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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최근 ‘불교용어표준화불사위원회’가 진행하고 있는 불교용어 표준화작업에 대한 입장을 현대불교신문사에 보내왔다. 다음은 한교수의 기고문 전문이다.
듣자니, 한국불교학회, 불교학연구회, 인도학회 등 14개 불교학술단체가 그동안의 한문 용어를 ‘버리고’ 새로운 불교 용어를 ‘창안’하겠다고 선포했다. 그것도 연구에 필요한 참고 자료로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의무적으로’, 즉 강제로 쓰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표준화 작업이 완료되면 교과서 제작이나 논문 작성때 의무적으로 표준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다음뉴스에 인용된 서울신문의 기사) 사실인가.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한국불교학회는 이 표준화 작업이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거기 총무이사인 김용표 교수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표준화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고,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어디 따져보자. 우선, 문제를 이렇게 설정한다. 1) 왜 새삼 불교 용어가 표준화되어야 하는가. 2) 한다면, 어째서 인도식 발음으로의 복고인가. 3) 그것이 몰고올 이익과 손해는 무엇인가.
1) <불교 용어 표준화 불사 위원회>가 내세운 표준화의 이유는 불교 용어가 중구난방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Kumalajiva(*장음 표기는 생략했다)의 우리말 표기가 ‘구마라집’, ‘구마라습’, ‘구마라즙’, ‘꾸마라지바’ 등, “읊는 사람 각자의 학문 배경이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제각각이어서 불교서적을 읽을 때 의미 파악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지나친 바가 있다. 예로 든 구마라습은 십(什)자의 발음이 좀 애매한 특수한 경우이지, 대체로 우리말 한문 용어는 거의 통일되어 있다. “표준화는 이미 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가. ‘반야’, ‘열반’, ‘보리’, ‘시방’에 무슨 제각각이 있고 중구난방이 있는가.
2) 백보를 양보하자. 꼭 표준화해야 겠다면, 당연히!, 수천년의 경쟁과 담금질을 견뎌낸 한문 용어여야지, 근본도 모르는 새 용어를 ‘수입’하겠다는게 가당한가? 위원회는 말한다. 그동안 써 온 한문 용어들은 구마라습--새 표기법으로 하자면 ‘꾸마라지와’-- 등 역경사들이 산스크리트와 팔리어를 중국음가로 표현한 것이기에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초기 불교의 원음’을 ‘외곡했다’고 당당히 말한다. 정말 그런가. 그럼, 어디 물어보자.
누가 부처님의 원 발음을 복원할 수 있을까. 없다.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는 붓다의 열반 이후 수백년이 지난 후에 불교가 기록될 때 비로소 채택된 언어들이다. 고타마 붓다 그분은 ‘반야’라고 하시지도 않았지만, ‘쁘라갸’니, ‘빤냐’니, ‘쁘라즈냐’니, ‘한야’, ‘뽀오루어’라고도 하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벳어, 서장어, 한문, 영어, 우리말 가운데 누구도 종주권을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이제 관습과 유용성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놀라와라. 위원회가 채택한 표준 시안은 산스크리트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팔리어도 아니다. 이를테면 ‘쁘라갸’는 산스크리트 ‘쁘라즈냐’의 벵골 지방 사투리 발음이다. 세상에. 기가 막히네. 산스크리트어만 해도 한 다리 건넜는데, 그 한 다리 건넌 말을, 그 근처 동네 사람들이 하는 발음이라고 하여, 그것을 지금 우리더러 강요한단 말인가. 인도어 전문가들도 고개를 갸웃하는 그 외계인의 발음을 표준으로 삼자는 말인가.
내가 보기에, 위원회는 불교가 가장 경계하는 상견(常見), 즉 근본주의(fundamentalism)에 빠져있다. 그리고 위험하게도 수입상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기억하라. 한국 불교를 지켜온 것은 유학을 떠난 의상이 아니라,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선 원효였다는 것을. 중국불교를 일으킨 것은 끊임없이 인도의 원전에 조회한 현장이 아니라, 자신의 깨달음으로 당대 대중들의 불성에 직접 호소한 육조 혜능이라는 것을. 인도 유식을 그대로 수입한 법상종은 사라졌지만, 선(禪)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3) 인도 원음으로의 표준화와 그 전면적 강요는 한국불교의 숨통을, 마침내, 끊어놓고 말 것이다! 용어 표기 하나 갖고 너무 그러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겠다. 그렇지 않다. 용어는 그 안에 박제화된 의미만 통조림처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깊이와 표정과 울림, 그리고 신통력을 갖고 있다. 염불 소리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지만 깊이와 표정, 울림과 신통력을 갖고 있기에, 염불을 통해서도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곳, 극락정토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신성한 ‘소리’에 함부로 바꾸거나 칼을 대서는 안된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스와하”로 바꾼다고... 왜들 이러시는가. 대체 그들은 <예불문>이나 <금강경>, <반야심경>을 독송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인가. 이제 한역 <금강경>은 버리고, 모두들 산스크리트본 금강경을, 그것도 벵갈 사투리로 더듬거리며 짹짹거리며 독송하자는 말인가.
새 표준안이 마련되면, 당장은 불편하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전문가들은 어쨌거나 이 ‘이중 장치’에 적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만, 불교에 ‘이미’ 접하고 있는 대부분의 선지식들과 전국의 신자들, 그리고 문화계와 학계의 지성인들은 이 혁명에 구토를 느끼고, 그 수용을 거부할 것이다. 천년을 이어온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과 한국 불교의 전통은 단절되고, 혁명 정국이 오리무중을 헤매는 동안, 불교는 대부분의 청중들을 잃고, 자신의 생명력은 물론, 미래의 가능성까지를 스스로 고갈시킬 것이다. 그때 한국 불교의 등불은 꺼진다! 여기서 무슨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찾을 것이며, 어떻게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운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것인가.
지금, 불교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를 만드는 것은 당신들의 일벌리기와, 당신들이 기대고 있는, “오직 인도 원전 불교”라는 아상(我相)이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불교는 구경이 아니라 방편(方便)이라는 것을! 불교는 어디까지나 도구이므로, 궁극적 권위는 없다. 원전도 없다. 궁극적 권위나 원전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의 불성, 나의 마음일 뿐이다. 그러니 ‘하나의’ 불교란 없다. ‘표준화된’ 불교도 없다. 오직 불교를 말하고 익히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불교가 있을 뿐이다. 한문 용어는 존중되어야 한다! 왜냐.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지금’ 그 한문 불교의 기반 위에서 불교를 말하고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누가 토를 다는가.
한형조 정신문화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