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구의 알피니즘이 산을 도전의 대상으로 보고 더 빨리, 더 힘든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오르는 것이라면, 우리의 산은 입산입니다. 풍류가 있고 서민들이 나무를 하며 살아온 생활터 였습니다.”
한 때는 산에 미치다시피 했다. 서울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난 산은 도심생활의 도피처였다. 암벽등반을 배우면서 본격적인 전문 등반가가 되었고, 한국등산학교에서 정식 산악인으로 기반을 닦았다. 산에 오르면 오를수록 더 극한 상황을 찾게 되었고, 힘든 산일수록 매력이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 산은 ‘첫사랑’이었다.
“산은 나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가르침을 주었지만 단지 올라야만 한다는 생각에 외면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히말라야를 가기위한 준비과정에서 사람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문득 ‘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으니 당당하게 가자’는 생각에 등산에 대한 모든 것을 놓았다. 용기있게 놓은 산이었지만 상실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허탈감속을 결혼이 비집고 들어왔고 뒤늦게 아이도 낳았다. ‘백두대간’ 종주를 인연으로 만난 남편은 어느날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10년전, 아들과 함께 지리산 청학동으로 터전을 옮겨 ‘백두대간’이라는 전통찻집을 냈다.
“산에서 내려와보니 오르려고 할 때는 보이지 않던 또다른 산이 보였습니다. 산은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았고, 마음으로도 즐겁게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요즘도 가끔 아들 기범이와 산행을 한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꽃도 보고 나무도 살피며 갈 수 있는 곳까지만 갔다가 되돌아온다.
이곳 화개에 자리잡기까지에는 또 한번의 시련이 있었다. 몇년전 강원도 정선의 폐교에서 ‘정선자연학교’ 교장을 맡아 운영했다. 나름대로 잘 살았다. 마을사람들과도 재미있게 어울렸고, 농사일도 제법 익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삼년만에 태풍 루사를 만났다. 루사는 바람과 물로 정선생활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제가 너무 많이 가졌었나 봐요. 자연이 덜 가지라고 그랬나본데, 아직도 욕심이 많이 남았나 봐요.”
이제 화개에서 1년 반이 지났다. 자연에게 뭔가를 준다는 생각보다 자연을 덜 건드리기로 했다. 적게 가지는 것이 자연을 덜 괴롭히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느리게 사는 여유도 부려본다.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살만해요. 그러니 가능하면 일을 만들지 않아요. 내가 할 수 있을 만큼만 합니다.”
돈도 최소의 생활비만 있으면 된다. 두 사람 생활비로 일년에 된장 10가마를 생산해 알음알이로 소매한다. 양이 적어 홍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도 10가마했고 금년, 내년에도 10가마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소일하며 산다. 봄이면 친구들과 우리차를 만든다. 집 울타리 옆에 있는 차나무에서는 집에서 마실 차를 만든다. 족히 30통이면 넉넉하다. 그래서 우전까지만 차잎을 따고 그 뒤로는 그냥둔다. 그러다가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면 모든 일을 제쳐둔다. 특히 지리산자락에 모여사는 예술문화인들이 올라치면 날밤을 새우곤한다. 스스로 ‘지리산 마실단’이라 칭하는 이창수(사진), 김용해(조각), 박남준, 이원규(시인) 씨와의 만남은 언제나 좋다.
“스님들이 이 집에 오시면 한결같이 ‘수행 토굴터’라고 해요. 그래선지 몰라도 모두들 편하다네요. 건너편 큰절에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번잡함이 있지만 여기는 한적해서 공부하기에 그만이죠.”
매일 아침 아들 기범이와 계곡 넘어 쌍계사 대웅전을 찾아 108배를 한다. 그렇다고 잘 살게 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잘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 때로는 기억나는 이들을 떠올려 축원하기도 한다.
집은 ‘몇 대를 적선해야 살 수 있다’는 남향으로, 풍수를 모르는 이도 한눈에 명당임을 느끼게 한다. 하루 중 대부분을 툇마루에 앉아 책을 보거나 차를 마신다. 그러다 쌍계사 큰절과 병풍처럼 첩첩히 둘러친 지리산 자락을 바라보며 대화한다.
“저에게 산은 종교이자 자연으로 모두 하나입니다. 산에 오르다보면 집착을 버리게 되고, 욕심이나 번뇌 망상이 없어지면 행복하잖아요.” 모든 것을 ‘턱’놓고 앉아 자연과 하나 될 때 비로소 산이 보인다.
살면서 항상 책을 가까이 했다. 어려서는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한때는 서점도 운영했다. 시적인 감수성 때문인지 산에 오르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울 일이 많아 울었고, 산이 감격스러워 울었다. 그런 감성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책을 한권 냈다. 독자들로부터 반응도 얻고 팬도 생겼다. 이번에도 또 한권의 책을 냈다. 자연을 벗삼아 사는 이야기를 묶어 <낮은 산이 낫다>(학고재 刊)를 세상에 선보였다.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삶은 아무것도 가지고 싶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또 어느 곳에도 가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게 되었다. 물기가 다 빠진 풀처럼 가벼운 마음이다. 참 좋다.”