들이다. 고타마 붓다 그분은 ‘반야’라고 하시지도 않았지만, ‘쁘라갸’니, ‘빤냐’니, ‘쁘라즈냐’니, ‘한야’, ‘뽀오루어’라고도 하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벳어, 서장어, 한문, 영어, 우리말 가운데 누구도 종주권을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이제 관습과 유용성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놀라와라. 위원회가 채택한 표준 시안은 산스크리트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팔리어도 아니다. 이를테면 ‘쁘라갸’는 산스크리트 ‘쁘라즈냐’의 벵골 지방 사투리 발음이다. 세상에. 기가 막히네. 산스크리트어만 해도 한 다리 건넜는데, 그 한 다리 건넌 말을, 그 근처 동네 사람들이 하는 발음이라고 하여, 그것을 지금 우리더러 강요한단 말인가. 인도어 전문가들도 고개를 갸웃하는 그 외계인의 발음을 표준으로 삼자는 말인가.

내가 보기에, 위원회는 불교가 가장 경계하는 상견(常見), 즉 근본주의(fundamentalism)에 빠져있다. 그리고 위험하게도 수입상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기억하라. 한국 불교를 지켜온 것은 유학을 떠난 의상이 아니라,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선 원효였다는 것을. 중국불교를 일으킨 것은 끊임없이 인도의 원전에 조회한 현장이 아니라, 자신의 깨달음으로 당대 대중들의 불성에 직접 호소한 육조 혜능이라는 것을. 인도 유식을 그대로 수입한 법상종은 사라졌지만, 선(禪)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3) 인도 원음으로의 표준화와 그 전면적 강요는 한국불교의 숨통을, 마침내, 끊어놓고 말 것이다! 용어 표기 하나 갖고 너무 그러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겠다. 그렇지 않다. 용어는 그 안에 박제화된 의미만 통조림처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깊이와 표정과 울림, 그리고 신통력을 갖고 있다. 염불 소리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지만 깊이와 표정, 울림과 신통력을 갖고 있기에, 염불을 통해서도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곳, 극락정토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신성한 ‘소리’에 함부로 바꾸거나 칼을 대서는 안된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스와하”로 바꾼다고... 왜들 이러시는가. 대체 그들은 <예불문>이나 <금강경>, <반야심경>을 독송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인가. 이제 한역 <금강경>은 버리고, 모두들 산스크리트본 금강경을, 그것도 벵갈 사투리로 더듬거리며 짹짹거리며 독송하자는 말인가.

새 표준안이 마련되면, 당장은 불편하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전문가들은 어쨌거나 이 ‘이중 장치’에 적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만, 불교에 ‘이미’ 접하고 있는 대부분의 선지식들과 전국의 신자들, 그리고 문화계와 학계의 지성인들은 이 혁명에 구토를 느끼고, 그 수용을 거부할 것이다. 천년을 이어온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과 한국 불교의 전통은 단절되고, 혁명 정국이 오리무중을 헤매는 동안, 불교는 대부분의 청중들을 잃고, 자신의 생명력은 물론, 미래의 가능성까지를 스스로 고갈시킬 것이다. 그때 한국 불교의 등불은 꺼진다! 여기서 무슨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찾을 것이며, 어떻게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운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것인가.

지금, 불교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를 만드는 것은 당신들의 일벌리기와, 당신들이 기대고 있는, “오직 인도 원전 불교”라는 아상(我相)이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불교는 구경이 아니라 방편(方便)이라는 것을! 불교는 어디까지나 도구이므로, 궁극적 권위는 없다. 원전도 없다. 궁극적 권위나 원전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의 불성, 나의 마음일 뿐이다. 그러니 ‘하나의’ 불교란 없다. ‘표준화된’ 불교도 없다. 오직 불교를 말하고 익히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불교가 있을 뿐이다. 한문 용어는 존중되어야 한다! 왜냐.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지금’ 그 한문 불교의 기반 위에서 불교를 말하고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누가 토를 다는가.

한형조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2004-09-11 오전 10:54:00
 
한마디
착각은 자유이나 착각하도록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일명 사기라고 그러지요. 포준화 작업하는 분들은 다른 사람들을 착각하도록 만들고 유유히 지켜보고 즐기는 사기꾼들의 집합체인가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이끌어내지 못하고서 어찌 역사적 과업을 운운하는가요?
(2004-09-15 오전 12:23:19)
27
노파심은 이해되나 착각은 자유라고 본다. 깨달음을 이뤘다고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많지 않나 싶군요.
(2004-09-15 오전 8:31:04)
25
요즘에서야 팔만대장경이 국역되어 출판되었고, 시디로도 제작하고 있다. 한문본이야 요즘세대는 거의 들여다 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범어 원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정확하고 바른 불법의 광범위한 포교를 위해서는 한역 불경의 가치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역 불경의 번역의 문제점이 뚜렸이 드러나 있다. 첫째, 번역자의 안목이 밝지 못하여 한역이 확연히 법을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출판하기전에 명안종사들의 감수와 교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원전을 공부하는 학자와 한문본을 공부하는 학자 그리고 명안종사들이 원탁에 모여 사명감을 가지고 불경한역 결집을 점검하고 토론하는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다. 셋째, 명안 종사는 일체지를 성취한 각인이다. 세수,법랍, 문중, 종파를 불문하고 법을 질문하고 답하는 선불장이 마련되지 않았으니, 어떻게 명안종사를 인정하고 추대할 수 있겠는가. 넷째, 차선책으로 각문중, 종파에서 인가받은 종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역이 법리에 맞는지 감수하고 토론하는 자리도 준비하지 않았다. 팔만대장경은 언어를 불문하고 그나라 마다 하나의 통일된 불경으로 유통되고 있다. 한역 팔만대장경도 그리되어야 한다. 정법에 어긋나지 않으면 곧 바로 세계의 한글 대장경이 되는 것이다. 이러하면 수 많은 나라의 언어로 다시 번역되어 세계로 불법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업이 대단히 의미가 지대하다고 믿는다. 장차 기대 하시라. 목하 노력 중 이니라.
(2004-09-14 오후 3: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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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림없다구요님에게 조용한 호수에 물길이 일어나니 그 물결이 말이 되어 걸림이없다구요님에게 걸려서 들려졌구만. 또 표준화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는 것도 위험하다 했으나 그 씨앗은 확소나 확대나 그 시작과 끝이 무엇이 다르리요. 저 위에 금시조 하는 말은 호수의 물결이름을 모르고 함이 아니고 또 표준화의 확대 확소를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것 같다. 어떤 말을 하다보면 극단을 써서 소단의 씨앗의 방향을 바꿔줌으로 약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소단의 씨앗을 가만 놔두다 보면 극단을 넘어서 세상을 어지럽힘은 부처의 눈을 가려버림이라. 그래서 금시조가 노파심절에 하심이라고 아뢰데요. 학자들은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생각에 끄달려 학문을 한답시고 방향없이 학설을 내놓는 버릇은 무식한 듯 하지만 선객들의 일침을 맞기에 충분하다오. 어디서 감히 시비는 시비여 ! 그 알량한 걸리고 안걸리는 것을 모르고 한 소리인 줄 알아 ! 에 이 ! 이 사람들 !
(2004-09-14 오전 12: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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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림없다는 견해들을 보면 대단히 많이 걸려있는 듯하다. 표준화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는 것도 위험하다. 내마음대로가 부처님마음일까. 또 불교일까. 걸림없다고 하면서 말에 걸려있는 것은 망상이 아닐까를 생각해본다.
(2004-09-14 오전 11: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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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일한 틀안에 불교를 처 박아 넣으려는 사람들. 우매하다 우매하다 그사람들 보다 더 우매한 사람이 있을까 보냐! 불교의 교자도 모를 사람들 같으니라구... 불교의 대의는 툭터져서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어야 하는 것인데 부득이하게 표시 표기를 하려니까 문지를 빌려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각 나라와 민족과 문화에 따라서 그 뜻이 해석돼서 전해진 것이 불교고 한국의 불교 현실인 것이다. 그걸 획일적그로 용어를 통일하지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학자도 아니고 뭣도 아닌 단순한 독재자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용어정리 작업으로 인한 콩고물이나 바라는 사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서 그런 요상 괴상 망칙하고 똥기계 같이 우매한 발상을 한다는 말인가! 용어 통일하지고 제안한 자는 듣거라! 아가리 닥치고 가만히 있거라. 그러면 그것이 세상 사람을 돕는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004-09-14 오전 11: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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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에 계신 학자라는 분 들이 또는 불교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헛짓들을 해대그만 불의 가르침을 어떻게 알고 있길래 그러시는가! 표준화라니 그게 무슨 말이여. 표준이라는게 어디에다기준을 두고 그런담. 언어를 언어에다가 기준을 묶어놓으면 부처님의 뜻이 부서져 버리고 부처님 뜻에서 언어가 나오면 그것이 표준이지. 불교를 배운 사람들이 표준이란 언어로 부처의 얼굴을 가려버리고 불교하고 산다하니 캄캄한 사람이로구나 .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선불교가 살아있어 한형조같은 학자들이 이렇게 나서니 다행한 일이다. 꼭 선을 터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생각이 앞뒤가 발라야 학문도 바로하는 것이지 표준화니 근거없는 생각이 많은 게으른 사람들의 잠꼬대는 심히 안맞는 말이다. 정신있는 사람이면 한 번 생각해 보시오. 언어가 부족해서 표준화가 아니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또 불교공부에 방해되는 가. 그게 뭐 무슨 짓들이여. 학자는 그래야 하는 것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그런 학문이 있고 그런 학자가 있었던가. 물론 옛글을 되새겨 근원을 알고 요즈음글을 되살려 옛과 같이 살려내어 옛과 지금이 같이 살아감은 풍요로운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옛뜻은 소홀히 하고 불교 용어를 표준화 해서 불교를 만들어 놓으면 나라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데 그 표준화된 언어가 각 나라문화와 정서에 충돌하게 되면 부처의 뜻은 콩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려감이 뻔한 일이다. 그런 시간 보내지 말고 있는 부처의 말을 살려내서 그 상황과 그 문화와 그 나라에 맞게 뜻이 통함은 될일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각 나라마다 표현하는 것을 서로 이해하면 문제가 없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 나라마다 독특한 정서를 맛봄으로써 불교의 심오한 위대성이 더 넓어짐이 되니 이것이 화엄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표준화 작없에 용을 쓰는 사람들은 낮잠이나 푹자고 맑은 정신으로 잠에서 모두 깨어나시오.
(2004-09-14 오전 8:39:06)
28
가 아쉽다. 불교표준화는 단순한 사업이 아니므로 장시간의 토론이 필요하다. 불교용어표준화란 단어는 적합치 않고 불교용어정리 정도가 어떨까한다. 몇 몇 지각없는 학자들이 끌고 갈 단순한 문제는 정말 아니다. 교수라고 다 지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은 버리자.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교양수준으로 강의하는 교수들, 그것도 평생을 그렇게 보낸 교수들이 무슨 지각이 있으랴! 이들에게 이런 문제를 맡길 것이 아니라 조계종 교육부에서 정책사업으로 해야 한다. 교육부는 무엇을 하는가. 조계종사상사 정립도 시급하겠지. 하지만 불교가 있고 조계종도 있는것인데, 매일 조계종에 얽메여 있는 것도 우습다. 교육부에 산하단체인 연구원을 확대하여 불교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야한다. 제발 그만 싸우고 정치하고 불교를 위해 목숨바쳐 일하자.
(2004-09-13 오후 2:00:06)
26
불교를 배우고 실행하는 분들인지 의심스럽다. 불교는 대기설법이기에 사투리도 은어도 상관없다. 표준어 작업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가? 당사자의 조직을 세우려하는가? 그대들은 표준어로 공부해서 그 자리에 있는가? 표준어로 공부했다면 좀더 참다운 불자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막망상!!!
(2004-09-13 오후 1:4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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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교수임용에 불만이 많으신가 봅니다. 하기사 수요는 한정되어 잇고 공급은 넘쳐나니 이같은 문제가 생기나 봅니다. 그러니 아무리 우수한 인재라 해도 불교학을 공부 못하죠. 백수로 지내려면 몰라도... 그런데 무조건 해외에서 공부하고 왔다고 교수임용시킨다는 것도 문제가 있죠. 제가 보기에는 이번 표준화문제도 불교학에 있어 일반인들은 무시하고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 그것도 산스크리트나 팔리어를 접하는 사람들의 전유물로 만들려는 속셈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결과적으로는 표준화로 말미암아 일반인들의 불교공부는 아예 한물 갈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일 큰 문제라고 봅니다. 만일 이러하다면 소위 말하는 불교학자(주동자)들의 음모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불교교양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왔다고 해서 학자가 될 수없다고 부르짖는 이들도 자만과 이기심에 가득차 있습니다. 문제는 실력이지 어디서 무슨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꼬리표가 아니질 않습니까? 숨어있는 인재들을 발굴하기 위한 열린 제도적 대안을 요구해야지, 이미 한정되어 있는 교수자리를 차지못하였다고 이를 성토한다면 똑같이 어리섞을 뿐입니다.
(2004-09-13 오후 1: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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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뭐 하나?무엇 때문에 하는가 생각해 본다면 동대교수 문제가 따로가 아니라는 것 알 것이다.지금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가.왜 의치한 열풍인데... 설법보다 지방의대를 택하는 게 오늘날의 수험생이다.현실은 냉정하다. 동대에서 학위를 해서 타대학에 임용된다면 모르지만 얼마 전 동대에서 학위한 교수들 기를 쓰고 반대해서 해외학위 모스님의 교수임용이 끝내 좌절된 사례가 있었다.그 때 꽤 시끄러웠지. 중생을 교화하겠다고?너부터 바르게 해라.그러고도 불교학으로 밥 벌어 먹나.당신이 하는 것이 불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안 그래도 불교학자들 신심 없다는데 실력은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이공계기피현상을 낳고 의대로 몰리는 것도 미국에서 학위 해 와 봐야 기업체 연구소에서 40을 못 넘기니 나와서 치킨집이라도 해야 한다.왜 동대 불교대만 특별한데?그것도 불교대에서 이건 거꾸로 되어 스님이 민간인한테 쫓겨 나야 하지 않나. 실력검증 없고,경쟁 없고,학문의 이종교배 없이 어떻게 학문이 가능한가?
(2004-09-13 오전 11:09:54)
30
동국대교수들에 관한 성토를 하기전에 한형조교수가 왜 그러한 글을 썼는지 세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하려면 남을 따라가는것 보다 남을 능가할수있는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그런데, 현재 한국 조계종을 비롯 한국불교는 세계에 내세울만한 뾰죽한 독창성이 결여 되어있다. 불교용어의 표준화에 앞서 할일이 많을것 같아 의견을 쓴다.
(2004-09-13 오전 6:53:08)
22
거치고도 학자?일반인들이 입문하는,불교 교양을 익히기 위해 입학하는곳이 동대 불교 대학원인데 거기 나와서도 학자라구? 불교 이미지에 먹칠하고 있으면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게 하는 것이 자격없는 사람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까닭이다.실력,경쟁 위주 사회로 가야지 더구나 대학에서 경쟁을 거치지 않고 교수 임용이 가당한가.기득권은 일소되어야 한다. 세상을 흐리고 예토로 만들고 있으면서 무슨 교화를 입에 담으랴.병통은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다.종교가 기껏 자기네들 입에 풀칠하는 수단 기득권 누리고 있는 곳으로 바뀌어 버리니 이조 불교 탄압에도 산으로 쫓겨가 중은 저자 거리에서 맞아도 말 한 마디 못 했다. 스스로 이런 병폐를 가지고 있으니 무력할 수 밖에 없다.천덕꾸러기로 전락한 한국불교. 병들었던 고려불교.이러니 척불을 부를 수 밖에 없지.
(2004-09-13 오전 5:49:20)
27
이란 단어가 마음에 듭니다. 정말 학자라면 그래야지요. 정말 동의, 동의요!!!
(2004-09-12 오후 8:28:29)
24
문제는 세상이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일반인들이 이런 문제를 모를 거라고 생각 한다면 오산입니다.일반인들이 먼저 알고,잘 알고 그리고 여기서 논의하는 주제와 직접 관련도 있습니다. 한국불교가 그렇게 경쟁력이 없을 까닭도 없는데 이상하리만치 무력하다.집 떠나 출가자가 됐을 바에 뭐가 그렇게 걸리적 거릴까. 미국 불교학자 및 학부생 80%가 유태인.티벳불교가 세계를 제패하는 힘도 체니(對論)에서 나온다.이조 500년 척불이 지식인층인 유학자들과의 긴장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불교의 교육체계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티벳이 20년인 걸 감안해서 연한을 늘리고 종교환경에 대한 이해,그러니까 바이블도 넣어야 한다.너무 모른다.그러니 대처를 못 하지. 조계종은 파벌과 분규로 일관해 왔다.일 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동대 교수 문제도 그렇다.신심으로 제작되어야 할 불구공장이나 불구점에도 조계사 상가 등에도 기독교인들이 차지하고 있단 말도 들었는데 실태조사를 하지 않는가.그리고 전국 성보박물관의 설계자가 대부분 기독교인이라 불교계는 역시 대자대비하다고 절에서 벌어 십일조 낸다는 말이 기독교계에는 파다하다.이번 해인사 성역화 불사 설계자도 종교가 기독교인이다.설계자 종교조차 파악하지 않나.부석사 근일스님은 병에 걸려 신음하면서도 기독교 병원들이라 그들에게 돈 보태 주기 싫어서 참고 스스로 치료했다는 분이다. 동대하면 3류로 친다.이게 불교 이미지와 겹치지 않을까.동대가 3류면 한국불교도 3류며 일반인들이 어떻게 신심을 내 불교에 귀의할 마음을 내겠는가.거기에 동대 불교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나라고 이 문제 끄집어 내고 싶지 않지만 교수가 누구 밥그릇이나 챙겨 주는 곳이 아니다는 것이다.유야 무야 넘어 가자고?일본이 불교 종주국을 자부하는 이유가 학술불교로 셰계를 제패하기 때문인데 중국불교도 강한 교학의 전통 위에 있다.그래서 선사들의 저술이 오히려 교학을 훨씬 능가하지.한국불교도 이조 500년 척불을 다시 맞지 않으려면 지식인들과 대화가 가능하고 그들과 유리되지 않을 학술불교가 커야 하고 강원 교육 연한 연장 그리고 동대 불교대 문제처럼 3류학자가 기득권을 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이게 병폐 아닌가.
(2004-09-12 오후 8:21:46)
26
이 되어 표준화를 다룰 터이지 종립학교의 문제까지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 마음하면서 한없이 자기종교하는 삿성이 일어나지 않을려면 소박한 불심과 한치의 틈도 인정하지 않는 엄격함을 혼동해서야 학자라 할 수 있을까요.
(2004-09-12 오후 7:44:28)
24
허수아비 이사장과 무능한 총장이라. 문제는 문제네요. 그런 문제는 그만두고 불교용어 표준화나 심도있게 다루지요.
(2004-09-12 오후 7:24:13)
24
조계종단이 동대의 설립자이고 이사장이 조계종스님이고 하니 동대를 이끌어가는 세력은 조계종단이 분명합니다. 동대교수의 문제는 전체의 문제도 있겠지만 부분의 문제일 터이고 인사권이 있는 이사회의 많은 이사는 조계종 스님일 터인데 종단이 나서라는 얘기는 가능할까요.
(2004-09-12 오후 5:57:41)
24
위의 분이 동대교수에 대한 비판은 모르긴 몰라도 한국불교학회, 불교학연구회, 인도학회 등이 동대교수들이 이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한 한교수님이 지적하신 문제에 동대교수들이 많이 관여하기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 문제를 근원에서 해결하려는 지적은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요. 조계종단은 동대의 설립자입니다. 설립취지에 벗어난다면 당연히 취지를 바로잡는것이 마땅하지요. 불교의 인재양성을 위해 불교대학을 만든 선각자들의 뜻을 받들자는 위의 분의 말씀이 어떻게 압력이 됩니까. 구한말 스님들이 먹을 것도 없는 시대에 불교인재를 위해 시주도 하고 사찰재산도 내고해서 만든 학교입니다. 지금은 학생들 등록금으로 이끌고 간다고 해서 설립자가 자기 의지를 밝히지 못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학교를 설립하지 않았으면 등록금이 무슨 소용이겠소. 개교 100년을 맞이하여 불교대학이 불교연구로 세계 제일이 되는 것을 보아야 선각자들께서 기뻐하실것이 아닙니까.
(2004-09-12 오후 5: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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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교수를 싸잡아 비난하고 외국에서 학위를 따온 스님들이 떠돈다는 얘기는 논지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의아스럽다. 동대교수와 아무런 연관이 없으나, 또 조계종단에 동대를 정화하라는 언필칭 압력은 더욱 의아하다
(2004-09-12 오후 5:21:00)
27
윗 분이 정말 절절한 지적을 하셨습니다.동대교수들로 말미암아 정작 외국 유수 명문대에서 학위를 하고 돌아 온 학승들은 선방으로 떠 돌고 있습니다. 왜 불교는 이 모양인지 모르겠습니다.가뜩이나 외래 종교에 치이는 판에...동대 교수들,다른 직업을 찾기 권합니다.여러분 문제 알 만한 사람 다 압니다.심지어 출판사에 있으면서 여러분들 논문 출판 해 줬다는 분도 여러분 수준 이야기 합디다.아무 것도 아니라고. 동대 발전을 가로 막는 것들이 여럿이라도 동대교수 자질 문제도 크지.동대 사이트 들어 가서 동대 불교대 교수들 학위한 내력을 봐라.대부분이 동대에서 석,박사를 다 했는데 이건 설대보다 더 하다.하긴 전에 조선일보에서 20여년 전에 지방 조선법대라는 곳을 자대 출신 교수들이 가장 많이 임용된 학교로 꼽은 적이 있었다. 왜 조계종단에서는 이 문제를 손 대지 않나.동대교수 자질 문제 말이다.대외적으로 창피하지도 않나.저게 학자냐?교수냐?학자라면 외국 유수 대학에 가서 빡세게 해서 학위 취득해야 할 텐데 동대에서 그대로 석,박사를 다 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다시 동대에 눌러 앉고.양심 있으면 다른 직업을 찾아라 동대 교수들.이건 동대교수인 모 스님이 이야기한 건데 술자리에 가면 스님인 자기가 동석인 데도 그렇게 음담패설들을 많이 하더라고 해.쯧쯧...못 났으면 밉지나 말지.서울역 노숙자들 봐라.너희는 뭐가 그렇게 잘 나서 지위,명예 이런 것 다 가졌나. 종립대라고 단 하나 있는 것이 저 모양으로 부실하니.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동대 교수들이 그렇게 무섭나 손을 못 대게.
(2004-09-12 오후 3:38:09)
22
언어를 모르면서 의견을 내는 것을 삼가합시다. 불교용어는 우리가 평소에 쓰는 일상어와는 개념을 달리한다. 왜 중국불교가 1000년 이상 역경에 전념을 했는지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 이미 자기식이 되어 버린 용어를 표준화하기 보다 관례를 따르고 새롭게 유입된 용어를 정리하는 것에는 의의가 있다고 본다. 중국불교사에서 불교용어를 자기식으로 만드는데 5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렸음을 아는가 말이다. 불교학자라면 최소한의 기본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의 불교학자들은 우물안의 개구리에다가 학문의 소양도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세계적인 석학들을 불러 강연을 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무슨 석학의 대열에 끼는 것과 같은 착각은 이제 그만하자. 제발 불교학문의 기본이라도 세우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은 이미 스스로 정화되기에는 어려운 지경이라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종단의 원로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방치하고 있는지 심히 궁금하다. 인재양성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조계종이 겨우 삼류도 안되는 학자들을 길러내기 위해 그 많은 돈을 낭비한다는 말인가. 동국대학교가 삼류이면 조계종도 삼류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자신들을 대신해서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겨우 삼류를 면치못하는 것은 스스로 삼류임을 자청하는 일이다. 학자가 스스로 어떤 연구를 해야 불교를 위하는 것인줄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제발 번듯한 불교학자를 양성하는 종단이 되기를 바란다.
(2004-09-12 오후 3:10:36)
26
신비스럽고 속된 말로 도사틱한 종교로 가지 않게 위해서도 개념정의를 위해서도 1차 용어의 표준화와 음가복원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004-09-12 오후 1:14:47)
28
나중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통이함이 옳다고 본다. 각국을 다니다보면 같은 말을 가지고 서로가 알아 듣지 못하는 발음상의 문제를 보게된다. 중국식발음(한자발음)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한자로 해석하다보면 뜻이 잘못쓰여지고 있는것이 많이 발견되는 현실도 받아 들여야 한다.
(2004-09-12 오전 11:00:24)
22
소리로 나타나는 말은 변한다. 거기에는 경제성이 제일의다. 말은 변하지만 뜻은 변하지 않는다. 말을 표현하는 게 문자이다. 우리말이 아닌 말이 우리말이 되어 우리말 변화를 따라 변하는 것을 그대로 두자는 말씀 같은데. 와전은 변화는 다르다고 본다. 변하는 것은 따르데 와전된 것은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신앙성에만 지나치게 경도된 주장이 아닌가 싶다.
(2004-09-12 오전 10:41:41)
22
한교수와 간화선논쟁을 벌였던스님은 바로 한용기 한1 한2 쓴 나다. 학자가 선의 논리야 못미치다고 하더라도 불교의 열 정 만은 가춘 사람이라고 본다.그리고 논리표현도 훌융하다고 본다 꼭 위에 한1 과 같은 태도가 겨드러 있기를바란다.
(2004-09-11 오후 9:43:52)
30
어떤이들은 불교의 근본을 애끼는 마음으로 염려하나 불교를 표현과 근본을 애끼는것은 조금 다르다 . 그래서 위에 한1 과같은 태도 따라준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2004-09-11 오후 9:34:32)
23
용어는 용어다 그러나 용어가 힘을가지고 나오기위해서는 반듯이 사려깊은 이들과 서로 나누워 가며 함이 바람직하다. 반듯이 해야 한다.선에 확실한 경험 있는자와 같이 함이 더 좋을 것이다.언어가 선의 향기를 잃으면 언어는 건조해져서 언어로써 기능을 잃을 수가있다. 학자의 참으로 불교를 걱정 한 다면 학자의 작은 고집은 뒤로 하고 큰 불교의 미래를 위해서 하시기를 바란다.
(2004-09-11 오후 9:25:52)
28
불교를 이해하는 학자시네요.동대 교수들 실력이 가장 형편없고 그리고 한국의 빨리원전에 대한 이해는 아직 원숙하지 않다.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시구마. 불교는 그 땅에 토착화되어야 한다.한국불교가 다시 인도불교라는 외피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다.인도불교,중국불교,티벳,일본 다 다르다.그러나 또 수행방법은 다 같지. 한국불교 원형을 훼손시키면 안 된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면 불교를 모르는 거다.한형조교수 말은 이 말로 옳은 안목이다.소장학자나 승려들이 참여하고 있다면 새겨 들어라.여러분이 불교를 아는 것이 아니거든.
(2004-09-11 오후 9:20:26)
25
한형조 선생의 용기에 적극적인 뜻을 같이한다. 거기다 살아있는 선지를 겸해서 할 수 있다면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우리나라 불교는 너무 안이 한 데 있다. 안으로 밖으로 잠에서 깨어날때가 됬다. 지금도 잠자고싶은 사람은 더자야겠지만 한 선생님 처럼 깨어날 사람 은 깨어나야 한다. 나는 한 선승 으로써 학자인 한교수 께서 앞장 서는 일에 큰 희망을 가저본다.
(2004-09-11 오후 9:10:58)
23
교수란 신분은 학문에 대한 뚜렷한 견해가 있음이 마땅하다. 그것이 설사 약간의 무리가 있다고 해도 학회나 토론을 통해 교정되어 가는 것이다. 불교관련 학회에 일을 하는 학자들만이 발언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심도있는 논의를 거쳐 자격있는 학자들이 선발되어 시행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학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자격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불교학계의 암담한 현실 즉 실력이 없는 사람이 너무나 난무하는 이런 실정에서 아무에게나 이런 일을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임에 분명하다. 한교수의 지적을 통해 표준화의 문제가 없었던것으로 가닥을 잡기 보다 현명한 방법으로 불교용어를 정리하는 편이 올다고 본다. 특히 표준화라는 단어는 적당치 않다. 학문에 표준화란 자칫 잘못하면 획일화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용어 외래어 표기의 기준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유용하리라 본다.
(2004-09-11 오후 7:56:05)
22
정말 가슴속에 맴돌던 그뭔가를 시원하게 토해낸 기분이다. 교수님 응원할테니 물러시지 마세요 수천년 잘 내려오던것을 자기들이뭐라고 재단하고 자기들만의 틀에 끼워맞추겠다는 말인가?
(2004-09-11 오후 7:00:52)
26
한형조선생의 입장에 대한 가부판단은 그만두고, 먼저 생각해볼게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한형조 선생이 과연 불교용어 표준화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혀도 좋은, 혹은 밝힐만한 위치에 있는 분인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한형조선생은 얼마 전 간화선 수행법에 대해서도 입장을 뚜렷이 제시하고 어느 스님과 논쟁까지 벌인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간화선 수행법이나 불교 용어 표준화 문제에 대한 발언권이 소수의 특정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분이 교수라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마음대로 참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2004-09-11 오후 4:11:08)
31
한국불교학계에 살아있는 학자가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그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가 아니라는 점에는 애석함을 금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하기야 동국대학교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랴! 한교수님의 지적처럼 사업을 위해 일을 벌여 불교를 왜곡하는 것은 잘못된 일임에 분명하다. 특히 표기가 중구난방인 것이 아니라 학자들이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빨리어인지 파리어인지 빠리어인지를 통일하는 것은 남방불교의 전공자들이 의견을 모아야 하는데 제 각기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한다. 모르긴 몰라도 남방에서는 한가지 음으로 발음을 할텐데 말이다. 선무당 사람잡는다는 속담은 요즘 범어나 빨리어나 티벳어를 조금 배웠다는 학자들에게 적용될 말인것 같다. 동아시아불교의 유구한 전통도 모르고 원전도 제대로 해석이 안되는 학자들이 짧은 지식으로 무엇을 바꾼다는 말인지.
(2004-09-11 오후 2:50:18)
20
저도 동의합니다. 한교수님의 말씀을 읽고보니 정말로 가만히 앉아서 보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서서봐도 안되겠고 .. 여하튼 그냥 있어서는 안되겟습니다. 불교단체들은 왜 이런 것에는 입다물고 있는지요. 의무가 되어야한다면 따라야 할 사람들의 여론 수렴은 왜 하지 않는지요? 근데 지금 이나라 정치판이 돌아가는 것이랑 너무 닮아가는 것은 아닌지 정말로 우려스럽습니다.
(2004-09-11 오후 1:13:41)
27
한교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자꾸만 덧칠을 하게 되면 본 뜻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원전을 보는 것이 좋겠지만 한문으로 전해져 온 불교가 정착되어져서 이제 이해하기도 쉽고 그동안 그렇게 공부해 왔기 때문에 덧칠을 반대합니다. 그냥 두고 보아도 알 분은 아는 것이고 덧칠을 아무리 잘해도 더욱 몰라 보는 분은 모를 것입니다.
(2004-09-11 오전 12: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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