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집, 구마라즙, 구마라습, 꾸마라지바…. 방대한 분량의 불경을 한역(漢譯)해 중국에서 불교가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기여한 ‘구마라집’ 스님에 대한 표기들이다. 이처럼 표기법이 학문적 배경이나 개인적 취향, 유행 등에 따라 제각각이어서 불교서적을 읽을 때 의미 파악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같은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지난 5월 시작된 ‘불교학술용어 표준화 사업’의 성과물인 표준화 시안이 8월 13~15일 동학사에서 열린 ‘불교용어 표준화 불사위원회(회장 이평래)’ 워크숍에서 일부 공개됐으나, 그 표준화 원칙과 적용 범위에 대해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이번 워크숍에서 공개된 시안에 따르면 ‘니르바나’는 ‘니르와나’, ‘구마라집’은 ‘꾸마라지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안웃따라삼약삼보디’, ‘반야’는 ‘쁘라갸’, ‘찰나’는 ‘끄샤나’ 등으로 표준화 된다. 예시를 통해 알 수 있듯 표준화 작업은 원음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동안 동일한 원전 용어가 다양한 한글음가로 표기됨으로써 발생하는 혼란으로 원전 용어의 비교 및 정비 필요성이 학계 안팎에서 제기돼 왔고, 전산화 추세에 따라 용어 표준화가 더욱 절실해진 것이 사실이다. 용어를 제각각 사용할 경우 효과적인 키워드 검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불교용어 표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분위기다. 불교용어 표준화가 저자와 독자, 학자 상호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능케 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음 표기를 원칙으로 하는 표준화 방향과 그 범위가 적정한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찬성하는 입장의 근거는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왜곡된 불교 용어와 표기를 고집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세계화의 측면에서 원어 표기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미 우리말과 다름없이 고착된 용어까지 산스크리트어로 되돌리는 것이 오히려 혼란만 야기할 뿐 실익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보다는 원전 번역시의 표기 통일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반응이 이처럼 엇갈리는 것은 불교용어 표준화에 관한 학계 전반의 의견 수렴이 미흡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표준화된 용어가 향후 수십 년 이상 학계의 ‘표준어’ 지위를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준비와 검토를 거쳐 학계 전반의 충분한 공감대가 먼저 형성돼야 한다. 기껏 표준화작업을 해놓아도 학계 다수가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감대 형성을 위한 기초 작업이 이뤄지지 못한 데는 ‘불교학술용어 표준화 사업’의 촉박한 사업기간과 예산문제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업은 교육부와 한국학술진흥재단이 발주한 ‘학술전문용어 정비 및 표준화사업’의 한 분과인 ‘철학분야 학술전문용어 정비 및 표준화 사업’의 하위 사업 분야에 해당한다. 참여 주체를 기준으로 살피면, ‘학술전문용어 정비 및 표준화사업’을 한국학술단체연합회가 주관하고, 그 아래 소속된 18개 분과가 각각 분과 사업을 총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학술전문용어 정비 및 표준화사업’의 총 예산은 3억원. 그 아래에 어학, 문학, 철학, 수학 물리 등 18개의 분과가 참여하고 있으므로, 1개 분과에 돌아오는 예산은 산술적으로 볼 때 1700만원에 불과하다. 하지만 예산 대부분이 분과 총괄 사업 관리에 책정될 수밖에 없어 실질적인 표준화 작업에 대한 지원을 기대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실질적인 작업을 진행하는 학회 자체적으로 비용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보니 공청회 등을 통한 학계 의견 수렴 절차를 포함할 엄두도 내기 어렵다. 2년에 불과한 사업기간도 정상적인 사업 진행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에 대해 ‘학술전문용어 정비 및 표준화사업’의 한 관계자는 “적은 예산과 촉박한 사업기간으로 표준화 작업에 애로가 많다”며 “학술용어 표준화가 정보화와 학문발전의 기틀이 되는 중대한 국책사업임에도 교육부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인식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워크숍에서 공개된 불교학술용어 표준화 시안은 추가적인 수정·보완작업을 거쳐 단계적으로 사업주관단체인 한국학술단체연합회에 제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