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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입적 직전 상좌 성전 스님에게 “내가 오늘 꼭 갈 것 같다. 개는 개소리를 하고 소는 소소리를 한다. 남이 잘못하는 것 탓하지 말고, 스님답게 살며, 모두 화합해 서로를 이해하고 잘 살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영결식은 6일 오전 10시 회룡사에서 엄수된다.
1925년 일본에서 태어난 혜주 스님은 62년 도준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66년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6·25 당시 미군에 의해 불타 버린 회룡사를 전쟁 이후 은사스님을 도와 대웅전 등 지금의 사격을 갖추는데 전력했고, 1963년에는 경내지의 수복 등기를 마쳐 삼보 재정의 유실을 막기도 했다.
회룡사 선방에서 40년 이상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1970년대 초 의정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구니 스님 7명과 함께 불교가 사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자비회를 창립했다. 초창기에는 기금 모금과 친목을 다지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80년대부터는 매월 20여명의 중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다양한 지역사회 운동을 펼쳐왔다.
스님은 또 지역에 불교종립학교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서원해 1974년 지금의 광동여고 전신은 광동전수학교를 설립했고, 1984년에는 자비회 기금을 바탕으로 자비유치원을 개원 20여년을 원장으로 활동하며 불교 교육에 앞장서 왔다.
다음은 혜주 스님 관련 본지 기사.
△빈틈없이 행동하는 수행자
“가만히 앉아서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교가 사회와 동떨어져서는 안됩니다. 수행자로서 교육, 환경 등의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정부 회룡사 혜주(慧珠) 스님은 세수가 80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행동하는 수행자로 유명하다. 서울외곽고속도로 북한산 관통 반대에 앞장섰고 수행환경을 지키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스님은 지금도 부처님의 팔만대장경을 다 외우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며 실천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1925년 일본에서 태어난 스님은 청년시절 일본 적십자병원에서 간호교육을 받는 등 근대 교육을 받았다. 의료시설과 종사자가 부족했던 조국의 현실이 안타까워 20세에 한국으로 돌아온 스님은 의료 활동에 전념했다. 한국전쟁 때는 대구 동산병원, 9군단 민사처 병원 등 전장의 야전 병원에서 맹활약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은 수많은 병자를 치료하며 ‘왜 사는가’ 라는 인간 근원의 물음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됐고 1959년 은사이신 도준 스님과의 인연으로 회룡사서 출가했다. 62년 도준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66년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혜주 스님은 비록 은사스님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은사스님이 아직도 살아계신다고 하신다. 해제철에도 선방에 앉아 홀로 수행을 했을 만큼 철저했던 은사스님은 가난했던 시절 어쩔 수 없이 논농사를 위해 모내기를 할 때도 죽비를 쳐 가며 울력을 하는 등 일상이 곧 수행처라는 것을 가르쳤다. 그래서 혜주 스님은 사찰 수호와 불교홍포를 위해서 과감히 산문을 나섰다. 6·25 당시 미군에 의해 불타 버린 회룡사를 전쟁 이후 은사스님을 도와 대웅전 등 지금의 사격을 갖추는데 전력했고, 1963년에는 경내지의 수복 등기를 마쳐 삼보 재정의 유실을 막기도 했다.
스님은 회룡사 선방에서 40년 이상 안거를 성만했고 지금도 아침 저녁으로 참선 수행을 하는 등 수행에 열심이다. 포교에도 남다른 공을 들이고 있다. 군사도시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군종법사가 파견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군 법당을 찾아가 군 장병들에게 불법을 전하고 있고 교도소, 병원 등 소외 지역 포교에도 매진해 왔다.
혜주 스님은 1970년대 초 의정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구니 스님 7명과 함께 불교가 사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자비회를 창립했다. 초창기에는 기금 모금과 친목을 다지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80년대부터는 매월 20여명의 중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다양한 지역사회 운동을 펼치고 있다. 스님은 또 지역에 불교종립학교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서원해 1974년 지금의 광동여고 전신은 광동전수학교를 설립했고, 1984년에는 자비회 기금을 바탕으로 자비유치원을 개원 20여년을 원장으로 활동하며 불교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회룡사 주지 성견 스님은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공심으로 살아가는 스님의 모습을 보면 저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다”며 “최근 북한산 관통도로 문제로 건강을 돌보시지 않고 다소 기력이 떨어진 것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두식 기자
△조계사 앞 릴레이 단식정진 동참한 혜주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의 취임식이 있던 3월 24일, 조계사 앞 천막농성장에는 81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한 비구니 스님이 있었다. 의정부 회룡사 회주 혜주(慧珠)스님이었다. 조계사 앞마당에는 취임식 준비로 분주했지만 천막농성장에는 선방의 특유의 칼날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힘들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괜찮아”라고 짤막하게 대답하는 스님.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릴레이 단식 농성에 참가한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다.
“자연은 생명과 같은 거예요. 즉 자연을 지키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기 때문에 절도 비워놓고 이렇게 나왔지.”
너무 간결하고 명쾌한 대답이어서 그럴까. 더 이상 질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야기를 돌려 오늘 행사와 관련해 종단에 바라는 마음을 들어봤다.
“북한산이 뚫리지 않게, 노무현 대통령이 공약을 이행할 수 있게, 총무원에서 열심히 노력해주길 바랄 따름이에요.”
역시 단답형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문득 스님이 비구니라는 것이 생각났다. 이야기는 자연 비구니 스님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천성산에선 비구니 지율스님이, 북한산에선 비구니 법현스님이 애쓰고 있지. 하지만 자연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는 것에는 비구니 비구니니 또 승가니 재가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어. 온 불자 온 국민이 합심해서 노력해야지.”
스님께 넌지시 문화부장 탁연스님 임명과 관련해 여쭤보았다. 예상보다 강한 대답이 돌아왔다.
“종헌ㆍ종법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야. 일은 전부 비구니 스님들이 다하는데 비구 스님들이 (임명을)제지하면 되겠어. 모두 부처님 제자들인데 함께 동참하는 것도 좋은 일이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탁연스님 임명과 관련한 논란을 두고 비구 스님들만 탓할 일인가. 비구니 스님들에게는 문제가 없었을까.
“물론 불교의 대사회적 역할에 대해 비구니 스님들이 소극적인 부분도 있지. 하지만 악착같은 정신력은 비구스님 못지않아.”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내친 김에 한 발 더 나가봤다. 팔경법에 대해 아시느냐고.
“알지. 하지만 그건 현 시대에 맞지 않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할지라도 예를 들어 일타스님은 반대하셨어. 같은 날 같이 계를 받는다면 비구니 스님이 비구 스님께 예를 올리는 것은 몰라도, 먼저 계를 받은 비구니 스님께는 비구 스님이 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어.”
스님의 일성(一聲)은 부드러움 속의 칼날이었다.
혜주 스님은 59년 의정부서 도준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일본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였지만 삶과 죽음, 인연의 문제가 풀리지 않아 불법에 귀의했다.
스님은 40년간 미군 폭격으로 전소된 회룡사를 복원했고, 79년 불교종립학교인 광동여고가 재정난에 빠졌을 때 다리품을 팔아 되살렸다. 또 자비회를 설립해 83년 지상 4층 규모의 자비유치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남동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