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장삼이 바람에 흩날린다. 바람결에 어깨춤을 추고 있는 장삼자락 사이로 선방 앞 공터에는 빨래를 널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이 비친다. 한쪽에서는 깨끗이 씻어말린 발우를 거두는 손길이 바쁘다. 석 달간의 하안거(夏安居) 해제를 며칠 앞둔 선방들은 해제에 앞서 옷과 발우 등 그동안 사용했던 살림을 깨끗이 손질하는 스님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선방 스님들은 해제 3~4일전쯤 죽비를 내려놓고 자신이 입던 장삼, 깔고 앉았던 좌복 등을 꺼내 세탁하기 시작한다. 이는 부처님 당시부터 전해 내려왔던 해제의식으로, 다음 철 정진을 위한 또 하나의 준비의식이다.
안거는 음력 10월 보름~정월 보름, 4월 보름~7월 보름까지 일년에 두 차례 스님들이 선방에 머물러 수행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올해 하안거 해제는 8월 30일. 원래 안거는 부처님 당시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돌아다니며 생활하는 출가 수행자들이 우기(雨期)인 여름철에 폭풍우를 만나 피해를 입기도 하고, 또 이를 피하기 위하여 초목과 벌레들을 해치는 사례가 많아지자 이 시기에는 아예 외출을 금하고 수행에만 몰두하던 관습에서 유래한다. 현대에 들어와 안거는 산중과 도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스님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일컫는다.
석 달간의 안거생활을 마친 스님들의 느낌은 어떨까?
대부분의 스님들은 산문을 나서며 두 가지 마음이 교차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안거 기간동안 큰 도를 이루지 못한 아쉬움. 또 하나는 다시 속세로 돌아간다는 설레임이다. 어떤 스님들은 그런 감정이 안거의 횟수와 상관없이 거듭되는 것 같다며 쑥스러워 하기도 한다. 사실 해제를 보름정도 앞두고 부터는 마음이 다소 산란해진다고 한다. 빨리 산문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번뇌로 찾아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스스로를 다그치고 수행에 정진하는 게 선방의 스님들이다. 일부 스님들은 해제와 함께 또 다시 산(散)철결제에 들어가기도 한다. 막상 수행의 참맛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을 때 해제를 하기가 곤란한 스님들은 그대로 선방에 남아 안거를 계속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님들은 짧게는 1개워 ㄹ길게는 3년 까지 안거를 지속한다.
안거 마지막 날은 자자(自恣)를 통해 안거 중에 한 행동들을 대중 앞에 참회하고 잘못을 지적받는다. 자자는 결제를 통해 안거를 시작한 수행자들이 3개월 후 부처님을 찾아 그 동안의 생활을 점검받는 의식이었다. 요즘은 포살과 자자를 통해 서로의 잘못을 호되게 꾸짖는 것에서 스스로 참회하는 형식이 대부분이다.
이를 마친 스님들은 선방에서 친하게 지낸 도반들과 삼삼오오 모여 다담(茶談)을 나누기도 한다. 이때 오가는 얘기는 주로 앞으로 자신의 수행 향로에 관한 것일 경우가 많다. 선방으로 유명한 범어사와 상원사, 칠불암 등에 대한 정보 등을 나누며, 서로를 북돋고 격려하는 것이다.
해제날이 밝으면 결제를 지낸 스님들은 머물던 요사를 정리하고 안거증을 받는다. 이어 큰 법당에 앉아 조실스님 등 큰 스님의 법문을 듣은 후 약간의 해제비와 바루, 장삼, 거울 등 6물을 담은 걸망을 짊어진 채 산문을 나선다. 수행자에게 수행처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선방이나 속세에서나 개달음을 향한 구도의 길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