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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 스님 법문
[가까이서 뵌 큰스님] 정일 스님(보광사 조실) 현대불교신문 345호(2001년 11월 28일)

“육바라밀 실천해야 불법 체득”

부처님 닮으려면 경전 수천번 읽고꾸준히 수행

마음공부 한다는 것은머리 속 쓰레기 치우고 자기 스스로 복 짓는 일

9살 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슬픈 눈망울을 본 이후 다시는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는 스님. 헌 책방에서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을 구해 읽으며 염불에 열중했고, 그래서 불문에 귀의(출가)할 것을 결정할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던 스님. 출가 후 금오, 춘성, 전강, 동산 스님 등 선지식들을 찾아 수행자의 도리를 배우고, 50년 수행생활 동안 부처님 말씀에 한 치 어긋남도 없이 살려고 노력해온 스님이 정일(正日)스님이다.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서울 우이동 보광사로 스님을 뵈러가는 날, 울긋불긋 낙엽들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며 ‘무상(無常)’의 도리를 몸으로 전하고 있었다. 시자 현중스님의 안내로 보광사 1층 스님의 처소에 들어 삼배의 예를 올리자, “상(相)내는 일이라 극구 사양했는데 … 차나 한잔 합시다”라며 스님은 자애롭게 맞아 주신다.

스님은 지난 79년부터 보광사에 주석하고 있다. 서울 조계사에서 출가해 범어사, 망월사, 동화사, 용화사, 통도사, 백련사 등지에서 참선수행하던 스님이 북한산에 토굴을 짓고 수행하고 있는 제자를 격려하기 위해 상경한 것이 계기가 돼 서울에 머물게 됐다. 이 때 한 재가불자가 스님에게 현 보광사 터를 기증했는데, 그 터에 보광사가 건립되어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의 오롯한 수행도량이 되어 오고 있다.

“부처님의 법은 중생들의 생각을 가지고는 털끝만치도 건드릴 수 없는 자리기 때문에 실천하지 않고서는 그 법을 깨달을 수 없어요. 그래서 경전을 읽고 육바라밀을 실천해 기초를 다져 화두를 드는 것도 부처님 법을 깨닫고자 하는 것이지요. 신도들에게 경전을 수백번 읽도록 하는 것은, 화두를 들어 본래 마음을 볼 수 있는 단계까지 끌어 올리는 데 그 목적이 있지요.”보광사의 ‘신도교육 프로그램’은 엄격하고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보광사를 처음 찾은 불자는 우선 광명진언을 하루 1000번씩 21일간 외우고 천도재를 지낸다. 그리고 <지장경> 300독, <금강경> 100독, <관세음보문품경> 50독을 마치면 천도재를 또 올린다.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불제자로서 몸과 마음의 번뇌를 한 꺼풀 벗었다는 뜻에서 지내는 천도재는 <선가귀감> 50독, <원각경> 300독, <법화경> 30독을 할 때마다 계속돼, 다시 한번 <선가귀감>을 50독 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때 정일스님은 교육을 이수한 불자를 불러 공부를 자상하게 점검하는 한편 ‘이 뭣꼬’ 화두를 준다.

“우리의 머리 속에는 번뇌망상과 눈으로 익힌 알음알이만이 가득차 있기 때문에, 경전을 한두번 읽어서는 그 오묘한 진리를 체득할 수 없어요. 번뇌망상의 척도로 잰 것인지 모르고 그것이 진짜인줄 알고 우쭐해 하지만 본래 모습을 보기에는 어림없지요. 경전을 알음알이로 해석하고 불법을 세우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무리 읽어도 알지 못합니다. 수백 수천 번 경전을 읽게 하는 것은 인과(因果)를 알고 그 속에서 번뇌망상을 보고 본래 자성을 깨달아서 실천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정일스님은 스님이나 불자에게 경전을 읽고 화두를 참구하는 것 외에도 육바라밀을 함께 실천해 불법을 체득하는 경지에까지 올라서야 한다고 항상 가르친다. 스님에게 있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라는 육바라밀 즉, 육화정신은 불법을 배우는 불제자들의 실천적 생활 윤리이다.

스님은 제자들을 엄격하게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님은 상좌들에게 매일 관음정근 5만독을 시켰다. 스님은 상좌들의 눈과 말, 숨소리 등을 낱낱이 살피며,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점검하기를 게을리 않았다. 그래서 스님의 기대치에 도달하지 못한 상좌들은 어김없이 종아리를 걷어 올려야만 했다. ‘공부의 엄격함’을 논하면 정일스님이 원로 스님들 중 단연 으뜸이라고 주위 사람들이 평할 정도다.

그런데 정일스님 스스로가 워낙 엄격하게 수행하기 때문에 스님의 수행생활은 그대로가 제자들이나 신도들의 귀감이 된다. 스님은 망월사 천중선원에서의 천일기도를 통해 ‘목숨을 내놓은 정진’을 했다. 천일동안 기도정진하며, 기도를 시작하기에 앞서 몸과 마음의 나쁜 기운을 없애는 뜻으로 새벽마다 ‘냉욕’을 거르지 않았다.

당시 망월사에서는 춘성스님이 주지로 전강스님이 선원장으로 주석하고 있었다. 정일스님이 망월사를 찾은 것도 큰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해보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천일기도를 하겠다는 스님에게 춘성스님은 “왜 천일기도를 하려느냐, 여우가 되려고 하느냐”며 여운을 남겼다. 스님은 천일기도를 마치고 자신의 수행을 점검받기 위해 춘성스님을 찾았다. 스님은 정일스님 앞에 큰 원을 그려놓고 “들어가도 30방, 나가도 30방”이라고 일갈했다. 정일스님이 당황해 가만히 서 있자 춘성스님은 30방을 때렸다. 정일스님은 춘성스님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그때 춘성스님은 또 30방을 때리고 “수고하셨습니다”라고만 답했다.

“처음엔 춘성스님의 말과 행동에 담긴 뜻을 알지 못했지요. 다시 선방으로 돌아와서야 ‘말놀음에 빠지지 말라’는 가르침임이 느껴지더군요. 불법은 언어의 경계가 미치지 않는 자리에 있어요. 출가 전에 청계천 헌 책방에서 <선가귀감>을 구해 읽었는데, 천일기도를 마친후 다시 <선가귀감>을 읽었어요. 읽을수록 그 의미가 분명해지더군요. 그 과정에서 머리 속에서 우글거리는 번뇌가 뚝뚝 떨어져 나가고 명료해졌어요. 번뇌가 떨어져 나간만큼 몸과 마음의 도리가 바르고 착해져, 거기서 저절로 환희심이 생겨나요. 수행정진이란 한 두 번으로 결판이 나는 일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꾸준히 해야 합니다.”정일스님은 수좌들 사이에서 ‘중단 없는 수행’으로 유명하다. 망월사 천중선원을 비롯해 스님이 수행처로 삼았던 용화사 법보선원, 통도사 영축총림 선원, 범어사 금어선원 등에서 각각 3년을 기본으로 수행했고, 그 기간동안 입선 때는 참선수행을, 방선 때는 염불수행을 했을 정도로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수행자라면 하나의 화두를 가지고 적어도 석삼년 동안은 한번의 쉼 없이 정진해야 하고, 그래야만 품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고, 점검 과정에서 스승의 질타를 받더라도 다시 선방을 찾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정일스님은 간화선만을 고집하지 않고 묵조선이나 위빠사나 등 대·소승의 모든 수행법을 포용한다. 스님은 “요새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며 안타까워 한다. 각각의 강과 하천도 모두 대해로 모인다. 흘러가는 것은 과정일 뿐이다. 단지 열심히 하면 된다. 자신의 상태를 알아야 본심을 본다고 했을 때 몸과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는 위빠사나도 좋은 수행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느 하나에 집착해 머문다면 문제가 된다. 또한 모든 과정을 지나 구경의 단계를 넘어야 할 때는 화두참구, 간화선을 해야 한다. 간화선은 망상의 구름을 걷고 본심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마지막 과정을 지나지 않으면 방편에 떨어진 외도일 뿐이며, 번뇌망상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스님에 따르면 사람은 가죽 주머니에 달라붙은 귀신이다. 즉 번뇌망상이 사는 집과 같다. 중생들이 편을 가르고 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번뇌망상을 뒤집어쓰고 나름대로 나타난 그 경계 즉, 자기가 본 것이 제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귀신의 버릇이라, 그 껍데기를 벗지 못한 생태에서는 내내 귀신일 뿐이다. 그래서 스님은 중생을‘멍텅구리’라고 부른다.

“전도몽상된 이 모든 생각을 부처님 가르침으로 개혁해야 해요. 개혁하는 방법이 바로 인과법과 육바라밀이죠. 그 과정에서 환희심을 알게 되면 수행력은 눈덩이처럼 커지는 거지요.”스님의 이러한 생각은 5년 전 부산에 보광사를 지으며 개원한 유치원의 교육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5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교육감상을 3번이나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정일스님의 남다른 불교교육관이 있어 가능했다. 유치원에서는 원생들에게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자’는 것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인과법이다. 유치원에는 제법 규모 있는 텃밭이 있는데, 이 곳에서 어린아이들은 직접 채소를 키우고, 그 변화의 과정을 기록하며 변화의 원인까지도 찾아서 쓰고 있다. 이 과정을 거친 아이들은 자연히 생명을 하나의 독립적인 개념으로 보지 않고 서로 연결된 상호 공동체로 보게 된다.

“그 어린 머리로 ‘자기 얼굴은 자기가 만든다’는 생각을 할 정도라면 교육의 성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이들의 공부도 수행과 같이 하나 하나 관찰해서 이해시키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자기를 관찰하는 깊이가 더해질수록 자연과 자신 혹은 식물과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고 이때 인연법을 공부하는 것이죠.”순수함으로 불법을 쉽게 받아들인 아이들의 경우처럼, 스님은 많은 불제자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끄달림 없이 받아들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마음공부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복을 짓는 일’이다. 정일 스님은 오늘도 그 이치를 밝게 비추며, 불제자들이 그 맛을 알도록 열심히 이끌고 있다.


정일스님은?

“지금도 선방에서 함께 참선수행하며 제자들을 격려하고, 때론 경책하기 위해서는 매를 드는데 망설이시지 않으시지만, 그 과정에서 저희들의 수행의 정도가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제자들의 말처럼, 정일스님은 70세의 나이에도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선객이자, 자신의 성취를 제자들에게 철저하게 전해주는 엄격한 스승이다.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난 스님은 1956년에 조계사에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이어서 40여 년간 망월사, 범어사, 용화사, 통도사, 백련사, 만덕사 등의 선방을 돌며 참선수행했고, 해인사, 불국사, 용화사, 정각사 선원장과 선학원 중앙선원장을 역임했다. 특히 망월사에서는 천일기도를 성만했으며, 이후에도 한시도 게으르지 않은 수행과 투철한 용맹심으로 후학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현재 선학원 이사장을 맡고있는 정일스님은 서울 우이동 보광사에 주석하며 만나는 인연마다 공부의 핵심을 짚어 주고 계시다. 스님의 자상한 가르침 덕분에 매일 수많은 대중들이 “스님의 법문은 들으면 들을수록 ‘공부 욕심’이 생긴다 ”며 1km 남짓한 오르막길을 걸어 보광사를 찾고 있다.


【수행한담】정일스님<보광사 조실> 현대불교신문 19호 (1995년 3월 8일)


약력
·32. 3. 22 서울 生
·79년 서울 우이동 보광선원 원장(현재)
·90년 서울 우이동 보광사 조실(현재)
·조계종 법주사 주지 역임
·93년 재단법선학원 이사장(현재)

“법왕법(法王法)이 여시(如是)니라.”
이 회상(會上)에 대중이 모인 뜻은 법왕의 법(法王法)이 이와같다”는 뜻에 계합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팔만사천 법문의 요지가 “법왕법 여시(法王法 如是)”라고 하는 말씀 안에 있는 것으로, 모든 대중들의 신령스런 근본인 그 마음에 대한 표현인 줄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러나 이 경지는 번뇌에 파묻혀 사는 대중들의 지금 생각으로는 조금도 알 수 없으며 대중들의 이 알지 못하는 바를 부처님께서 격외(格外)로 보이신 바, ‘격외(格外)’라고 하는 것은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 分半坐)하신 소식, 영산회상 거염화(靈山會上 擧염花)하신 소식, 곽시쌍부(槨示雙趺)하신 소식입니다.

이것은 <선가귀감(禪家龜鑑)>첫머리에 나오는 ‘여기 한 물건’에 대한 것으로, 모든 중생들이 너무나 모르므로 ‘한 물건’에 대해 억지로 이름해서 ‘한 물건’이다, 억지로 이름해서 ‘부처님’이다, 억지로 이름해서 진리다 합니다. 또는 선가(禪家)에서 심월(心月)이다 하는 등 갖은 명사 다 붙였지만, 이 신령스런 근본 자리에는 그런 명사도 붙지 못하는 절대적인 것이 됩니다.

그럼 모든 중생들의 상태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자기에 대해서 모두가 아는 생각이 먼저 앞서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내 마음은 내 몸 속에 있어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내다보고 있다”는 그런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나니 그것을 일러 “알 식자 마음 심자‘식심(識心)’”이라 하며, “아는 척 하는 마음”그것을 망식(妄識)이라 합니다.

그 식심의 경계와 본심의 경계가 나타나니, 본심(本心)은 부처님 경지의 마음이요, 식심(識心)이라고 하는 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는 마음이 앞서 있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부처님 법을 제외하고는 전부 아는 체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49년간 설법은 바로 네가 다겁생래에 익힌 업장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속이는 버릇이 그렇게 크니까, 그걸 알아듣는 자세가 되도록 하라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래 이 지구상에서 불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는체 하다가 거꾸러지는 종교입니다. 항상 번뇌망상에 놀아나는 겁니다.

번뇌망상에 놀아나면 그것이 전부 生死요, 생사를 뒤집어 쓰고 있다 이겁니다. 어깨짓 춤추는 도깨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스님네들이 도깨비가 되지 말라 하셨쟎습니까.

“대낮에 나타난 도깨비들아 대낮엔 도깨비가 없어요. 고래(古來)로 대낮에 도깨비에 홀렸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두운 저녁에 가서 도깨비에 홀렸지요. 그래서 이렇게 욕설을 하신 겁니다.

“대낮에 나타난 도깨비들아, 대낮같이 밝아 있는 그 마음을 가지고 왜 도깨비짓을 하느냐”그 말씀이지요.

대낮같이 밝아 있는 자기 마음만 요달(了達)하면 되는데 자기 마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아는 체한다 그 말입니다.

그래 아는 체하는 제 기분에 들떠서, 제 흥에 겨워서, 흥분해서 아는 체하고 막 풀어 내놓다 보면 제가 저를 속이고 남들을, 듣는 이를 속이게 되니 사기꾼이 되는 겁니다. 그 버릇을 고치라는 겁니다.

부처님 49년 설법(說法)이····
“아는 체하는 마음이 앞서 있는 마음은 망령스러운 마음이다” 이겁니다. 망령기가 있다는 말이요, 미쳤다 그 소리입니다.

미친 마음은 1초에 6만3천 번을 뛰는데 그런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거의 전부요, 그렇지 않은 이들은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 이말입니다.

너나할 것없이 들뜬 사람들이 지구상에 모여서 산다 그말입니다.

그 생각이 쉬면 사왕천(四王天)에 올라가고, 조금 쉬면 도리천에 올라가고 조금 쉬면 야마천(夜摩天)에 올라가고 그렇게 해서 욕계(欲界) 육천(六天)을 올라가며, 색계(色界) 십이천(十二天)을 올라가며, 무색계(無色界) 4천(四天)을 올라가고, 그래서 수다원(須陀洹)·사다함(斯陀含)등의 성문(聲聞) 4과를 올라가는데 수다원은 부처님 법을 의지해서 들어간 경계로 무색계천 경계에도 안되는 색계 십이천경계 중에 색구경천(色究竟天) 근처에 간 수행력이지만 부처님 법에 의지해서 들어갔기 때문에 수다원에 들면 다시는 더 물이 들지 않게 됩니다. 다시 퇴전하지 않는다 이말입니다.

수다원과를 딱 정해가지고 그후 정진해서 부처님이 되고 만다 이말입니다.

타락(墮落)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류(聖類)라고 하는 겁니다.

성인류(聖人類)에 든다고 해서 성류라고 한다 이겁니다.

그러면 외도(外道)는 무엇이냐?

비비상천(非非上天)까지 올라가도 도로 미끄러지고 도로 미끄러지고 하게 됩니다.

왜? 제 고집이 있어서 산돼지 고집을 가져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생각이 좀 쉬었다고, 아는 경계가 좀 나타났다고 거기에 전도(轉倒)가 되어가지고 부처님 말씀도 안듣는 겁니다.

그러다가는 도로 미끄러져서 지옥에 가서 쳐박히는 거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겁니다.

비유를 들자면 부처님 법을 따라 수다원과를 증득(證得)하는 것이 유리컵을 다섯 개 갖다 놓고 장마통에 시뻘겋게 뒤집힌 물을 컵 하나에 담아놓고 하루종일 있다가 저녁 나절에 보십시오. 맑게 가라앉았지요.

부처님이 보시고 80%가라 앉은 것, 이것을 옆의 컵에 “맑은 물만 옮겨 담아라”하셔서 부처님 말씀따라 옮겨 담았습니다. 또 하루를 두고하여 네번 옮겼어요, 이건 암만 흔들어도 뭐 가라앉을 것이 없으니까 깨끗하지요.

그런데 외도들은 가라앉은 여기에, 찌꺼기와 같은 안다는 생각에 집착이 되어 가지고, 가라앉은 맑은 것만 옮기라고 해도 곧이 안듣고 그냥 이걸 처먹던 버릇을 안 버려서 흔들어 출렁거리면 도로 뒤집히고, 도로 쳐박히고, 그래서 지옥에 도로 쳐박히면서도 부처님 말씀을 안받아들여요.

자기 아는체 하는, 말하자면 다시 출렁거려 들뜬 마음이 앞서 가지고 안듣습니다. 그러니까 산돼지라.

산돼지 잡아다 집에서 길들여 보십시요. 아주 애 먹지요.

모든 중생들이 산돼집니다. 여러분들도 산돼지 고집 가졌다간 큰일나요.

그래 부처님께서는 너희도 나와같이 이렇게 해봐라. 그럼 나와 똑 같이 되느니라. 온 우주의 주인공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따로 내몸이라고 여겨 집착할 것이 없느니라.

온 우주가 내 것이므로 부처님이 천백억화신을 나타내신 겁니다.

부처님은 임의자재하는 몸을 가지셨는데 거기에 비한다면 여러분들은 갖추지 못한 불구자요, 장애자인 겁니다. 여러분들이 성한 것 같지만 다 장애자이니, 장애자로 먹고 사시니 장애자분들 깔보지 말고 조금씩 시킬 일 있으면 시켜서 같이 살도록 해야되요.

시주물건(施主物件)의 모든 것, 여러 곡식으로 지은 주식과 부식의 나물, 양념, 차담으로 잡숫는 것, 물 마시는 것, 속가 신자들이 먹는 동식물류의 식품류인 모든 것을 먹는 것은 이 몸 안의 많은 중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먹어야 합니다.

“그걸 관(觀)하고 먹어라.” 이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몸안의 중생들이 죽으니까, 자비스러운 뜻으로 대(大)를 위해서 소(小)를 베푸는 뜻으로 살기 위함이며, 바른 것을 위해서 살므로서 부처님 법을 위해서 살므로서 옳은 일이 되는데, 부처님 법만을 실천하면 옳은 일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죄(罪)가 되요.

그렇지 않으면 죄(罪) 안짓고는 못산다고 여러 경전에 말씀이 나타나 있어요.

남섬부주 이 지구상의 주위 환경은 숨만 쉬어도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많은 중생이 공기 중에서 코로 해서 빨려 들어가며, 가지가지 일로 죽게 되거나 싸움하게 하니 죄가 됩니다.

싸움판을 벌렸으니, 아수라판을 벌렸으니 죄가 됩니다. 여러분은 싸움시키기를 좋아하는 아수라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수라도 되고 천사도 되고 별거 다 됩니다. 아수라 마음 내어 실천하면 아수라 되고 별거 다 되는 겁니다.

왜냐? 공기 중에 있는, 많은 가만히 있는 중생들을 몸안으로 들이 몰아 가지고, 안에 있는 방어균하고 싸움을 시키니까 아수라 아닙니까?

이 몸이 나라는 생각을 잠시도 못 버려서, 일체 모든 것에서 내니, 너니 하는 생각을 떠나지 못하여, 이 몸뚱이에 꽉 집착을 해서, 나로 삼아서 내게 해가 되는 것은 남이라고 해서 제 몸 편에만 들어서 응원하니, 응원하는 게 싸움시키는 것입니다.

삿된 입지(立志)로 사니까, 살려 하니까, 아수라 아닙니까. 그런데 아수라 귀신이 어딨나? 모두들 그럽니다.

그래 부처님 법에 입지(立志)를 세우신 분들도 공기 중에 있는 많은 균들이 침입해 오는 유행병균, 감기로 인해서 유행병이 많이 있지요? 그때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 가시면 뜨거운 물에다 소금을 타 가지고, 양치질을 하셔서, 방어하는 균들을 도와 주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외세에 밀려 가지고 많이 앓게 되므로, 바른 생각내는 공부를 못하시게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병원 의사분을 찾아 가셔서, 주사도 맞고 치료를 받으셔서, 외세를 쫓아내어 아픔을 고치쳐, 공부해 가시라 이말입니다.

이와같이 부처님은 ‘장수멸죄경’에서 건강에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분 몸안에서 일어나는 일, 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주변에 사는 한량없는 수의 귀신이 있는데, 천상 세계로 올라갈수록 죄를 적게 짓고 사는 환경이 되어 있으며, 극락세계 환경은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되어 있다 그러셨습니다. 또 부처님 가르침은 서방정토 극락 세계 구품연대를 졸업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은 부처님 앞에 축원하실 때 어떻게 하십니까?!

"상품상생 돈오무생<頓悟無生> 법인지발원<法印之發願>- 문득 깨달아서 태어남이 없는 법인을 발원하나이다."

나지 않는다면 어딥니까? 내 마음이 온 법계에 가득 차서 생사가 본래 없는 그 이치를 증득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것이 참으로 극락세계입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라는 것도 여러분이 모자라는 것을, 그런 깨닫는 수행의 환경에 가서, 모든 것을 수학(修學)한 연후에 졸업을 하고서야 임의자재하는 이런 분상(分上)이 된다 이말입니다.

이것이 자기 복을 자기가 찾아쓰는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법화경>에 “이 사실, 곧 이 실상(實相)을 아느냐? 모르면 못 경험했으면 이 깨달음을 경험하여라”하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경계의 사실은 어떻습니까?

자기 마음이 자기 몸안에 있다고 하고, 눈을 통해서 내다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 혀, 몸, 생각에 끄달리는 사실을 실상이라고 여기고 산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일러주신 계목(戒目) 곧 법로(法路) 법도(法道) 경(經)에 따라 자꾸 그릇을 크게 해서, 온 법계를 다 집어 삼키셔야 합니다.

뭘 집어 삼키느냐. 본래 갖추어지신 건데. 마음에 대해서 사무치는 말을 해 놓았느냐? 전부 잘못 가르쳤습니다.

전부 들뜬 귀신의 소립니다. 아는체 하는 마음이 앞서있는 소리를 했다 그겁니다. 그러니 여기 한 물건이라는 것도 한 물건이라 하면 억지로 갖다 지은 말로 이름을 지어 붙인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셔서 화두로 하셨잖아요. 이게 바로 일러주신 말씀인데 여러분이 못 알아 들으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알아 보려니 아득하지요. 알아 보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탁 놓고는 “에이 모르겠다”하면서 모른다고 합니다.

화두를 놓아 버리세요. 팽개쳐 버리세요. 모르신다고 하시면서….

모를 땐 어떤 것이 모르는 것이 있는가 문제를 찾아보고 알려고 하셔야 되는데 여러분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을 완전하신 선생님이 문제를 완전하게 내 주셨는데도 내 팽개쳐 버리시면 되겠습니까!

바로 일러주신 말씀인데 여러분이 안들으십니다.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라 이것도 공안입니다.
여러분이 이 뜻에 계합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자기의 본바탕을 바로 찾아 가지시는 겁니다.
2004-09-07 오전 9: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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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